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지난 시간을 끝으로 드디어 『식인의 형이상학』 책을 모두 마쳤습니다. 어려운 책이지만 함께 읽어서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레비스트로스 이론과 그것을 비판했던 들뢰즈/가타리, 이것을 되기를 통해 다시 비판한 까스뜨루 그리고 레비스트로스 이론의 이중의 변형 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먼저 레비스트로스는 친족 체계를 호칭의 체계로 보았습니다. 친족 체계란 호칭이 일의적으로 정의되는 체계입니다. 호칭이 일의적으로 정의가 되려면, 즉 엄마가 오직 엄마이기 위해서는 근친상간이 금지가 되어야 합니다. 근친상간이 금지가 되지 않으면 엄마가 아내가 되는(오이디푸스) 일이 벌어지고 그로 인해 자신의 딸은 딸인 동시에 누이가 됩니다.(안티고네) 이처럼 일의적 호칭 체계에 의한 친족 체계는 근친상간 금지라는 규칙 위에서 성립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적 분석을 통해 동물적 자연에서 인간의 문화로 넘어가는 지점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즉 보편적이라 부를 수 있는 자연에서 문화로 넘어가는 그 지점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이때 레비스트로스가 발견한 인간만이 가지는 고유한 것이 근친상간 금지였습니다. 근친상간 금지는 인간 문화가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든 발견할 수 있는 인간만의 보편성이었고, 그렇기에 자연에서 문화로 넘어가는 지점이었습니다. 인간 문화의 형태가 저마다 다르다고 해도 어떤 곳에서든 문화가 있는 곳에는 근친상간 금지라는 심층 구조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적 분석을 통해 근친상간 금지라는 인간 문화의 보편성을 찾아내게 됩니다.
더불어 레비스트로스는 결혼을 여자의 교환을 통해 두 집단이 맺는 관계로 보았습니다. 여자의 교환, 재화의 교환 등등 교환의 일반성은 레비스트로스에게는 문화를 설명해주는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이었습니다. 한편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레비스트로스의 근친상간 금지와 교환의 일반성을 비판합니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정신분석의 핵심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가족 삼각형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근친상간 금지라는 규칙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인류학적 버전이었고, 따라서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의 주요한 비판 대상입니다. 이와 더불어 교환의 일반성을 생산의 일반성으로 비판합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말하는 생산은 일차적으로 활동의 산출을 말합니다. 생산은 어떤 활동의 생산이고 이것은 특정한 욕망에 따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하는 생산이란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욕망에 따라 이러저러한 활동들을 산출하는 생산을 말합니다. 욕망하는 생산은 결여나 결핍과는 다른 차원에서 욕망을 정의해줍니다. 즉 활동의 생산은 언제나 어떠한 욕망에 따른 생산이고 이는 욕망 자체가 곧 결여 없는 생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때의 욕망은 ‘나’ 혹은 어떤 유기체의 욕망이기 이전에 ‘내’안에 있는 상이한 미시적인 분열자들의 욕망을 가리킵니다.(분열분석) 어떤 행동을 할 때 망설이는 이유는 내 안의 수많은 미시적 욕망들이 서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은 ‘나’라는 통일체의 욕망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또한 같은 의미에서 욕망은 인간에게 한정된 것만도 아니게 됩니다. 미시적 욕망은 특정한 하나의 욕망으로 포착되기 전에 항상 변화하는 이행기에 있고, 특정한 하나의 욕망은 다른 욕망과의 결합 속에서 드러납니다. 망설임 속에 어떤 하나의 행동을 산출하는 것은 하나의 욕망이 다른 욕망을 지배할 때 나오는 것입니다. 힘의 차원에서 강도가 힘과 힘의 결합(차이)이라면 욕망의 차원에서의 강도 역시 욕망과 욕망의 결합에서 나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강조된 강도적 연속성은 이처럼 힘과는 구별되는 욕망의 차원에서 역시 서술될 수 있습니다.
활동의 산출이라는 들뢰즈/가타리적 의미의 생산에서 등가적 교환은 일차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등가적 교환은 교환되는 항들의 대칭성을 전제하는데, 이러한 인위적 대칭성과 달리 증여와 훔치기는 비대칭적인 활동입니다. 증여란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주는 것이고 훔치기는 줄 생각이 없는 것을 받는 것입니다. 증여와 훔치기에서 주는 자와 받는 자는 대칭적인 관계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즉 등가적 교환으로 설명할 수 없는 관계이고 이런 관계가 등가적 교환의 대칭성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반면 까스뜨루는 다시 한 번 들뢰즈/가타리의 생산을 비판하면서 교환을 새로운 의미에서 부각시킵니다. 까스뜨루가 보기에 들뢰즈/가타리의 생산이란 맑스적인 의미에서의 생산물의 생산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생산물의 생산은 결국은 어떤 대상과 같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이는 친족관계로 치면 아이를 낳는 혈통적 관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까스뚜르는 생산과는 다른 되기와 그 되기 속에서 다른 의미를 가지는 교환을 이야기합니다. 까스뜨루가 말하는 교환이란 되기 속에서 일어나는 반응의 교환, 행동의 교환입니다.
