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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수정해야 할 부분이 많지만 올려봅니다. 몇몇 문장은 제가 이미 쓴 다른 글에서 가져왔습니다.

 

 컴퓨터 게임과 공감장치의 발명 160711.hwp

 

컴퓨터 게임과 공감장치의 발명

 

 

 

 

영진

 

 

 

 

 

 

1. 예술언어로서의 상호작용 디자인

2. 공감장치의 발명

3. ‘으로서의 픽셀, ‘종합으로서의 픽셀

 

 

 

 

1. 예술언어로서의 상호작용 디자인

 

 

벤야민은 사진이 예술인가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사진에 의해 예술이 어떻게 재정의 되는지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같은 질문을 우리는 오늘날 컴퓨터 게임을 통해 물을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컴퓨터 게임도 일종의 예술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영화 같은 게임, 문학 같은 게임, 회화 같은 게임, 음악 같은 게임은 예술적이라고 평가한다. 게임시장 안에서 예술적인 게임과 보통의 게임이 구별되는 방식이다. 구 미디어의 연장으로서 신 미디어를 인준하고 있다. 사진을 굉장히 사실적인 초상화로 바라보는 시선과 다르지 않다. 이런 관점은 생산적이지 않다. 벤야민처럼 반대로 질문해야 옳다. 상호작용을 특징으로 하는 컴퓨터 게임이야말로 기존 예술에 영향을 끼쳐 그 개념마저 변경하고 있지는 않을까? ‘사진에 대한 벤야민의 질문을 컴퓨터 게임으로 바꿔 질문 해보자.

하지만 컴퓨터 게임은 예술보다는 놀이라는 영역의 계보에 있다. 놀이학의 관점에서 컴퓨터 게임은 시공간의 물리적 제약이 사라진 놀이공간을 출현시킨 것이고, 놀이의 방식을 혁신한 것이지, 놀이의 개념을 흔들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제 컴퓨터 게임이 단순히 놀이로 보기에는 어려운 표현의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는 발견일 것이다. 예를 들어 코리 아르켄젤(Cory Arcangel) 같은 미디어 아티스트는 새로운 물감으로서 게임엔진을 사용한다. 플레이어가 조이스틱의 버튼을 누르면 텍스트 안으로 어떤 표현이 기입된다. 이러한 상호작용이 창작자와 관람객 간 새로운 관계를 만들며, 결과적으로 예측불가한 상호텍스트를 형성한다.

 

 

 

컴퓨터 게임의 본질은 상호작용이 가능한 컴퓨팅 능력에 있다. 컴퓨터 게임을 어릴 때부터 체험한 세대에게 이러한 경험은 일상적이다. 개념적으로 배우지 않았어도 그들은 창작자의 단일한 서사보다는 독자이자 생산자인 자기 서사를 강조해 두는 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예술언어로서 컴퓨터 게임(상호작용 디자인)은 성립한다. 표현에 있어 발화자와 메시지, 수신자의 관계가 일방향적이며, 일회적이지 않고, 쌍방향적이고, 무한대로 변경된다. 이는 흔히 텍스트를 수정하거나 훼손하는 일과는 다르다. 코드화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전면적이면서도 비선형적인 수정을 가하는 일은 플루서의 표현처럼 면이나 선의 차원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점의 차원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원고지에서 문장이나 단어를 고치려면 두 줄을 긋거나 삽입기호를 넣는 방법밖에 없으나 (어디까지나 선적인 상상력) 워드 프로세서에서는 ctrl+f=>모두 변경을 통해 매끄럽고, 즉각적인 변경이 가능하다. 컴퓨터의 언어는 알파벳의 어휘나 통사구조에 영향 받지 않고, 그 근본에 01로 구별되고, 구성된 이항적 문자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코딩언어에서 중요한 것은 입력과 출력의 함수지, 출력된 결과물이 아니다. 새로운 미디어 경험이 결과보다 함수 그 자체를 중요시 여긴다는 것은 텍스트에 있어 표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텍스트는 열린 장치(dispositif)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컴퓨터 게임의 성격 또한 변해가고 있다. 특정한 규칙과 경쟁을 유도하는 아곤적인 게임이 아니라 미션이나 엔딩이 중요하지 않는 오픈월드형 게임이 선호되고 있다.

