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 1~4장을 읽었습니다. 이 책의 접근 방식은 여러모로 『식인의 형이상학』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책의 저자인 드 발을 비롯해 많은 동물행동학자들은 동물들을 그 동물의 움벨트 속에서 파악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인간학적 지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동물들의 모습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동시에 그러한 노력 속에서 인간중심의 휴머니즘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이를 더 밀고 가면 동물들을 통해 인간을 다시 정의하는 지점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이는 인류학자들이 원주민들을 향해 접근했던 방식과 그것을 통해 서구 인류학 혹은 지성을 다시 정의하려는 방식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강조되었던 것은 움벨트와 그러한 움벨트 속에서 개체를 바라보는 것, 그리고 동물의 지능과 의식 등이었습니다.
드 발은 어떤 생물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생물이 속한 움벨트 속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 생물의 움벨트란 그 생물의 생존에 관여하는 요소들, 그 생물이 생존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들의 집합입니다. 한 생물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오는 자극에 신체적으로 반응하고 그 반응을 생존의 지속을 위한 행동으로 돌려냅니다. 즉 환경에서 오는 자극과 그 자극에 대한 신체의 반응과 행위가 한 생물, 개체의 움벨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한 생물의 움벨트를 결정하는 것은 신체와 환경이 뒤섞이는 양상에 따릅니다. 따라서 같은 환경이라고 불리는 곳에서조차 생물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움벨트를 형성합니다. 가령 눈이 없는 진드기 종은 촉각과 후각, 온도 등 단 몇 가지만으로 자신의 움벨트를 형성합니다.
하나의 생물을 그 생물이 속한 움벨트 속에서 본다는 것은 이처럼 그 생물의 생존의 지속이라는 관점에 따라 생물을 이해함을 뜻합니다. 한 생물의 감각, 인지 혹은 지능마저 그 움벨트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눈이 없는 진드기를 바라볼 때 시각이나 청각과 같은 인간의 기준(척도)을 가지고 이해하려한다면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실패를 눈이 없는 진드기의 미개함으로 결론 내립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 생물이 자신의 움벨트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생존 능력을 고양시키는 가를 보는 것입니다. 한 생물의 지능 역시 척도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흔히 지능을 뇌라는 기관의 기능으로 등치시키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화된 기관중심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식물은 뇌 없이도 사고하며 지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식물이 보여주는 지능은 논리적 추론이나 수학적 사고와 같은 인간적인 지능이 아니라 전혀 다른 형태의 지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드 발은 동물행동학을 ethology라고 부릅니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동물들의 행동을 통해 동물의 에토스ethos를 이해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에토스란 집합적인 습속을 말합니다. 하나의 동물, 하나의 개체의 위치는 그 동물이 속한 개체군 속에서 정의됩니다. 다시 말해 한 개체의 행동은 그 개체가 속한 개체군 속에서 개체가 다른 개체와 맺는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에톨로지는 동물의 행동을 주관적인 의도로 환원하지 않습니다. 에톨로지가 보고자 하는 것은 주관적 의도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특정 행동이 어떤 결과와 효과를 내는지를 보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행동의 의미를 역으로 정의하는 것입니다. 이는 들뢰즈식으로 말한다면 배치 속에서 개체를 보는 것이고, 라투르식으로 말한다면 연결망 속에서 개체를 보는 것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배치와 움벨트의 차이라면 움벨트가 물리적 환경에 좀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배치는 그런 물리적인 것을 포함하는 더 넓은 개념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의 개체를 이해하는 것에 있어 개체군 속에서 그 개체의 위치를 정의하는 것과는 반대로 미시적인 것으로부터도 개체를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생물, 유기체라고 부르는 것들은 모두 미생물, 박테리아 군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책에서 생물들의 진화적 공통성은 상동기관을 통해서 찾아집니다. 박쥐와 인간 뼈의 상동성은 그 진화적 기원이 같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생물들의 공통성이 뼈에서 멈출 이유는 없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박테리아 군체에서 모든 생물들을 하나의 평면 위에 세울 수 있습니다.
