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식인의 형이상학』 5~9장에 대해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지난주에는 까스뜨루의 개념 사용에 대한 지적이 많이 나왔습니다. 주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접과 다양체, 강도였습니다. 들뢰즈/가타리가 사용했던 이 개념들을 까스뜨루가 잘못 사용하고 있어 강사님이 정리를 해주셨습니다.
먼저 가장 많은 질문이 나왔던 이접적 종합(분리접속적 종합)입니다. 까스뜨루는 접속, 통접, 이접이라는 세 가지 종합 중에서 이접적 종합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다룹니다. 분리접속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disjonction은 선택적 종합, 혹은 이접적 종합으로 번역됩니다. 이접적 종합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뉩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말로 표현되며 둘 중 하나를 배타적으로 선택하는 배타적 이접과 ‘이것이든 저것이든’이라는 말로 표현되며 상이한 경우를 허용하는 포함적 이접이 그것입니다. 주라비쉬빌리의 들뢰즈 해석에 영향을 받은 까스뜨루는 배타적 이접에서 포함적 이접으로 나아가길 주장하며 포함적 이접을 차이 철학의 핵심으로 보고 있습니다.
까스뜨루가 보기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드는 배타적 이접은 이분법의 논리에서 전형적으로 쓰입니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여자냐 남자냐’ 혹은 ‘동물이냐 인간이냐’ 등의 이항적 분할은 관련된 항들을 하나의 방향으로 몰고 갑니다. 더불어 배타적 이접은 이항적 선택 안에서 또다시 이항적 분할을 만들어내고 하나의 선택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포함적 이접은 이접 안에서도 이항적 분할이 아닌 등가적 접속이 가능함을 보여줍니다. 이때 들뢰즈/가타리가 배타적 이접을 비판하며 포함적 이접을 긍정한 이유는 이접이라고 불리는 것 안에서도 이분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사용방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포함적 이접이란 배타적 이접과는 다른 방식의 이접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지 결코 포함적 이접을 일반화하여 접속의 일반적 원리로 쓰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다른 종합의 원리인 통접에서도 나타납니다. 통접은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어떤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것을 가리킵니다. 가령 우리 몸의 각각의 기관들은 결합하여 유기체 혹은 주체라는 통일체를 만들어냅니다. 유기체와 주체는 이러한 통접의 결과입니다. 통접 역시 배타적 이접과 마찬가지로 여러 항들을 하나의 것으로 귀속시킨다는 의미에서 통상 부정적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이런 통접과는 다른 흐름으로의 통접 역시 있습니다. 언제나 이런 저런 구체적인 욕망으로 나타나는 욕망이 추상된다면, 다시 말해 탈영토화된다면 어떤 구체성도 띠지 않는 흐름으로의 통접이 가능해집니다. 흐름으로의 통접은 어떤 구체성도 띠지 않기에 역으로 어떤 것으로도 현행화가 가능하며, 동시에 여러 상이한 욕망들을 넘나들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추상화는 들뢰즈/가타리가 『천의 고원』에서 여러 고원들을 넘나들면서 실제로 수행했던 작업입니다. 통접도 이접과 마찬가지로 긍정적으로 쓰이는 경우와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모두 있습니다.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이접적 종합은 결코 특권적인 종합이 아닙니다.
종합의 일반적 원리는 차라리 접속(connexion)에 있습니다. 접속의 가장 큰 특징은 두 항이 만나 전혀 다른 제3의 것을 만들어내는 데 있습니다. 여기에는 통상적인 이접과 통접에서처럼 귀결되는 어떤 하나의 특권적 항이란 없습니다. 어떤 귀결점이나 목표도 없이 만나는 그 어떤 것과도 결합할 수 있습니다. 접속에서는 접속되는 항에 따라 전체가 바뀌기도 하고, 기존의 목표 자체가 바뀌기도 합니다. 따라서 만나는 것에 따라 다른 것으로 변하는 접속의 핵심은 플러스에 있습니다. 접속의 원리를 말하면서 n-1을 말한 것은 접속되는 것들을 하나로 귀속시키는 일자(the one)를 빼는 것입니다. 일자는 다양하게 접속되는 양상에도 그 모든 것들을 하나로 귀속시킨다는 점에서 접속의 원리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가 n-1을 말한 것은 이러한 일자를 빼야한다는 것이지 결코 접속의 원리가 마이너스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까스뜨루가 n-1을 말하면서 리좀, 다양체의 원리를 마이너스에 있다고 했을 때 그는 이것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들뢰즈/가타리가 포함적 이접과 흐름으로의 통접을 말한 것은 이항성을 사용하면서도 이분법을 비판하고 그것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그 자체로 계속해서 좋은 것은 없습니다. 배타적 이접이 이를 잘 보여주는데,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좋은 것, 괜찮은 것을 선택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는 순간 그 안에는 또 다른 이항적 선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좋다고 여겨지는 것도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좋은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좋다고 여겨지는 것도 그것이 접속되는 양상에 따라서는 그 전체가 바뀔 수 있고, 전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이용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작동하는 조건과 양상을 보는 것입니다.
