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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난 시간에는 『생동하는 물질』을 끝까지 읽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칸트, 드리슈와 관련해서 나온 자발성과 능동성에 대한 인간적 표상과 이른바 방법적 의인화와 방법적 사물화, 고장이 가진 유물론적 의미와 문제화, 세 가지 생태학 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먼저 칸트의 형성충동과 드리슈의 생명력은 능동성과 자발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두 개념 모두 수동적인 물질에 능동적으로 다가가 그것에 활력을 불어넣고 물질을 유기체라는 전체로 형성해내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그것은 지휘능력directing power을 통해 수많은 가능성 중 무엇을 현실화할지를 결정하는 자발성을 갖습니다. 하지만 이런 능동성과 자발성은 인간이 가진 표상을 생명력이란 개념에 투영한 것입니다. 능동성과 자발성을 ‘‘내’가 나서서 무언가를 한다.’라고 하는 인간적인 표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또한 형성충동과 생명력은 이전부터 존재하던 신체-영혼의 이원론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형성충동과 생명력을 영혼이라는 말로 바꿔도 형성충동과 생명력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는 기존에 존재하던 영혼이라는 관념을 형성충동과 생명력이라는 말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명력이 단순히 영혼이라는 말을 바꾼 것이 아니라면 영혼을 설명하는 술어들로 생명력을 설명할 수 없어야 합니다. 그게 안 된다면 영혼을 설명하는 술어는 그대로 둔 채 생명력이라는 주어만 바꾼 것이 됩니다. 또한 그것이 ‘나’의 능동성과 자발성이라는 인간적 표상을 투영한 것이라면 인간 아닌 생명력을 설명하는 데에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생명력이 독자적인 개념이 될 수 있으려면 영혼이라는 기존의 관념과도 구별되고, 인간적인 표상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독자적인 무언가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형성충동과 생명력 개념이 영혼과 차별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개념들이 정말 유의미한 것인지를 다시 물어야 합니다.

물질에 작용하는 외부적 힘으로서의 드리슈의 생명력 개념과 별개로 우리는 물질 자체에 내재한 생명력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외부적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 물질의 생명력(야생성)은 물질 그 자체가 가진 질료적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자석이 행사하는 자기력이라는 힘이나 혹은 중력의 힘은 외부에서 가해진 힘이 아닌 자석과 물체에 내재한 힘입니다. 이 경우 자발성이란 물질에 내재한 물질적 힘 그자체가 됩니다. 또한 이러한 물질들의 힘은 제약적인 자발성을 갖는데 자기력이나 중력은 특정한 하나의 힘만을 방사하기에 다른 것에는 작용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물질에 내재한 힘은 외부적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발적이며 또한 인간적 의미의 자발성과도 구별됩니다.

능동성 역시 ‘나’의 능동성이라는 인간적 의미를 피하기 위해선 다른 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도움을 주는 건 니체와 스피노자입니다. 니체는 힘의 질을 구별하는 것으로서 능동을 사용합니다. 양적인 힘과 별개로 힘의 질을 만드는 것은 능동과 반동입니다. 능동적 힘active이란 시작하는 힘입니다. 반면 반동적 힘reactive이란 능동적 힘에 대해 반응하는 힘입니다. 이에 따르면 양적인 힘이 아무리 크더라도 무언가에 반응하는 힘은 질적으로 반동적인 것이 됩니다. 가령 화를 내는 것은 항상 화를 내게 한 무언가에 대한 반응입니다. 화를 아무리 크게 내더라도, 즉 힘의 양이 아무리 많더라도 화는 항상 반응으로 나타나는 반동적 힘입니다.

스피노자에게 능동이란 원인의 관념을 갖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될 것이다.’라는 원인의 관념을 갖고 행동을 하지 않으면 ‘내’가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능동적인 것이 아니게 됩니다. 니체와 스피노자의 능동성은 ‘나’라고 하는 인간적인 의미와 관계없이 능동성을 정의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사물에도 쓸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자발성과 능동성을 사물에도 쓰기 위해서는 자발성과 능동성의 의미 자체가 바뀌어야 하며, 이는 반대로 말하면 사물이 보여주는 능동성과 자발성이 인간적 의미의 자발성과 능동성을 다른 의미로 이해하게 만든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니체는 ‘나’라고 하는 통일된 유기체의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힘 그 자체를 사유하려 했고, 이를 통해 미시적 신체나 물질이 가진 힘을 개념적으로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의인화입니다. 통상 의인화란 인간의 생각을 사물이나 동물에 투영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인간이 가진 특징을 사물이나 동물에게도 부여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서 인간을 설명하는 특징들에 맞는 작용을 동물이나 사물 역시 보여준다면 그들에게도 이런 특징들을 타당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는 『존재의 지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본 것처럼 ‘행위하다.’, ‘인식하다.’등의 인간적 특징이 사물에게도 반복 가능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다른 측면에서 의인화는 하나의 표현형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인화를 기표적인 측면에서 이해할 때 ‘행위하다.’, ‘인식하다.’등의 단어는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술어가 됩니다. 하지만 이런 의인화가 어떤 것을 표현하는가에 주목한다면 ‘의인화’라는 문법의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 이외의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그것이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의인화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표현되는 타자의 어떤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의인화를 기표적 의미로 받아들여 인간적인 것을 사물에게 붙였다고 이해한다면 사물의 행위는 우리에게 포착될 수 없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행위하다’라는 의인화가 사물의 ‘어떤’ 행위를 우리에게 드러내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의인화라는 표현형식을 통해 사물의 어떤 모습이 우리에게 새롭게 포착되는 가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차라리 의인화를 통해 사물의 어떤 힘, 감응이 우리에게 드러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의 표현형식으로서 의인화를 바라보는 것을 방법적 의인화로 볼 수 있습니다.