 

 

2. 공감장치의 발명

 

 

타인의 고통

 

 

<, 드래곤 캔서>(2016)라는 매우 사적인 컴퓨터 게임이 있다. 이 게임은 게임개발자 라이언 그린이 암에 걸린 자신의 아들의 투병과정을 소재로 만든 게임이다. 통상의 미션수행과정이나 퍼즐, 목표가 이 게임에는 없다. 다만 플레이어는 아픈 조엘을 달래주고, 부모의 고통에 공감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즉 조엘을 살려낼 수는 없지만 토닥일 수는 있다. 상호작용을 극대화한 컴퓨터 게임이라면 살려내는 일까지( 혹은 그 반대의 일) 가능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게임이 디자인한 상호작용은 위로할 수 있는 자유다. 이렇게 자유가 제한된 이유는 실제 모델인 조엘이 게임제작과정에서 사망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게임으로 구현된 거짓 희망보다는 그 이상의 경험을 플레이어와 공유하고 싶다는 제작자의 의도가 담겨 있다. 상호작용 디자인은 창작자의 의도가 없는 디자인이 아니라 의도가 최소로 반영된 디자인이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만질 수 있는 소설, 만질 수 있는 영화, 만질 수 있는 사진이 된다. 넘겨짚거나, 보는 자의 입장으로 과도하게 동일화 하는 공감이 아닌, 대상의 고통이 그대로 전이되어 오는 공감을 이 게임은 지향하고 있다. 애끊는 아픔,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게임은 그저 토닥일 수밖에 없는 플레이어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플레이어는 결국 이 어찌할 수 없는 비극 앞에서 기도하게 된다. 7챕터 <Sorry Guys, It’s not..)>(죄송하지만, 더 이상은..)에서 라이언은 병원에서 조엘의 치료를 더 이상 하는 것이 무리라는 말을 듣고는 치료를 중단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 때 그는 마치 물속에 빠져 죽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데, 게임은 이것을 의사와 부모가 모인 방 안에 물이 가득 차 들어가는 장면으로 표현했다.

 

이후 라이언 그린은 10챕터 <drowning>(가라앉은 자)에서 이 바다 속에 차라리 익사하는 것을 선택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녀의 아내, 에이미 그린이 제발 보트 안에 타라고 애원하지만 라이언은 거부한다. 바다 속에 잠긴 그를 플레이어는 터치해 수면 밖으로 나가도록 도울 수 있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마우스를 이용해 그를 밀어내 보지만 그는 조금 올라가 보다, 포기하고 다시 익사하길 원한다. 이 방식으로는 스테이지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 스테이지를 넘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내버려 두는 일이다. 그는 심해로 내려간다. 그곳에는 예상과는 달리 환한 빛이 보인다. 크리스테바는 멜랑콜리적 주체의 가능성을 논하며 이 힘을 검은 태양이라고 불렀다. 조엘에게는 환한 심해가 있었다. 이 상징적 자살을 관통해야만 라이언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섣부른 동정이나 삶에 대한 독려보다는 대상이 스스로 자신의 고통속으로 침찬해 들어가도록 놔 두는 일이 이 스테이지의 윤리다. 결국 우리는 타자의 고통에 대해 완벽히 알 수 없으며, 어쩌면 그의 고통을 그대로 응시하는 일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미션도 없고, 강제된 규칙도 없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플레이어는 느낀다. 다시 말해 플레이어는 마음대로 조종 할 수 있지만, 고통의 대상자인 조엘과 라이언은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조엘이 떠나고 난 이후의 환상을 다룬 12챕터 <Peace, Be Still>(조용히, 마음을 진정시켜요)에서 플레이어는 조엘이 평소에 놀던 장난감 상자를 만져볼 수 있고, 그의 작은 침대에 들어가 볼 수도 있다. 플레이어는 그가 남긴 공간을 위로로 만지는 것이다. 이 게임에서 타자의 고통은 기록하거나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같이 만지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저 그의 빈자리를 그 자리에 앉아 느끼는 것만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애도의 방식인 것이다.