가령 들뢰즈/가타리는 분자적인 것과 몰적인 것을 이항적으로 구별합니다. 분자적인 것은 흐름과 관련되어 있고, 몰적인 것은 규범이나 관습처럼 굳어진 것을 가리킵니다. 이들에게 분자적인 것은 기본적으로 긍정되는 것이지만 분자적인 것이라고 다 좋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경직된 몰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고 안정되지 않은 분자적인 것은 그만큼 쉽게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고 파멸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욕망의 미시적 전염에 의해 만들어진 파시즘은 분자적인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설령 그 항이 3개가 되고 더 늘어나 n개가 된다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좋은 항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항이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또 어떻게 바뀌고, 어떤 효과를 내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봐야지만 이항성을 사용하면서도 때가 되면 버리고 또 다시 사용하면서도 이분법을 피해갈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강도입니다. 강도는 힘과 차이를 함께 다룰 수 있는 개념입니다. 가령 열이 이동하려면 필요한 것은 온도차입니다. 열이 이동하는 것은 절대적 온도가 아닙니다. 100도든 200도든 온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온도 간의 차이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20도와 10도 사이의 온도차가 있을 때 그 차이만큼 운동이 발생합니다. 따라서 힘은 곧 차이고 강도입니다. 이때 강도는 양적 차이이고 곧 강도는 순수양입니다.
그런데 강도는 선명하게 지각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강도는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양적인 것이나 질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질화되고 양화된 것은 이러한 강도적 차이가 모두 소멸되거나 무시될 때 포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정서는 연속적입니다. 이때의 연속성은 감응affect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우리의 정서적 상태는 끊임없이 변하면서 다른 상태로 이행합니다. 이런 이행의 상태를 ‘운다’라는 감정으로 포착할 때 우리의 감응은 ‘운다’라는 감정으로 질화되고 다른 감정들과 구별되는 불연속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운다’라고 말할 때에도 통곡하면서 우는 것과 눈물 한 방울 흘리는 것이 다르듯 이때에도 ‘운다’의 강도는 사라지지 않고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지난주 신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살펴본 것처럼 동물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동물로의 변이 역시 외연적인 제한 없이 이루어집니다. 어떤 제약도 없이 자연스럽게 변이하는 것이죠. 신화에서 동물과 인간은 강도적 연속성 속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저 사람은 인간이야, 혹은 동물이야’라는 것으로 고정되지 않습니다. 신화는 다른 연속성의 세계입니다.
강도적 연속성은 다양체로 이어집니다. 강도적 연속성의 상태는 연속적 다양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속적 다양체란 강도적 연속성 속에서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변화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연속적 다양체는 강도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단일한 척도에 의해서 나눌 수가 없습니다. 즉 동일하게 분할할 수 없습니다. 100m 달리기를 한다고 할 때 100m길이는 1m라는 척도로 동일하게 나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달리는 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 1m와 마지막 1m는 강도적으로 다른 달리기입니다. 달릴 때마다 달리는 강도는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에 1m라는 외연적인 길이로 각각의 1m를 평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다양체로서의 신화는 인간이라는 단일 척도로 구별하거나 나눌 수 없습니다. 동물과 인간의 거리 역시 외연적인 제한으로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이할 수 있습니다.
