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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너머 모리스블랑쇼 -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2020.12.17.발제자: 우점임

카프카 문학을 연구한 발터 벤야민은 서술적 종말로 이어진 새로운 인류학적 사상은 왜 필연적인지 그리고 어떠한 새로운 형식의 단편 산문이 전통적 서술을 대체하는지 보여주고자 했을까?

카프카의 문학에선 인생경력 실패와 문학경력의 실패가 있다한다.

우선 문학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인생경력에서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카프카 자신은 문학적 형식에서 실패하는 모습을 보인다. 카프카는 본래 고전적인 소설을 계승하고자 했으나 실패한 시작과 열린 결말 탓에 좌초하게 된다. 카프카는 교양소설이야기를 위해 상보적으로 구상된 두 모델(유기적 성장 모델, 건축적 구성 모델)을 불러낸다. 그의 미완성장편들의 각 모델을 분석하며, 결국 마지막 미완성장편은 나머지 반생을 위한 건축적 전략을 찾고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벤야민은 (성적경력, 사회적 경력, 경제적 경력)에서의 실패를 카프카 인류학의 핵심으로 보았다. 이 실패의 근처엔 세계인식의 패러다임 변화가 있으며, 이 변화가 충격을 야기한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방향 설정의 충격을 야기하고 결국 이력을 실패로 이끈다. 벤자민은 카프카의 문학은 신비주의적 경험(전통에 관한), 살아있는 물리학과 동시대상 두 초점을 가진 타원이라고 설명한다. 이 두 초점의 분열로 인한 충격속에서 카프카는 세상을 인식한다. 충격은 다시 네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데,

1.이유 없는 죄에서 깨어남/ 2.생물학적 이력/ 3.낯선 제도

4. 유기체의 기술코드 간의 비정상적관계이다.

그리고 카프카의 문학형식 역시 장편소설과 비유담으로 구별되는데 이를 벤야민은 인류학적 서사로 이러한 형식을 만드려는 두 상보적 시도라고 평가했다

 

ㅡ카프카와 브로트

카프카는 생계를 위해 삶의 마지막 순간가지 집필에 몰두한다.

“고통이 너무 크지만 않다면 나는 죽음의 침상에서 매우 만족스러울 것 같다. 내가 쓴 것 가운데 최상의 것은 만족스럽게 죽을 수 있다는 능력에 근거하고 있다.”

(카프카의 일기)

 

카프카의 유고집이 세상의 빛을 보게 만든 대표적인 작가로서는

“막스 브로트(Max Brod:1884~1968)는 프란츠 카프카가 죽은 후 강렬한 우정이 이뤄진다. 글쓰기의 주저, 출판의 거부, 작품폐기의 결정과 같은 카프카의 문학적 편집자적 후견인으로서 문학적 순수함에 관한 모든 미덕은 카프카에 돌렸다.”

카프카는“난 막스 브로트와만 여행하고 싶다.”고도 했다.(카프카의 일기)

그리고 “구스타브 야누흐Gustav Janouch:1903~1968)는 18세의 청년 시인은 1920년 3월, ‘노동자 재해 보험공사’에 다니던 아버지의 소개로 같은 직장에 근무하던 『변신』(1915)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를 만났다. 카프카의 노트를 엮어 1965년, 『카프카와의 대화』출간했다.

너무 일찍 죽은 카프카는 자기 글을 없애버리지 못하고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자 기가 죽으면 자기 글을 몽당 없애달라고 부탁했다. 막스 브로트는 그 원고를 하 나도 없애지 않고 카프카 전집을 출판하고, 공연될 수 있도록 대본으로 각색하며 (블랑쇼의 표현에 따르면) 비장함과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되도록 소설의 결말을 마음대로 바꾸기도 하고 했다. 이 때문에 카프카의 원작이 보여준 끝없는 방황의 세계는 상실되었다고 블랑쇼는 비판한다.

 

ㅡ카프카의 『성』과 『소송』

『성』에서 브로트는 카프카를 출판 논평하고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으로도 삼아 카프카의 세계 가운데 끌어들이려 했다. 미완성된 이야기를 연극대본을 각색하면서 보다 내밀한 유혹에 이끌렸던 것 같다.

『소송』에서 동일한 작업을 시도했던 지드와 장루이(Jean Louis Barrault)가 주인공을 “결백한 박해자”로 만들고 소설을 “피상적인 드라마 기법을 통해 달아나는 자와 쫒는 자가 쫒고 쫒기는 추리물” 로 만들면서『소송』을 왜곡시켰다고 그들을 브로트는 비난했다.

우리의 부조리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카프카의 작품, <소송> 에선 '모든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단지 필연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ㅡ그런데 모든 작품을 없애달라는 카프카의 의도가 궁금하다. 살아생전 브로트는 카프카보다 더 유명한 작가였다. 그는 브로트를 통해 완성되지 못한 작품이 이런 저런 변형을 가지고라서도 세상의 빛을 봤으면 하는 바램이 있지 않았을까?