 

수잔 손탁은 타인의 고통을 통해서 사진이 공감장치로서 타인의 고통을 알게 해주었는지, 혹은 오히려 외면하게 만들었는지 논의했다. 사진은 그 생생한 이미지로 인해 과거의 어느 매체보다 공감장치로서 유효한 기능을 가진 듯 보이지만 그 자체가 공감을 도덕으로 귀결시키진 못했다. 손탁은 우리가 전쟁사진을 통해 결국 느끼는 것은 공감의 한계라고 말한다. 죽은 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니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우리의 응시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이라고 우리는 기대할 수 있을까? 손탁은 오히려 우리의 공감이 그들이 받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그들의 고통에 대해 우리가 죄 없고 무력함을 전제한다고 역설한다. 이와 비교해 라이언 그린의 게임을 플레이하는 우리는, 그 무력함이 죄의식으로 바뀌는 기묘한 동력이 게임 속에 작동하고 있음을 논해야겠다. 제 아무리 생생한 이미지보다 상호작용이 가능한 버튼을 누르는 편이 더 연루되기 쉽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버튼을 눌렀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가 맞이한 무기력은 변명이 아니라 실재일 수밖에 없다.

 

 

내재적 승리

 

 

9챕터 <Joel The Baby Knight>(조엘, 아기기사 되다)에서 플레이어는 그나마 전형적인 게임을 해보게 된다. 조엘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라는 용과 싸우는 기사의 이야기로 설명해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게임 속 게임인 이 스테이지에서 조엘은 갑옷이 없어 괴물로부터 취약하다. 조엘이 그렇게 느끼자 하늘에서 갑옷이 내려온다. 이 스테이지에서 만큼은 조엘은 결코 죽지 않는다. to be continue 메뉴가 무한하게 제공되기 때문이다. 점프가 불가한 높은 벽에서는 황금색 매가 조엘을 물고 날아가 준다. 이 스테이지의 매력은 조엘이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죽지 않는다는 것, 위험상황에서 기적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게이머인 조엘은 결코 죽지 않는 게이머의 신체를 부여받는다. 이 주제는 실은 아즈마 히로키에 의해 이미 탐색된 주제다.

 

 

 

 

하지만 아즈마 히로키의 경우, 올유니드 이즈 킬이라는 소설을 매회분기마다 끝없이 선택해야 하는 자의 불안이 담긴 초상, 영원재귀의 악몽에 놓인 현대인의 리얼리즘으로 읽어냈다. 내 경우, 그 반대로, 올유를 새로운 신체성의 획득이라는 문제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올유는 근미래에 벌어진, 외계인 기타이와 지구인 통합 방역군간의 전쟁을 그 사건의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몇 페이지 못 가 당혹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 주인공 키리야가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투원인 키리야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살해된 전투의 30시간 전으로 돌아간다. 처음에는 이것을 꿈이라고 생각한 키리야는 점점 자신이 특정한 시간 속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반복을 끊어내는 방법은 전투에서 완벽히 이기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주인공 키리야 케이지는 160회째 반복에서야 루프의 악순환을 끊어낸다 "어린아이가 이길 때까지 반복해서 게임을 해 어쨌든 결국 승리"하는 것처럼, 루프의 악몽은 실은 인간의 승리를 내포한다. 그러니 올유의 핵심은 루프의 악몽과 이에 고분분투하는 인간의 고뇌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길 수 밖에 없다'라는 것을 깨닫고, 매회 사건에 충실하게 참가하는 인간이 결국 승리의 순간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때 승리의 순간은 루프가 종료되는 순간이 되며, 외부로 부터 온 경험의 이미지가 온전히 나의 리얼한 경험으로 전환되는 일이 된다. 즉 새로운 신체성이 획득되는 것이다.