8장에서 까스뜨루는 레비스트로스의 토테미즘과 희생의 제의를 구별을 강도적 다양체의 관점에서 비판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샤먼의 희생제의를 상상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과 구별되는 토테미즘을 추구합니다. 토테미즘은 기본적으로 분류학입니다. 가령 곰과 곰족은 연속선상에 있지만 곰과 호랑이는 불연속적이고 그만큼 곰족과 호랑이족은 불연속적입니다. 이처럼 곰족과 호랑이족이 구별되고 불연속적인 것이 될 때 토테미즘이 출현합니다. 이는 동시에 불연속성을 통해 곰족과 호랑이족을 서로 섞일 수 없는 것으로 분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상상적인 것, 허구적인 것으로 본 샤먼의 희생제의 역시 구별이 필요합니다. 까스뜨루는 수평적 샤먼과 수직적 샤먼을 구별합니다. 수평적 샤먼의 핵심은 영혼 여행에 있습니다. 수평적 샤먼은 자신의 신체에서 벗어나 다른 신체로 옮겨 다닐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다른 이의 영혼을 찾거나 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샤먼이 자신의 신체의 강도적 분포를 변환시켜 다른 신체의 강도적 분포로 이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샤먼은 강도적 변화의 연속성 속에서 다른 신체로의 연속적인 되기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샤먼은 동물이 되기도 하고 식물이 되기도 합니다. 강도적 분포의 변환을 통한 다른 신체로 이행할 수 있기에 이러한 샤먼은 수평적인 샤먼입니다.
반면 수직적인 샤먼은 레비스트로스가 희생제의와 연결시켰던 사제에 가깝습니다. 희생제의를 집전하는 샤먼은 제물을 바치면서 신과 부족들을 수직적으로 매개합니다. 이들은 수평적 샤먼처럼 영혼 여행이 불가능하며 인간과 동물은 엄격하게 구별되는 불연속적인 것이 됩니다. 수직적 샤먼은 ‘선조’라는 이름으로 인간성의 유적인 형태가 출현하고, 동물과 인간의 변형인 신화를 대체하면서부터 출현하게 됩니다. 이제 인간은 자신들만의 선조를 가지게 되고 동물은 인간과 분리됩니다. 동물과 인간의 연속성이라는 내재적 관계가 인간의 초월적 분리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번 주 발제는 한희정 선생님과 김신애 선생님입니다.
책을 읽다 궁금하신 점이나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으신 내용은 댓글로 남겨주세요.
목요일에 봬요~
댓글 11
-
yumichoi
-
lavabo
-이진경 선생님 강의안에 '타자를 통해 우리 사유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일자가 가린 외부가, 다른 세계가 드러나야 한다'고 하셨는데, 우리 사유가 확장되는 것과 동일자가 가린 다른 세계가 드러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알고 싶습니다.
-초험적 경험이 어떤 경험을 말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
창근
214p에 설명되고 있는 증여의 교환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
'훔치기'도 잘 와닿지 않습니다... 교환이란 훔치기와 증여의 한 가지 특수한 경우처럼 이해해야 한다.(p.230 4줄)
-
1: “애매함은 오류, 오해, 거짓이 아니라 관계의 기초 그 자체인데, 이 관계는 언제나 외부성과의 관계이고, 자신의 기초 자체를 함축한다.”(97쪽, 8줄)
“두 항 사이에 어떤 무분별, 식별불가능성, 모호성의 지대가 수립된다. 즉 닮음이 아니라 미끄러짐, 극도의 가까움, 절대적 인접성이다.” (210쪽, 1줄)
(*.*) 애매함과 모호함은 어떻게 구분되는 걸까요? 애매함(강도적)이라는 벡터를 모호함(-되기)이라는 미분접선이 지나간다? 정도로 이해해도 될까요?2: 타인을 지나치게 설명하지 말고 그의 함축적(주름진) 가치를 유지하라는 것, 표현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 이 모든 표현된 것이 우리 세계를 채우고 살아가도록 하면서, 그 세계를 증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260쪽,9줄)
(*.*) 초험적 샤먼에 머무르기 / 감응적 신체 되기, 와 흡사한 것일까요? 지젝이 말하는 ‘시차적 관점’과도 미세하게 이어져있는 것 같다라는 생각도 함께?