방법적 의인화와 반대로 방법적 사물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방법적 의인화가 인간이 가진 술어적 특징을 통해 사물을 포착하는 방식이라면 방법적 사물화는 사물이 가진 술어적 특징으로 인간을 설명하는 것을 뜻합니다. 『존재의 지도』에서 이야기한 것을 빌리자면 방법적 의인화가 ‘기계는 생명이다.’라는 정식에 해당한다면 방법적 사물화는 ‘생명은 기계다.’라는 정식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방법적 사물화는 사물들의 용어로 생명을 설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사물에 해당하는 술어적 특징, 그 특이성을 생명에게도 반복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물에 해당하는 분석적 성분, 가령 본다라는 것을 빛과 수용체의 반응이라고 정의한다면 본다라는 동사는 인간을 너머 식물은 물론, 센서와 같은 기계에도 쓸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본다라는 인식작용은 빛이라는 특이성을 포착하는 수용체의 기계적 인식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방법적 의인화는 사물을 주어의 자리에 놓을 수 있게 합니다. 이는 인간에게만 해당된다고 여겨졌던 술어를 사물에게도 사용함으로써 그 술어의 의미를 바꿔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다음으로 고장이 가진 유물론적 의미와 ‘문제화’방식입니다. 브뤼노 라투르는 무언가 고장이 날 때 우리는 유물론자가 된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고장은 관념의 작동이 멈추는 지점을 뜻하고 그 관념의 외부에 있던 무언가가 드러나는 지점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기계를 도구로 이용하려 할 때 그 기계가 무엇인지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이용할 때 노트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노트북은 단지 글을 쓰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도구에 불과한 노트북이 고장 날 때 우리는 노트북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고장과 연결된 어떤 연결망이 드러납니다. 노트북의 어떤 부품이 고장 났다면 그 부품과 관련된 사용 설명서, 그 부품을 다루는 사람 등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는 노트북이 잘 작동할 때는 드러나지 않았던 노트북을 구성하고 있는 연결망이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동시에 고장은 고장과 관련된 문제를 드러나게 합니다. 고장은 문제의 증상이고, 그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증상입니다.

고장이 드러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장을 적절하게 문제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즉 그 고장을 일으킨 문제가 어떤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포착하는 것입니다. 고장이 한 부품과 다른 부품의 문제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해당 부품들의 관계를 잘 엮어서 ‘이것이 문제야’라는 방식으로 적절히 문제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문제화하는 방식 속에서 각 부품들은 그 문제의 특이성을 이루는 특이점이 됩니다. 해당 부품들의 관계를 다르게 엮는다면 문제는 다르게 문제화될 것이고 부품들 역시 다른 특이점이 될 것입니다. 같은 고장도 다른 식으로 진단하는 전문가들은 이처럼 특이점을 연결하는(계열화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체가 고장이나 특정한 증상을 보일 때 의사마다 다른 진단을 내리는 것도 이처럼 증상을 통해 드러난 문제를 문제화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문제를 문제화하는 방식은 같은 문제도 상이하게 드러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그 문제를 이루는 특이점을 파악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고, 그 특이점을 계열화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같은 환경 문제라도 경제학자들은 화폐, 소비와 같은 경제적 특이점들로 문제화할 것이고, 생태학자들은 인간과 환경의 갈등과 같은 특이점으로 그것을 문제화할 것입니다. 이런 문제화 방식에서 인간은 최종심급으로서의 휴머니즘이라는 최후의 관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어떤 문제를 인간, 특히 인간의 생존으로 문제화한다면 모든 문제는 인간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환경 문제를 문제화할 때 인간의 생존을 중심으로 문제화한다면 환경파괴보다 개발을 통한 인간 생존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떠한 문제도 인간을 중심으로 문제화하는 순간 모든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인간의 건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중요하지’라는 것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문제 아닌 것조차 인간을 중심으로 문제화하는 순간 최종심급으로서 휴머니즘이 작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경우 문제는 언제나 인간이 주어가 되는 방식으로 문제화됩니다. ‘그래도 인간이 우선이지’라는 휴머니즘의 문제는 문제를 문제화하는 방식에서 발생합니다.