모든 생물들은 박테리아 군체들의 집합이고, 그 집합의 양상에 따라 이러저러한 생물로 분화됩니다. 즉 박테리아 군체가 모든 생물들에 공통적인 가장 미분화된 추상의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것으로도 분화되지 않았기에 어떤 것으로도 분화(현행화) 가능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개체를 정의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것은 박테리아 이전에 더 근원적인 무언가를 찾으며 소급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종합되는 양상을 보는 것입니다. 미분적이고 가장 추상화된 상태에서 결국은 모두가 같다!라고 하는 것을 찾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종합되고 분화되어 나오는지를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테리아 군체라는 미분화된 상태에서 종합되어 하나의 개체로 분화될 때 의식과 무의식이 정의될 수 있습니다. 개별 세포들의 감각, 개체를 이루는 미시적인 성분들을 ‘나’라고 하는 자아 혹은 유기체 수준에서 종합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이뤄집니다. 개별 감각들을 ‘나의 감각’이라고 하거나 유기체의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를 만들어내는 것(면역계의 형성 등)은 신체의 무의식적 활동입니다. 의식은 이러한 무의식에 기반 해서 자신의 환경에 대응하는 행동을 만들어냅니다. 즉 외부적 환경에 대응하는 의식적 행동은 무의식에 의해 형성된 자아 위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미시적인 것에서부터 개체를 파악하는 것은 지난 시간에 봤던 연속체로서의 다양체를 떠올리게 합니다. 연속적 다양체로서 개체에 접근한다면 박테리아 군체라고 하는 물리적 실체로 소급하지 않고도 강도의 분포의 변화만으로 신체를 추상화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되기가 어떤 것인지 다시 한 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개체를 파악하는 데에 있어 미시적인 것에서부터 그 개체를 정의하는 것과 개체군이라고 하는 배치 속에서 정의하는 것은 모두 개체를 실체적 접근에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동물에 대한 사유는 대개 동물에 대해 개체적이고 실체적인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권리가 소중한 만큼 동물의 권리가 소중하니 동물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동물, 개체는 언제나 특정한 배치 속에 위치하고, 그 위치에서 발화합니다. 가령 어떤 동물의 위기는 모두 그 동물이 처한 배치 속에서 기인합니다. 그런데 동물의 위기를 이야기하면서 그 동물을 위기가 발생한 배치에서 빼내어 독자적인 개체로 다룬다면 구체적인 위기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저 ‘동물의 권리’라는 뻔한 말로 돌아가거나 인간과 동물의 가치를 비교하는 곤란함 속에 빠져들게 됩니다. ‘동물이냐, 사람이냐’하는 배타적 이접은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곳곳에서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동물에 대해 생각할 때에도 이처럼 개체적이고 실체적인 접근은 결국에는 배타적 이접을 피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반면 배치 혹은 움벨트 속에서 개체를 본다 함은 위기 역시 그 위기를 초래한 관계, 그 동물을 둘러싼 것들 속에서 위기를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위기를 타개하는 방식 역시 그 동물이 속한 배치를 바꾸어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한 새로운 관계, 배치 속에 대부분 인간이 빠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다시금 인간중심주의로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개입될 때에도 그것이 인간중심적인 것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위기를 초래한 배치는 ‘어떤’ 배치인가를 묻는 것이고, 그를 통해 ‘어떤’ 배치로 넘어갈 것인가를 찾는 것입니다.
가령 ‘동물의 생존권이 우선이냐, 사람의 생존권이 우선이냐’하는 배타적 이접의 문제는 동물의 생존과 인간의 생존이 충돌할 때 자주 나타나는 이분법입니다. 이때 하나를 선택하면 그것이 다른 것보다 그 자체로 더 가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동시에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난감함이 발생합니다. 이런 배타적 이접의 문제로 빠져들지 않는 방법은 사람과 동물을 그들을 둘러싼 관계, 배치 속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존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특정한 배치 속에서 이뤄지고, 동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둘의 배치가 함께 양립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생존과 동물의 생존이 함께 관계된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동물들을 돌봄으로써 사람들의 생존이 지속되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동물들의 생존이 인간들의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사람과 동물이 접속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접속은 인간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만 인간중심주의로 빠지지 않게 됩니다.
다음 주는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 5~9장입니다.
발제는 김효영 선생님과 조새봄 선생님입니다.
책을 읽다 궁금한 점이나 이야기하고 싶으신 내용은 댓글이나 새글로 남겨주시면 됩니다.
목요일에 봬요~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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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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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신정수)
유인원은 목표와 방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종류의 모방인 선택적 모방을 보여주었다 P245
질문) 선택적 모방이라는 의미를 알겠는데... 사실, 모방이라는 의미 자체가 사회성을 전제로 나타나는 말이고 사회성을 띤다는 의미는 기본적으로 선택해야 또는 인식하고 하는 행동이라 여겨지는데요.... 모방에 선택적 모방말고 수동적 모방이나 습관적 모방 이런 것들도 존재하나요...? 습관적 모방이 의미상 가능하다고 생각되긴 하는데... 이 조차도 사회성이나 인식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모방이라는 의미는 사회성과 인식을 전제로 한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
유미
(1) 어린이와 동물의 비교인지실험은 그 설정자체가 대단히 종차별적으로 보입니다. 성체인 동물을 어린이취급하는 것이지요.
