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지난 시간에는 『곤충연대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권의 책들을 읽으면서 인류학의 대상인 원주민에서부터 동물과 식물, 곤충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인간부터 곤충까지를 사고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것의 바깥을 함께 사고하는 것이었습니다. 타자인 그들을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구체적 배치(움벨트) 속에서 사고하는 것입니다. 유기체라는 독립된 개체로 타자를 사유한다면 각기 다른 생물들의 생존권이 충돌할 경우 ‘이것이냐, 저것이냐’하는 배타적 이접의 문제로 빠질 수밖에 없고, 그 속에서 생물이 가진 불변의 본성을 가정할 위험이 생기게 됩니다. 따라서 특정 생물의 입장에 서서 그들에 대해 사유할 때는 언제나 그 생물의 움벨트 속에 들어온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의 개체를 그것을 둘러싼 움벨트 속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개체를 개체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곤충이라는 개체적 타자 속에 숨겨진 식물, 다른 곤충, 포식자, 땅 등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부를 통해 개체를 사유하는 이런 방식이 단순히 모든 관계를 우호적인 관계로 보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많은 경우 한 개체의 움벨트는 그 개체의 생존을 위한 관계이기 때문에 포식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개체가 맺는 관계는 포식을 위한 관계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개체의 관계를 사유한다는 것이 포식의 적대성을 잊게 만든다면 결국 다시 ‘한 생명이 소중한 만큼 다른 생명도 소중하니 함부로 해쳐선 안 된다’는 배타적 이접의 문제로 빠지게 됩니다. 관계 속에서 하나의 개체를 사유한다는 것은 ‘포식이냐, 동맹이냐’하는 선택의 문제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관계인지를 따져야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포식을 위한 동맹 속에서도 그들이 서로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그 이용이 일방적 착취는 아닌지를 따져 물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진화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통상 진화란 인간중심적인 통념에 따라 인간을 진화의 끝에 두고 다른 생물들을 인간과 가까운 순서대로 배열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인간-영장류-포유류-어류…등등 그러나 지금도 많은 생물들이 물속에서 살고 있고, 인간은 물속에서 숨 쉴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 진정한 ‘진화’인지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또한 복잡화의 순서로 진화를 이해한다해도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식물은 인간보다 훨씬 많은 감각을 가지고 있고 인간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생존합니다.
이처럼 진화는 흔히 하는 통념처럼 인간을 끝에 두고 선형적으로 배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화란 어떤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여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고 따라서 현재 살아남은 것에 의해 언제나 소급적으로 정의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현재 살아남은 생물들은 모두 최선의 진화를 이뤄낸 셈입니다. 이를 주어진 환경조건의 고려 없이 비교한다면 인간중심적인 척도를 다른 생물들에 들이대는 것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맙니다.
자연과학에서는 수학-과학의 모델을 따라 진화를 근거율을 통해 설명하려 합니다. 근거율이란 어떤 것의 부정이 거짓이 되는 것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논리적 필연성을 찾습니다. 즉 이러저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살아남고,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살아남은 것의 어떤 특성을 살아남을 수 있는 필연적인 특성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진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주어진 환경조건이 변하면 쓸모없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형태적 완전성이 생존과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진화의 역사란 생존의 이유를 살아남은 것을 통해 파악하기에 충족이유율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충족이유율이란 존재하는 것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라 그것의 부정이 거짓이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살아남을 만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고, 살아남은 것이 진화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진화를 충족이유율을 통해 설명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동어반복입니다. 살아남은 것은 진화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 아니고 살아남을 만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살아남은 것의 이유를 살아남은 것을 통해 설명하기에 진화를 선험적인 어떤 것으로 정의할 수가 없습니다. 진화란 언제나 살아남은 것을 통해 사후적으로만 정의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수학-과학의 모델을 통해 진화를 설명하려는 자연과학자들에게 이러한 설명은 불편한 것이었고 끊임없이 논리적 필연성을 통해 진화를 설명하려 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엄격한 과학주의적 욕망이 어떤 것인지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떠한 것도 주어진 조건이 변하면 그 가치가 변하며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주는 『공생, 그 아름다운 공존』입니다.
