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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주차 블랑쇼 발제입니다.

노을 2020.12.10 19:17 조회 수 : 58

1. 카프카의 글쓰기 강박증 (《카프카의 일기》)

  카프카는 자전적인 글쓰기를 시도하는 면모가 보이는데, 그는 공개되기를 바라는 공개형의 일기를 쓴다. 그의 일기에 따르면 그가 싫어하는 것들과 열망하는 것들이 직접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부친의 권위적인 태도를 둘러싼 가족의 문제를 비롯하여 유대교 문화의 비과학성(조카의 할례 풍경) 등이며, 그가 열망하는 것은 글쓰기와 글쓰기의 재능이다. 그는 일기장이기에 재능을 지닌 자에 대한 질투(‘그는 글을 쉽게 썼다’, 242쪽)도 숨기지 않는다.

  Q) 감정과 문학(일기)은 분리가 가능한가?

  “일기를 쓰는 것의 장점은 사람이 지속적으로 겪게 되는 자신의 변화를 명료하면서도 편안한 방식으로 의식하게 된다는 것이다.”(249쪽)

  개인적으로 일기를 쓰지 않는 입장에서 가끔은 감정이 복받칠 때 일기를 쓴다. 일기는 감정의 배출구 혹은 분출을 위한 수단인데, 카프카는 그날그날의 일(만났던 사람, 관람한 공연, 불쾌한 일, 설렜던 일 등)을 세세히 기록하면서 이를 또한 문학적인 재료로 활용하는 것 같다. 예전에 작성한 일기를 다시 들추어보면 그때의 감정(분노, 증오, 수치심, 화증...)에 휘둘리기 쉽기에, 작성한 노트를 버리곤 하는 입장에서, 카프카는 감정이 절제된 일기 쓰기를 한 것인가, 의도적으로 또 다른 문학적 수단의 대체물로서 일기 쓰기를 자행한 것일까?

 Q) 카프카는 시적인 인간인가?

  “나는 때때로 책상에 앉지도 않은 채 써야 할 글의 첫 문장들을 생각해내지만, 그 문장들은 쓸모없고 무미건조하며 완성되려면 한참 남은 상태에서 끊기고, 그처럼 뚜렷하게 끊기는 구절들을 통해서도 이미 어떤 슬픈 미래를 가리키고 있다.”(239쪽)

  카프카는 한가로운 일요일에 일종의 흥분을 느끼며 일기를 쓴다. “글을 쓰는 수밖에는 없다.”(226쪽) 글을 쓰지 않는 하루가 있다면 일종의 반성을 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228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책은 멈추지 않는다. “나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문학에만 집중하지 못하는가”(232쪽) 카프카는 ‘나는 왜 이렇게 글을 잘 쓰는가’를 자문했던 니체와 다르게,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한다. 이는 니체가 산문적인 인간이라면, 카프카가 시적인 인간이기 때문일까?

 

2. 실존적인 행위로서 글쓰기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 <사냥꾼 그라쿠스>, <만리장성의 축조>)

  카프카는 <요제피네>를 통해서 요제피네가 여가수인가? 혹은 서씨족인가?를 묻는다. 요제피네는 여가수이지만, 가수이기를 그만두고 사라진 서씨족이다. 요제피네는 ‘복종을 모르는’ (“우리 종족은 무조건 복종이라는 것을 모른다”, 309쪽) 서씨족의 여가수다. 그녀를 중심으로 몰려둔 대중은 항상 그녀가 선두에서 노래하기를 청한다. 하지만 요제피네는 부상을 입고 더이상 그 요청을 들어줄 수가 없다. 이 상황에서 요제피네는 실존적인 선택을 한다.

  요제피네는 음악 가수일 뿐만 아니라 군중의 꿈속에 나타나 휘파람도 불어준다. 휘파람에는 “결코 말살되지 않을 삶의 명랑성”(317쪽)이 들어 있다. 요제피네의 노래에는 ‘자신의 갈망에서 나온 진정한 즐거움’이 담겨 있다. 이로 볼 때 요제피네의 사라짐은 “구원”을 향한 ‘즐거운 사라짐’(327쪽)임이 분명하다. 요제피네는 예술(음악, 노래)을 지향한 여가수가 아니라 자기 구원을 지향한 서씨족이다.

  Q) 요제피네는 누구인가?

 노래하는 요제피네는 글을 쓰는 카프카의 모습과 겹친다. 요제피네의 노래는 군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구원을 위한 행위다. 이로 볼 때 카프카의 글쓰기 또한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구원을 위한 실존적인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봐도 되는 것일까?

  Q) 그라쿠스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사냥꾼 그라쿠스는 죽었지만 죽지 못한 자이다. 이 인물은 그야말로 ‘죽음의 경험’을 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나는 즐겁게 살았었고 또한 즐거운 마음으로 죽었습니다.”(504쪽) 이에 따르면 즐거운 삶과 즐거운 죽음은 하나다.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았기에, 그는 살아있지도 죽지도 않는 중간자의 경계에 서서 죽음을 경험한다. 카프카는 즐거운 죽음을 위한 글쓰기를 지향하는데, 그에게 즐거운 죽음이란 ‘죽음의 경험이 가능한 상태’를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그라쿠스를 통해서 이를 실현하는가?

  Q)  카프카는 어떻게 <만리장성의 축조>를 썼을까? 