까스뜨루가 보기에 생산은 어쨌거나 혈통적 생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혈통적 생산이 본성적인 것이라 한다면 인간과 동물의 동맹은 그러한 생식적 본성과 다른 것입니다. 되기란 언제나 본성nature에 반하는 분유, 즉 참여입니다. 어떤 것으로의 되기는 언제나 그 어떤 것의 다른 것 되기를 동반합니다. 가령 샤먼의 재규어-되기는 재규어가 가진 신체의 강도적 분포에 따라 샤먼 자신의 신체의 강도적 분포를 변환시키는 것입니다. 이때 재규어는 샤먼의 재규어-되기에 ‘반응’하여 재규어의 다른 것-되기로 ‘행동’합니다. 까스뜨루는 이런 의미에서 혈통적 생산과 다른 동맹적 교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샤먼의 재규어-되기에서 실제 재규어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샤먼의 재규어-되기라고 부를 때에도 그것은 단순히 재규어의 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샤먼을 ‘행동’하게 하는 재규어는 없습니다. 거꾸로 샤먼이 재규어-되기를 했을 때 그런 재규어-되기에 ‘반응’하는 재규어나 다른 이들 역시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샤먼의 재규어-되기는 샤먼 자신의 신체적 변환을 위한 것이지 누군가의 반응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봤을 때 생산에 반하는 되기와 그러한 되기를 교환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게 됩니다.
까스뜨루가 생산에 반하는 되기를 강조하는 것은 혈통에 대한 동맹의 일차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중요한 것은 동맹이 일차적이냐, 혈통이 일차적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외연적 관계인가, 강도적 관계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단순히 외연적인 관계 속에서 엄마와 나, 누이와 나의 호칭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관계 속에서 내가 실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변화하는 것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혈통마저 강도적 동맹 관계 속에서 다룰 때 혈통 안에서도 전혀 다른 종류의 가족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됩니다.
다음으로 레비스트로스는 자연에서 문화로의 이행을 이번에는 신화 속에서 찾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 속에서 자연과 인간의 불연속성이 출현하는 지점을 찾아 그것을 통해 자연과 다른 문화의 구조를 찾으려고 합니다. 이런 의도 아래 레비스트로스는 대수적 군 이론을 신화 분석에 도입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 요소들을 신화소로 환원하고 신화소들의 관계와 각각의 항들의 치환을 통해 모든 신화를 분석하려고 합니다. 가령 어떤 신화에 등장하는 어머니가 하는 역할을 어떤 신화에선 아버지로 바뀌는 것을 찾아 관계의 동형성을 발견합니다. 이처럼 변환되는 내용 속에서도 그 관계가 같다면 신화들 사이에선 구조적 동형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화소의 치환을 통해 구조적 동형성을 찾던 레비스트로스는 계속되는 신화 분석 속에서 구조적 동형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신화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신화들에서는 불연속성이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이행과 계속되는 연속성이 드러납니다. 자연과 문화를 나누는 불연속성을 찾는 것이 신화 안에서의 연속과 이행의 과정 속에서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의도를 자신의 연구를 통해 반박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구조적 동형성을 찾는 대수적 군 이론에서 연속성을 다룰 수 있는 미분과 미분적 다양체로서의 구조라는 개념으로 넘어가는 지점이 됩니다. 다시 말해 동형적 구조를 와해시키는 리좀적 구조가 레비스트로스의 연구 속에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 이론에 나타나는 구조에 대한 이러한 변형은 그의 연구에 통시적, 공시적으로 모두 나타나기에 이중의 변형이라고 이야기됩니다.
신화의 요소들을 신화소로 치환하고 그것들의 동형적 관계를 연구하는 대수적 군 이론은 이미 확정된 신화소라는, 즉 이미 분화된 현행적인 항들에 대한 구조를 다룹니다. 반면 미분적 다양체로서의 구조는 특정한 항으로 분화되고 고정되기 이전의 잠재적이고 연속적인 것으로서의 구조를 다룹니다. 결국 레비스트로스의 연구를 통해서 드러난 신화란 구조적 동형성을 가진 불연속적인 구조가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는 연속적 다양체로서의 신화였습니다. 그리고 이는 신화를 잠재적이고 연속적인 다양체로서 다루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인류학에서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동형적 구조로 환원되지 않는 연속체로서의 신화는 레비스트로스와 들뢰즈/가타리의 접속을 표시하는 지점이 됩니다. 즉 레비스트로스가 자신의 연구에서 보여준 이러한 변형이 들뢰즈/가타리의 리좀적 다양체를 불러들이게 된 것입니다. 까스뚜르는 이를 들뢰즈와 함께하는 레비스트로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는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입니다. 이제 인류학을 넘어 동물에 대한 사유로 갑니다.