발제는 최유미 선생님과 김은석 선생님입니다.
책을 읽다 궁금한 점이나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으신 내용은 댓글로 남겨주세요~
목요일에 봬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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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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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신정수)
<동물과 식물은 '수직전달'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다음 세대로 유전자를 전한다. 번식동안 정자와 난자사이에서 일어나는 것 이외의 유전물질의 교환은 없다 . 이와는 대조적으로 박테리아는 단일세대내에 유전자의 수평전달을 할 가능성이 많다. 이들은 박테리아에서 박테리아로 유전자를 전달한다. P157>
여기서는 수평적인 유전자 전달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적혀있는데요... 가능성이라고 생각했던 작가의 의견이 사실인지가 먼저 궁금합니다. 만약 수평적인 유전자 전달이 가능하다면 박테리아는 개체종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개체종은 동종끼리 번식을 통해 다음 종을 생산한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박테리아는 이런 종 분류체계를 넘어서는 의미가 담겨있는 서술로 보입니다. 물론 종분류가 미생균에게 까지 적용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전자의 수평적 전달이라는 의미가 이번 책에서 가장 쇼킹했던 부분이었습니다.
가축은 자기와 다른 종인 사람에 의존해 살면서 먹이와 안전을 제공받는다. 나는 가축의 그러한 생존 방식을 특이하다고 여겨왔는데, 미생물의 세계에는 그런 일이 흔하다. 뿌리혹박테리아는 콩과식물의 뿌리에 살고 비브리오 박테리아는 꼴뚜기의 피부구멍에 살며 먹이와 안전을 제공받는다. 나는 가축이 사람과 살며 이전에 가졌던 습성을 포기한 채 좁은 공간에 갇혀 번식을 못하거나 번식만 하며 사는 걸 가엾게 여겼다. 그런데 뿌리혹박테리아는 콩과식물의 뿌리에 살며 불필요해진 번식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비브리오 박테리아는 유영장치를 잃어버린다. 나는 가축이 야생에서 하던 습성을 그들의 본성이라 믿었다. 그러나 습성이란 그때그때 처한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생식 능력이나 움직이는 능력은 처음에 그것들이 생존에 유리해 선택됐던 것처럼 필요 없어지면 퇴화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위의 미생물과 가축 사이엔 차이점이 있다. 미생물은 움직이고 번식하는 데 쓰던 기관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가축은 쓰지 못할 뿐 다리와 생식기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당연히 이로 인한 욕구도 그대로다. 게다가 가축에겐 감정이 있다. 가축은 기본적인 욕구조차 해소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공생관계가 주는 이익과 해악의 경계가 유동적이라고 한다. 여기서 이익과 해악을 가르는 기준은 생존에 도움이 되는지 여부다. 그 기준으로 보면 인간과 가축의 공생은 매우 성공적이다. 오늘날 지구를 뒤덮고 있는 가축의 숫자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가축 하나하나의 삶은 참혹하다. 이 책에 다뤄진 성공적인 공생의 사례도 가까이서 보면 그런 것은 아닐지. 길들여진다는 건 힘든 일이다. 미생물이 번식이나 유영능력을 잃어버리기까지 그 과정이 오죽 힘들었을까 싶다. 거기에 비하면 공장식 축산도 견딜만하게 느껴질 정도.
인간과 가축의 관계와 미생물들의 관계가 유사해 둘을 비교하게 되는데, 둘을 비교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비교에 관한 문제가 나와서 한 가지 더 질문하겠습니다. 흔히 공장식 축산과 아우슈비츠를 비교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과 동물에게 가하는 폭력을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