게임체험이야말로 우리를 과거 어느 때보다 끈질긴 주체로 만들어 주지 않을까? 게임에는 실패가 없고, 오직 재도전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승리는 이미 내재되어 있다. 게임이라는 세계 속에서 만큼은. 조엘은 이 내재된 승리를 게이머의 신체를 통해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아버지 라이언 그린이 최초 아이를 위한 게임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러한 게이머의 신체를 부여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플레이어는 <댓 드래곤 캔서> 반복 플레이 함으로서, 조엘을 더 오래 살릴 수 있다.

 

이 스테이지는 최종 보스인 용과의 대결이 아닌 나머지 게임플레이에서는 무한 컨티뉴를 제공한다. 하지만 최종 보스인 용만이 마지막 반토막난 생명력으로 결코 죽지 않는 존재로 나온다. 조엘이 쓰러지고 아버지가 대타로 싸우지만 결국은 용을 잡지 못한다. 이 부분에서 많은 플레이어들이 실망하곤 하지만 필자는 게이머의 신체와 현실 간의 변증법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플레이어는 다시 반복해 그 스테이지를 플레이 할 수 있고, 실력에 따라 영원히 대결할 수도 있다.

 

 

 

 

3. ‘으로서의 픽셀, ‘종합으로서의 픽셀

 

 

플레이와 가상의 영토

 

 

 

 

스트루카츠키 형제의 SF소설 노변의 피크닉(1972)은 외계인이 소풍 와, 놓고 간 물건이 괴상한 일이 일어나는 구역을 만든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이 곳에 호기심에 찬 인간들이 잠입해 들어가 보물사냥꾼이 되는 사건이 소설의 줄거리다. 이 소설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스토커(1979)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이후 소설 속 금지구역(Zone)에 대한 상상력이 체르노빌 원전사고(1986)의 금지구역(Zone)으로 현실화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유사성에 놀랐다. 이것이 다시 게임 <스토커>(2007)의 주요한 모티브가 된다. 게임은 체르노빌 원전사고 후, 돌연변이들이 출몰하는 금지구역이 군대에 의해 통제되고, 이를 돌파해 금지구역에 들어가는 용병들의 이야기다. 체르노빌의 피해자들은 이 게임이 출시되었을 때, 체르노빌의 존 안에 돌이변이 생물체가 증가하고 이를 사냥하는 헌터들이 벌이는 살육전이라는 컨셉에 경악했다. 자신들이 겪은 고통이 고작 싸구려 SF물의 설정으로 이용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임은 체르노빌의 금지구역에 대한 철저한 답사를 해 만들었기에, 거의 실제와 유사한 지형과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과거 존 안에 존재했던 건물과 지형들이 고스란히 묘사되어 있다고 한다.

대규모 원폭사고가 있었던 체르노빌의 주민들은 이제는 금지구역(Zone)이라고 불리는 방사능 피폭현장 안에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한다. 대부분 강제이주된 주민들의 고향은 존 안에 있다. 그들은 이제 영원히 집에 돌아갈 수가 없다. 고향을 잃은 주민들은 이 게임의 테마에는 전부 동의하지 않지만 게임을 설치해 가상의 고향에 드나들기도 한다고 한다. 3d로 표현된 가상 공간 안에서 디지털 분신으로 드러난 과거의 이웃을 만나고 울고 웃는다. 그들은 잃어버린 고향을 컴퓨터 게임의 영역에서 되찾은 것이다.