최종심급으로서의 휴머니즘의 궁지를 피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것조차 인간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문제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9세기에 등장한 임상의학은 인간의 문제조차 인간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문제화하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푸코가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보여준 것처럼 19세기 이전에 의사들의 관심사는 개별 환자의 신체 상태였습니다. 눈앞에 있는 환자의 상태가 어떤지 그 고통은 무엇인지가 이들의 관심사였습니다.

반면 19세기에 탄생한 임상의학의 관심사는 고통 받는 눈앞의 환자가 아니라 고통을 유발하는 원인인 병 그자체가 됩니다. 이에 따라 문제 역시 병과 관련해서 던져지고 그것을 문제화하는 것 역시 병을 중심으로 문제화됩니다. 이들은 유기체인 인간 이하로 들어가 병과 증상만을 문제시합니다. 이때 한 명의 환자, 유기화된 인간은 지워져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병을 치료하는 것 역시 인간 이전에 그 병 자체를 없애는 것이 목표가 되고, 병 자체의 치료에서 발생하는 인간에 대한 부작용은 가려지게 됩니다. 이때 다시금 ‘그 병의 치료가 환자 개인에게 어떤 문제를 일으킨다면 어떻게 하냐’라는 식으로 문제화된다면 병에 대한 어떤 치료도 실행할 수 없게 됩니다. 병을 치료하다 환자가 다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환자라는 유기화된 인간을 앞에 두고 문제화할 때 답은 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임상의학은 인간의 병도 인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문제화합니다. 그리고 임상의학이 보여준 것처럼 인간의 문제조차 한 명의 인간을 피해 문제화할 때에만 우리는 휴머니즘을 피해 문제를 바라볼 수 있고, 새로운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가지 생태학입니다. 베넷은 가타리의 세 가지 생태학을 들어 이들이 서로 서로 횡단하고 교차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타리는 사회 생태학, 정신 생태학, 환경 생태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들 각각이 따로 따로 논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생태적인 문제는 생태적인 만큼 사회적이고 정신적이기 때문에 사회 생태학, 정신 생태학의 관점에서 그것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겹쳐지는지를 다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 정신, 생태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생리 등등의 다른 것들과도 이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것들을 생태학이라는 이름으로 교차하고 횡단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데에 있습니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문제화의 방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문제화 방식이란 문제를 이루는 특이점으로 어떤 것을 파악할 것인가와 관련되어 있고, 그 특이점을 어떻게 계열화할 것인가의 문제와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세 가지 생태학이 어떻게 겹쳐지는가를 다룬다는 것은 각각의 생태학이 특이점을 포착하는 방식을 다른 생태학에 적용함을 뜻합니다. 이는 어떤 생태학이 문제화하는 방식에서 놓치고 있지만 또한 동시에 포착되어야할 것을 다시금 문제화하는 것입니다. 가령 생리학을 생태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의 신체는 미생물들의 서식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신체를 생태적 공동체로 보는 것입니다. 이는 생태적 공동체를 포착하는 포식, 동맹과 같은 특이점들을 신체에 적용한 것이고, 그것으로 신체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포착할 수 있게 됩니다. 이를 통해 생리학의 관점에서 놓치고 있었던 것을 생태적 생리학을 통해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방식은 우리가 그동안 포식과 동맹을 통해 미시적 신체를 파악했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반면 생태학을 생리학으로 다룬다면 생태학은 생태계의 건강을 다루는 문제로 바뀌게 됩니다. 통상 생태학이 환경 문제를 다룰 때 환경 문제는 인간과 환경의 대립으로 문제화됩니다. 그러나 이를 생태계의 건강을 다루는 생리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 생리적 생태학의 문제는 인간들만이 아닌 생태계에 존재하는 집합체로서의 대중들의 삶의 문제로 바뀌게 됩니다. 생태계의 건강이 곧 생태계라는 신체를 이루는 집합체로서의 대중들의 삶의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생태계라는 하나의 신체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그것을 이루는 대중들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 지를 다시 묻게 됩니다. 물론 이때 미시적 집합체로서의 대중은 인간 대중뿐만이 아니라 인간부터 사물까지가 엮여 거대한 집단을 이루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생태학에도 생리학이 있고 생리학에도 생태학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같은 방식으로 경제학에도 생태적인 것과 생리적인 것 모두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경제학은 단순히 화폐만이 아니라 생명이나 물질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으로 이용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여러 생태학을 교차하고 횡단해야 한다는 것은 각각의 생태학이 문제화하는 영역을 고유의 것으로 두지 않고 서로 넘나들게 함을 뜻합니다. 이를 통해 각각의 영역에서 가려져 있던 것을 드러내 새롭게 문제화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마지막 책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1-4장입니다.
발제는 유택 선생님과 엄진희 선생님입니다
책을 읽다 궁금한 점이나 같이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됩니다
에세이 프로포절 발표는 지현 선율 교오 홍민 효영 신영 신애 혜윤 정민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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