스스로 ‘섞어 없어질 글’을 쓴다고 했던 중국의 사상가 ‘루쉰’도 자기의 글을 모두 모아 엮어두고 출판했다 왜 그랬을까? 글을 쓴 사람은 분신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글이 챙피하지만 남기고픈 욕망이 있어서이다. 브로트에게 문학적인 양심으로서의 진정성을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ㅡ밀레나의 실패

카프카는 왜 밀레나를 사랑했고, 사랑할 수 없었는가?

카프카가 입에서 붉은 피를 토하면서까지 사랑했던 여자, 얼굴이 둥그스름한 미모의 밀레나는 이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정열적인 연서(戀書)들을 1924년 카프카가 세상을 떠난 후까지 소중히 보관한다. 베르테르가 이미 약혼자가 있는 로테를 미칠 듯 사랑하고 괴로워하다가 죽어갔듯이, 20c의 고독자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는 에른스트 플라크(Ernst Pollak)의 젊은 아내 밀레나 에센스카(Milena Jesenska', 1896-1944)와 3년 정도 연인관계였다고 한다.

“그럴 리는 없을테지만,ㅡ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점심이나 저녁이 아니라 차라리 한순간 나를 뉠 수 있는 들것이겠지.” 카프카의 편지에 밀레나의 강렬한 열정이 폭발한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이라고 말할 때는 아마도 진정한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나를 향해 들이대는 칼이 당신이라는 사실이, 나에게는 바로 사랑입니다.”

-프란츠 카프카,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 중

“내 사무실은 그 곳에 내가 존재하는, 무고한 눈으로 나를 지켜보는 살아있는 존재이다.” 빈으로 와 달라는 밀레나에게 쓴 글, ‘사무실’은 인격화된 비인칭이다.

그러나 빈으로 달려가 그녀와 함께 고요히 숲속에 나란히 누워 밤을 새웠다.

카프카에겐 밤의 위험과 맺은 하나의 협약이다

“어두운 힘에의 의탁” , “습관적으로 잘 절제되고 있는 역량의 폭발” , “불순한 중압감”이 모두 작동한다. 그러나 카프카에게 있어선 낮 시간의 세상과 반대편 저 너머 밤의 세계는 우울과 초조함의 시간이다.

이미 3번째의 약혼녀를 만나지만 폐결핵으로 요양 중이던 카프카가 자기 작품을 체코어로 번역한 밀레나와 편지를 주고받다가 그게 사랑으로 발전된 밀레나는 카프카와 예술적으로 교감이 가능한 사람이었고, 또 서로 정신적으로 위안이 되는 존재였지만,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완성되지 못했다.

“ '그녀가 있는 곳에 어두움이 있을까?’ 넌 내가 어떻게 사느냐고 묻고 있지. 난 이렇게 살고 있단다.카프카와 밀레나는 직접 만난 것보단 편지로 더 많이 교감한 커플이었다.

ㅡ카프카 낮과 밤의 시간이 다르다. 왜 “어두운 힘에의 의탁” 이라고 했나?

 

ㅡ서술의 목소리(‘그’, 중성적인 것)

우리는 늘 서술에서 가장 빛나는 단락, 이를테면 뜻밖의 놀라움을 선사하거나 신묘한 매력으로 유혹하는 단락에 빠져든다.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는 이런 화려한 글과 클라이맥스 및 결말의 글들이, 아름드리 거목도 작은 뿌리털에서 자라나는 것처럼 사실은 작고 담백한 디테일, 국왕의 손짓 같은 묘사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윌리엄 포크너, 도스토옙스키, 스탕달의 문장을 되짚어볼 때면 그들의 엄청나게 풍부한 서술에 붙들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리곤 한다.

이것이 바로 서술의 힘이다. 느낌을 드러내든 생각을 드러내든 작가는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택된다.

 

ㅡ‘그’와, 중성적인 것

중성적인 것을 통해 말을 건다는 것. 그것은 거리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중성의 말은 드러내지도 숨기지도 않는다.

중성적인 것의 요구는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이거나 존재에 대한 귀속 관계인 언어의 속사(屬辭)구조를 유예시키려 하는데, 이 관계는 무엇을 말할 때 우리의 언어습관상 제기되는 문제이다.

그리하여 서술의 목소리는 이해를 떠나 들을 수 있는 가장 비판적인 목소리가 된다. 광기의 비스듬한 목소리와 혼동한.

나는 ‘삶은 어느 정도까지만 그 힘이 미친다’

“삶의 힘은⸱⸱⸱⸱⸱⸱⸱”이라는 문장이 그 자체로서 가능한 문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납득해야만 할 것 같다. 그렇더라도 이 문장은 남겨두도록 하자. 밝히지도 흐리지도 않는 어떤 말. 글을 쓴다는 것, 이 삶에로의 관계. 관련되지 않은 것이 분명해지게 되는 우회적 관계. 어떻게 할 수 없는 낯섦 속으로의 뒤틀린 엉컬어짐 속으로의ㅡ중성적인 것으로 들려오는 ㅡ타자의 제압을 가리킨다.