이 경우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게임의 미션을 받아들이고 기록경쟁을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원작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플레이어가 스스로 이 가상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체험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League of Legends>라는 게임에 소비한 시간이 얼마인지 확인해주는 사이트(http://wasted-on-lol.com)가 있다. 기록된 상위랭커 중 어떤 한국인 유저는 쉬지 않고 이 게임만 무려 9141시간, 날로 치면 381일 동안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단일한 게임에 투자한 시간으로, 게이머가 게임에 소비한 모든 시간을 가늠할 수는 없다. 아마도 하드코어 게이머의 경우 수 만시간을 훌쩍 넘길 것이다. 제인 맥고니걸은 미국의 청소년 게이머들이 유년기와 청년기를 거쳐 평균적으로 1만시간을 소비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소위 게임중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이러한 수치를 들먹인 것은 아니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영토인 사이버 시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대는 현실만큼이나 게임에 자신의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있다. 당연히 그들에게 사이버 시공간은 말할 것도 없이 또 하나의 영토.

서구의 18세기 소설이 식민주의를 내재한 부르주아의 인격을 배양한 것처럼, 20세기의 TV와 영화가 산업 소비주의를 대중에게 훈련시킨 것처럼, 21세기의 게임은 전지구적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리허설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위기 속에서 군인과 정치가의 리허설이 아니라 시민의 공감장치로서의 컴퓨터 게임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역추상화

 

 

컴퓨터 게임의 언어인 코딩은, 그 근본에 01로 구별되고, 구성된 이항적 문자로 이루어져 있다. 플루서의 표현대로라면 부피에서, 면으로, 선으로, 급기야 점으로 찢겨진차원의 미디어다. 하지만 이 점의 미디어가 다시 종합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지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은 점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점이 현실보다 더 생생한 현실로 종합되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컴퓨팅의 능력을 이용한 가상세계의 재현방식이 점에서 선으로, 면으로, 부피로 다시 종합되어 가는 역추상화의 미디어 진화현상임을 전망해본다. 이는 물리적 제약이 사라진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에게 공감능력과 내재된 승리를 훈련할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침입하는 타자의 고통

 

 

이 게임의 백미는 챕터 13에서 벌어지는 조엘의 죽음 씬일 것이다. 거의 10분여간이나 이어지는 조엘의 고통어린 울음소리 앞에서 플레이어는 속수무책으로 서성이게 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나 정작 이 타자의 고통 앞에서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급격한 무력감은 스피커 너머로 전해오는 조엘의 울음소리와 대비된다. 이 점에서 플레이하는 자의 키보드는 연루의 징표다. 버튼 입력을 통해 이 세계에 발 들였으나 그 연루된 관계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없게 된다. 사진과 영화, 그에 앞서서는 문학이 이 세계의 타자의 고통을 우리에게 현전해왔다. 하지만 보다 생생한 이미지보다 더 강력하게 타자의 감각에 우리를 감응시키는 것은 바로 내가 개입해 상호작용을 꾸리는 게임체험이 아닐까. 게임이 공감장치로서 기능한다고 판단할 때 우리는 게임이 그 어느 매체보다도 당사자성을 직접 구성하는데 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관찰자가 대상으로 향하는 일방향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관찰자로 전해오는 침입과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인간의 윤리를 즉 상호신체적인 동일성을 야기한다. 이 점에서 게임 <, 드래곤 캔서>는 컴퓨터 게임이 새로운 공감기계로서 작동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아픈 아들에 대한 부모의 애끓는 마음과 기억이 우리에게 순식간에 덮쳐오는 이러한 체험은 한 개인의 기록이 공동의 기억으로, 역사의 기억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전망케 한다. 역추상화를 꾀하는 컴퓨터 게임은 이제 새로운 시뮬라크르를 구성하지만 이 가상의 세계야 말로 파생된 실재가 아닌, 실재를 새롭게 파생시키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엘의 시공간은 프로그램의 형태로 영원히 누구나 접속할 수 있도록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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