3: “경험에 의해 통제되는 어떤 픽션”(246쪽, 1줄) “원주민의 관념을 개념처럼 고려하기로 결정하고, 이런 결정으로부터 결과물을 뽑아내는 데서 그 픽션이 성립한다.”(246쪽, 3~4줄) “원주민의(...) 관념을 어떤 이론적 픽션으로 만드는 일이나 마찬가지다.”(246쪽, 14줄)
(*.*) 상상적인 것일까요? 애니미즘/물활론이 떠오르기도 하는데요. 이때의 픽션이라는게 “우리는 원주민처럼 사유할 수 없기 때문”(261쪽, 8줄)에 요청되는 것일까요? -
되기와 생산이 동일성의 이면(206)이라는 말이 이해가 안갑니다. 그리고 생산이라는 단어가 저한테는 모호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
이재훈
"재규어-되기에서 "재규어"는 행위의 내재적 양상이지, 초월적 대상이 아니"라거나 되기는 "모방하기, 나타나기, 존재하기, 대응하기가 아니"(p.204)라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
앗! '생산과 되기' 운동 질문하려고했는데 유미샘께서 하셨네요 ㅎㅎ
그럼 다른 질문을..온통 모르겠으나 ㅠㅠ
P236 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마을 '카두베오인' 의 마을에 이상적으로 존재하는 족외혈통은 식인풍습보다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족내 혈통의 자손들은 낙태 또는 영아살해를 통해 제거하고 적대자 집단의 아이들을 입양(탈취)하는 방식으로 집단을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생식에 대해 격렬한 혐오를 하기까지는 인간이든 동물이든 유기체라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성 같은 것을 거스르는 강도가 필수적인 것 같이 여겨집니다.
자연을 거스르는 이러한 강한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
남은혜
저도 이번 본문에서 반복되는 '애매함' 에 대해 헷갈렸습니다..
-
잠재적 인척관계는 ... (동종적 혈통의) 생산 양식이 아니라 (이종적 선발의) 포식 양식이고, 공생적 포획과 존재론적 "재포식"에 의한 "재생산"이다. 즉, '자신의 외부화를 위한 조건으로서의 타자를 식인 풍습에 따라 내부화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은 적대자에 의해 "자기규정되는" 자기 자신을 본다. 다시 말해, 적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본다. 이런 것이 아마존의 우주적 실천에 내속되어 있는 타자-되기다. (p.231 9줄)
>> 앞에서 되기는 관계의 제3유형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제3개념을 구성한다(p.219 밑3줄)고 했는데, 여기서 타자-되기가 자기 자신을 보기 위함이라고 읽히고, 같은 맥락에서 (외부화를 위한 조건이라는 단서가 붙지만) 결국 자기안으로 포섭(내부화)하는 것이라면, 이것이 되기 개념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더불어 되기 개념과 자연학에서 말하는 공진화 개념의 차이도 궁금합니다.
-
junga
저자가 말하는 관점주의는 단지 여러 개의 관점이 있다는 것을 넘어서, 존재론으로서의 관점주의이고, 신체화와 연관된 관점주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상대주의와 구분될 텐데요. 여전히 저는 <초월론적 규정으로서의 적대자>라는 표현이 잘 이해가 안 가고, 적대자주의와 관점주의 사이의 관계를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5p에서 저자는 생산과 되기의 구별되는 두가지 운동을 이야기 하는데요. 생산의 개념을 인간과 자연의 연속성으로 부터 끌어 냅니다. 인간은 곧 자연의 일부이기에 들-가의 생산이 인간의 생산과 자연의 생산의 동일성을 이야기한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반자연적인 참여로서의 되기와 구분하는 것 같은데요. 앞 장에서 들-가가 혈족의 우선성, 즉 자연과 인공의 분리에서 자연의 우선성을 가정했다는 비판과 일백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선생님께서 말슴하신 것처럼 혈통과 동맹 중 무엇이 우선하느냐가 문제가 아닌 라 어떤 혈통인가 어떤 동맹인가를 문제시 해야 하는 것으로 읽으면 될까요? <안티->에서 들-가가 자연성이라는 것에서 아직 다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이 타당한지도 살짝 궁금하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