 

이야기는 삶을 중성화시키는 하나의 원과 같은 것, 삶과 관련 없는, 하지만 중성적 관계를 통해 삶과 관계를 통해 삶과 관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원이 그 중심을 원 바깥에, 원 뒤에, 무한히 뒤에 두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이 바깥이 분명히 모든 중심의 부재일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중심인 것처럼, 그런데, 이 바깥, 이 ‘뒤’는 우리가 모든 것을 한눈에 포착할 수 있고(중심 안에서 벌어지는)사건들을 굽어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지배의 장소가 결코 아니다.

한계에 대해 말 할 수 있고 한계에 대한 경험을, 한계에로서의 경험을 맡아 이르게 할 수 있게 되는 그러한 무한의 거리는 아닐까?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이야기는, ‘삶의 힘은⸱⸱⸱⸱⸱⸱⸱’그러한 모험의 공간일 수 있고, 한계, 아마도 중성적인 그러한 한계.

『문학의 공간』에서 보았듯이 ‘나’에서 ‘그’로의 이행이라고 한다면 하지만 나를 대신한 그가 단순히 또 다른 나, 특히나 미적 무관심 ㅡ 독자와 관람자가 심심풀이로 비극을 즐기도록 허락하는 순수하지 못한 관조적 향유ㅡ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면 글 쓰기가 특정 지을 수 없는 ‘그’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 될 때 문제되는 것이 무엇인가 살펴보는 일이 남아 있다.

존엄한 명사 가운데 그를 확정시키기도 하는 대문자로 숭상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그러한 타자는 정확히 말해서 결코 오직 타자일 수만은 없다.

서술의 목소리는 중성적인 것의 목소리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닐 땐, 서술의 목소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다. 중성적인 것이 지배하는 서술은 한 명의 삼인칭이 아니고 단순한 비인칭의 거처도 아닌 삼인칭인 ‘그’ 의 감동하에 이루어진다. 중성적인 것이 말하는 서술의 ‘그’ 는, 공공연한 혹은 은밀한 ‘나’이거나 아니면 비인칭의 의미 속에 일어나는 사건과 같은, 일반적으로 주어가 갖는 자리를 차지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소설가는 나라고 말하기를 거절하는 자인데, 하지만 나의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한다. 소설은 고통스러우면서, 언제나 이 불행에 만족하는 대수롭지 않은 ‘에고’로 가득하다. 소설은 하나의 예술작품이고, 예술작품은 세상을 벗어난 세계 속에서 비실제적인 홀로 존재하여야 하기 때문에, 개입하여서는 안 되고 지주를 폐기하고 닻줄을 끊어 작품을 이미지와도 같은 대상의 지위가운데 유지하기 위해서 말라르메가 말하자면,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요구가 이미 예고되고 있다. 자유를 풀어줘야 한다.

 

ㅡ나무  다리(반복, 중성적인 것)

『성』그 속에 우리가 중성적이라 부르는 것을 중심으로 (그리고 모든 중심의 부재로) 간직하고 있다면, 그것을 이름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일 수는 없다. 왜 이 이름인가?

마르트 로베르에 다르면 지고의 힘이랑 중성적인 것으로서, 사실들을. 그리고 사실들에 앞서거나 뒤따르는 판단들을, 생각들을, 꿈들을, 이 모두를 개인으로서는 기이하게도 어떤 무게처럼 어떤 부당함처럼 느껴지는 중성과 수동의 상태에서 기록하는데”한정되는 힘이다.

모든 이야기란 이미, 중성의 인용 형태를 취하고 있는, 기이한 장소라 할 때, 우리는 왜 『돈키호테』가 우리의 시대가 될 고통의 시대를 그토록 생생하게 열어주고 있는 가를 이해할 수 있다.

돈키호테에게 광기가 있다면 세르반테스에게는 더 큰 광기가 있다. 돈키호테는 합리적이지는 않지만, 책의 진실이 삶에도 역시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책처럼 삶을 살아보리라 할 때의 그는 논리적이다. 경이롭고도 기만적인 모험.

서재를 떠나지 않은 채, 삶도 없고 움직임도 죽음도 없는 글쓰기 외에는 살면서 분주해 하면서 죽어가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그가 진력하고 있는 곳은 여전히 책 속이다.

초월 초과 돌파 넘어섬 등 의미

마치 무한의 소실점처럼...

그것을 말하는 자, 그는 언제나 타자이다.

 

“우리가 눈 속에 선 나무등걸과도 같으니까 겉보기에 그것들은 그냥 살짝 늘어서 있어 조금만 밀치면 밀어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하지만 , 그럴 수는 없다. 나무들은 땅바닥과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보아라. 땅바닥과 단단하게 결합ㅂ되어 있다는 것도 다만 겉보기에 그럴 뿐이다.” -카프카 <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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