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메르가 카잘리스에게 보낸 편지 두 구절을 인용 <문학의 공간 p149>
“그렇다 난 안다. 우리는 물질이 허망한 형태에 불과하다.”(1866년 4월 말)
유물론적 믿음의 공표가 아니라, 모든 것은 사고, 부재, 말, 죽음이라는 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연관 관계로 되돌아온다.
“무서웠던 몇 해“ (1867년 5월 14일)
분명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의 비밀스런 생명력, 힘, 신비를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 경험은 부정의 권능에 대한 경험이다. 그는 작품에서 ‘작용‘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았고, 부재의 작업을 경험 하였으며,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긍정의 능력을 포착한 것처럼 작품에서 현전을, 권능을 포착하였다고 말한다.
(질문) - 말라르메에게 1867년 5월 14일 이전 몇 해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왜 무서웠다고 했는가? - ‘아무것도 아닌 것‘은 <이지튀르>의 해석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이 해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말라메르가 카잘리스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한다. <문학의 공간 p147~148>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그 주제이기도 한 무력이라는 해묵은 괴물을 쓰러뜨리고자 합니다. 나를 이미 살펴본 엄청난 수고 속에 가두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야기가 완성되면 나는 나을 것입니다.......”
<이지튀르>는 현전하는 것. 그 이상의 모든 능력의 부재, 무력함이 되는 지점에서 작품을 붙잡으면서 작품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시도이다.
마치 무력이 가장 피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드러나야 하는 것처럼, 무력은 가련함과 포기, 그의 죽음이 무익한 무위에 불과한 노쇠한 노인의 하찮은 미래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파멸이다” <문학의 공간 p164 중간~>
그런데 이파멸속에서 무었이 일어나는가?
최상의 결합이자, 우연의 내밀성 속에서,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는 장소에서 죽는다는 사실에서 생겨나는 놀이.
우연의 밀도, 별빛과도 같은 우연의 영광, 우연이 가져다 주는 우연의 고양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확실성도 없다.
“이야기가 완성되면 나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중단되지 않는 것이 군림한다.
죽음의 확실성이 아니라 ‘죽는다는 영원한 고뇌’가
(질문) <이지튀르>는 30년동안 말라르메와 동반하며 무력을 쓰러뜨리려 한다. <주사위던지기>는 우연을 폐기할 수 없다고 한다. 말라르메의 이 두 작품에서 묻고 답하는 분위기를 느낀다. 그 관계를 알고 싶다. |
저는 여기다 질문을 간단히 써보겠습니다. 홍민 샘의 발제문에서 Igitur가 동시적 의미를 가지는 접속사라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ergo와 비교해서 한번 집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부재 가운데 사물을 나타나게 하고 또 사물을 부재하게 하는 말의 능력을 집요하게 추구했던 시인에게 "이것은 ...이다"라는 말 자체의 신비를 만났을 때 어떤 경험이었을까를 좀더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