 이 작품은 만리장성의 허황됨(‘만리장성은 황제다’)을 비판하는 풍자적인 면모가 보인다. 이 작품에서 눈길이 가는 대목은 다음이다.

 ​ “나는 스무 살에 가장 낮은 단계의 학교의 최종 시험을 마치고, 곧바로 벽 쌓는 일을 시작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나는 행운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전에 그들이 받을 수 있었던 교육의 최고 단계에까지 도달했었지만 수년 동안이나 그들의 지식으로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몰랐고, 머리 속에는 굉장한 건축 설계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쓸데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허랑방탕하게 지냈기 때문이다.”(509쪽)

 건축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진 것보다 벽돌 한 장을 쌓아 올리는 것이 가장 큰 행운이라고 말하는 화자는 카프카의 작가적 태도를 암시해준다. (막연한 공상보다 한 줄의 문장을 하나의 글쓰기를 지향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 미장이들의 ‘조급함’(“완성된 모습으로 일어서는 것을 보고 싶다는 조급한 마음”, 509쪽)을 비판한다. 

 무엇보다 왜 이러한 장성이 필요한가를 비판한다. 장성의 본질적인 목적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장성을 쌓아 올리는 일에만 매몰된 노예근성을 비판한다. 정작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오랑캐족은 쳐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며, 온다고 해도 “달리고 달리다가 그들은 허공으로 휩쓸려들 것이다.”(514쪽) 그럼에도 작품을 온전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3. 블랑쇼가 진단하는 카프카의 문학 (3장 <카프카와 문학> ~ 5장 <만족스런 죽음>)

 Q)  카프카의 문학은 블랑쇼가 보기에 ‘예술의 위엄’을 가지는가?

  ‘카프카에게 있어서 예술은 인식보다 더 멀리 나아간다. 인식이 실패한 곳에서 예술이 성공한다. 예술은 길이될 만큼 진실되지는 못하고, 장애로 바뀌기에는 지나치게 비실제적이다. 예술은 일종의 인 듯함이다. 우리가 진실 앞에 현전하고 있다는 것처럼 모든 것이 이루어지나, 이 현전이 하나의 진실은 아니다. 그래서 현전은 우리가 나아가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다. 예술은 인식이 영원한 삶에 이르는 단계일 때 인식으로 긍정되고, 그리고 예술은 인식이 삶을 가로막는 장애일 때 인식 아닌 인식으로 긍정된다.’(97쪽)

Q) 카프카의 문학 언어는 ‘언어의 죽음’을 지향하는가?

 ‘나의 불행의 상태는 나의 힘의 고갈을 의미하고, 나의 불행의 표현은 힘의 증대를 의미한다. 문학 언어는 언어의 죽음을 향해 달려나가지 않으면, 그 언어는 가능하지 않다. 언어의 죽음을 향한 이 움직임이 언어의 조건이고 언어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무를 예견하고서, 언어를 실현하지 않고 무가 되는 언어의 가능성을 결정하는 것이 이 움직임이다. 언어는 존재하지만 실현하지 않는 언어 아닌 언어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에 비현실적이다.’(99쪽)

  Q) 재현과 현시는 어떻게 다른가?

  “고통을 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현시하기 위하여 구성된다.” 100쪽

Q) 카프카의 언어의 죽음은 나의 죽음과도 연계되는가? 

  ‘문학이 나에게 그로의 이행임을 깨달은 날, 카프카는 문학의 풍요로움을 체험하였다. 나는 불행하다고 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불행이 진정 언어의 형태로 나의 것이 되기에는 나는 내 자신에 너무 가까이, 나의 불행에 너무 가까이 있다. 난 아직 진정으로 불행한 것이 아니다. 그는 불행하다는 이 이상한 치환에 내가 도달하는 순간부터 비로소, 언어는 나에게 불행의 언어로 구성되기 시작하고, 언어 속에 실현되는 그대로의 불행의 세계를 그리고 비추기 시작한다.’ (101쪽)

Q) <4장 카프카와 작품의 요구>에서 카프카와 아브라함의 상관성, 문학적 요구와 종교적 요구의 일치화는 블랑쇼에게서 발견된 것인가?

  ‘카프카에게는 종교적 요구를 문학적 요구로 이어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특히 만년에는 문학적 경험을 종교적 경험으로 이어가고, 믿음의 사막에서 더 이상 사막이 아니라 그가 자유를 돌려받은 또 다른 세계로서의 세계에 대한 믿음으로 옮겨 가면서 문학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이 구분되지 않고 혼동되어 가는 성향을 보인다.’ (149쪽)

Q) <5장 만족스러운 죽음>에서 카프카와 창조자는 어떻게 다른가? 전자는 파괴하는 자이고, 후자는 “파괴로부터 벗어나는 자”인가?

  ‘꿈들은 창조자들이 죽음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관계는 보기와는 달리 카프카가 쫓고 있는 관계이기도 하다. 그들은 죽음이 가능하기를 바란다. 카프카는 죽음을 붙들기 위하여, 창조자들은 죽음을 멀리 두기 위하여. 차이는 대수롭지 않다. 차이는 죽음과 자유의 관계를 맺는다는 바로 그 동일한 지평 가운데 그려지고 있다.’(159쪽)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대신에, 오늘 후기는 제가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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