(2)코끼리의 정치학(317)에서 저자는 코끼리가 모계중심 동물이라고 해놓고, 정치의 영역은 수컷에게만 할당합니다. 코끼리의 모계중심 자체가 그들 정치행위의 결과라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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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23 위 5 “~ 가장 경제적인 가정은 거기에 ‘공유된 정신과정’이 반영되었다는 것이다.”에서 공유된 정신과정이란 ‘공통된 정신과정’을 모든 동물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정신과정’이란 현상이 모든 동물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인지 애매하다. 전자라면 어떤 일반화된 정신과정에 대한 이론을 상정해야 할 것 같고 후자라면 정신과정은 오히려 생존력, 적응 등과 관계된 의식의 진화론적 생성 개념과 유사한 것 같다. 즉 정신과정은 진화의 단계에서 포식작용 만큼이나 일반적 과정 아닐까?
또 경제적인 가정이란 조건은 공리주의의 효율성이라기 보다는 욕망의 경제성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들뢰즈의 냄새가 난다.
p 429 아래 3, “우리에게는 인지의 구성단위들에 초점을 맞춘 ‘상향식 관점’이 절실히 필요하다.” 상향식 관점이란 어떤 meta적 관점, 즉 인지의 구성단위들을 구성하는 meta적 원리를 말하는 것인지? 그럼 그것은 동물과 관련된 철학의 가능성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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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희
9장에서 "인지의 구성단위들에 초점을 맞춘 상향식 관점"(429)이라 표현한 것처럼, 책의 나머지 부분을 읽으면서 '최소 정의'란 단어를 자주 떠올렸습니다.
동물행복학이 기억, 마음, 의식, 자아, 주체성의 '최소 정의'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부 너무 거대한 단어들이라 철학 공부를 하면서 많이 애먹었던 낱말이었습니다.ㅎㅎㅎ
최소정의로 의식, 기억과 자아같은 말을 떠올리면 자연히 신체와 감각, 물리적 조건들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왜 신유물론이 자연학과 물리학, 동물행동학과 이어지는 지점이 많은지 알 것 같더라고요.
과대포장된 저 큰 단어들과 '철학'을 가장 작은 요소들로부터 재정의하려는 것 아닐까. 그래서 그 '철학'답지 않은 모습에ㅎㅎㅎㅎ 제가 끌렸구나 싶었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을 좋아하는데요. 내가 사는 조건과 신체에서 동떨어진 언어가 아니라 물리적인 힘들에서 출발한다는 게 철학과 동물학, 식물학처럼 나눠진 분과를 넘어서 거기에 언론에 정치까지 모조리 엮을 수 있는 횡단선을 만드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6살 이전의 기억이 없다. 태어나자마자 하게 된 최초의 경험들이라 매 순간 강렬한 인상을 받았을 텐데, 그중 어느 것도 기억이 되지 못한 것이다. 왜 그럴까? 나의 기억은 주로 언어로, 서사 형식에 따라 저장된다. 소설처럼 시간의 흐름과 인과로 장면들을 연결해 기억을 구성하는 것이다. 서사는 매우 효과적인 기억의 형식이다. 내가 오늘 아침에 뭘 먹었는지는 기억 못 하면서 수 십년 전에 읽은 소설을 기억할 수 있는 건 그래서다. 지나가는 매 순간이 구슬이라면 서사는 그 순간을 꿰는 실이다. 그런데 6세 이전은 언어와 서사 형식이 학습되기 전이다. 구슬만 있지 구슬을 꿸 실이 없는 것이다. 실이 없다고 구슬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것들도 몸 어딘가에 저장되겠지만, 머리로 떠올릴 수 있는 기억으로 저장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서사가 기억의 유일한 형식은 아니다. 간혹 유아기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기억은 앞뒤 맥락을 알 수 없는 이미지로 되어 있는데, 그들은 나중에 부모에게 물어보고서야 그 이미지의 의미를 이해한다. 줄기차게 이어지는 나레이션을 제외하면 나의 기억에서도 이미지가 가장 주요한 요소다. 우리 기억이 이미지로 되어있는 건 우리가 주로 시각을 통해 세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만약 후각을 통해 세계를 경험한다면 기억은 냄새로 돼 있을 것이다. 개의 기억이 그럴 것이다. 그런데 서사가 없는 개의 기억은 유아기의 기억처럼 파편적일까? 아니면 곤충이 새와 다른 경로로 날개를 가지게 된 것처럼 또 다른 기억의 형식을 가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