발제는 교오 선생님, 김도희 선생님입니다.
책을 읽다 궁금하신 점이나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으신 내용은 댓글이나 새글로 질문 꼭 남겨주세요~
목요일에 봬요~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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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신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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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신정수)
질문>
모든 포유류의 뇌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다른 영역에서도 발견되었다. 물론, 이런 유사성 뒤에는 훨씬 더 깊은 메시지가 숨어있다. 스키너와 지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정신과정을 블랙박스로 취급하는 대신에 이제 우리는 그 상자를 비집고 열어 신경학적 상동을 풍부하게 발견하고 있다. 이것들은 정신과정에 공통의 진화적 배경이 있음을 보여주며, 인간-동물 이원론을 부정하는 강력한 논거를 제공한다. -P190-
질문 #1. 포유류에 대해서만 뇌의 작동방식이 동일하게 작동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는지요...? 가령, 이전 인지 이론을 말하며 나왔던 문어나 조류에게서는 이런 현상이 발견되지는 않았는지...?
질문 #2. 정신과정에 공통의 진화적 배경이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공통의 진화적 배경이 무엇인지...? -
김지현
인간 이외의 생명체에게 지능이 있다거나 지능이 높다는 소식은 늘 우리의 관심을 끈다. 우리는 지능 있는 생명체가 더 가치 있다고 여기고, 그 생명체에게 더 친밀감을 느낀다. 왜 그럴까?
1) 인간은 자신이 가진 여러 능력 중에서 지능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는데, 그 가치 기준을 다른 존재에게도 적용한다.
2)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 소통을 향한 의지가 비상하다. 그 의지는 같은 종을 넘어서서 다른 생명체와 무기물에까지 미치는데, 상대가 사람과 비슷한 지능을 가지고 있을수록 소통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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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희
동물들 사진이랑 영상을 찾아보면서 즐겁게 읽었습니다..! honey badger 영상 진짜 웃겨요 우울하신 분 보세요..ㅎㅎ 재밌었지만 '와 신기한 세계'하고 감탄으로만 생각이 끝나버리더라고요; 질문이 질문이 아니라 미리 변명합니다.
다른 동물의 인지능력을 보면서 인간의 인지 능력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게 됐어요. 생각을 하면서도 '동물의 인지능력'에 대해 말하는 게 인간 종의 우월성, 배타성을 반성하게 하는 것 외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인지나 학습에 대해 통찰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 동물연구를 소개하면 인간에 대한 통찰, 인간의 책임, 변화를 강조하는 식으로 이런 논의가 끝나지 않나싶어서요. 제 생각도 거기서 멈췄고요.
다른 한편으론 '동물도 인간과 다를 바 없다' '정도의 차이다' 는 말이 동물해방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냉소적인 태도를 끌어내기도 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오소리랑 사람이 같냐!'는 식으로요. 이건 다른 동물의 행동을 표현하는 데에도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드는 난점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오소리가 '사랑'을 한다고 해도 오소리의 사랑을 '오소리도 사랑한다'고 표현할 수 없지 않을까요.
중구난방이지만 결론은 동물 연구도 인간이 하고 언어로 표현하고, 그 언어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마당에 인간에서 멀리 떨어진 사유와 표현이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의문이었습니다. 들뢰즈와 신유물론자들이 그래서 과학과 수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이해받는 건 어느정도 포기해야 하는 걸까요.. ㅎㅎㅎㅎ(질문이 아니라 죄송해요..ㅎㅎㅎ) -
헤이즈
마크 트웨인이 말한 "인간은 유일하게 얼굴을 붉히는 동물 또는 그럴 필요가 있는 동물이다" 저자는 이 주장에 대해 인간예외주의의 주장으로서 의심해야 한다고 하지만(p. 29)...후안무치의 얼굴을 어떤 동물이 따라 잡을 수 있을까. 이건 정말 인간만의 특성 아닐까싶구요. 이건 그냥 날이 날인지라 심통나서 하는 딴지입니다ㅜㅜ
책 전체가 마치 존재의 일의성(univocité)에 관한 동물행동학적 사례들을 모아놓은 듯합니다.
요즘 학계에서도 "인간과 비인간"이 유행어처럼 쓰이고 있는데요.
저자는 비인간이라는 용어도 몹시 거슬린다고 학생들 리포트에 비아냥투의 콤멘트를 단다고 하면서 정작 본인은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대안적 용어가 있을까요?
"내게는 비인간이라는 용어도 몹시 거슬린다. 어떤 속성이 없다는 이유로 수백만이나 되는 종들을 하나로 뭉뚱그리기 때문인데, 그럼으로써 이들 모두를 마치 뭔가 부족한 존재인 것처럼 여긴다. 불쌍한 것들, 그들의 이름은 비인간이로다! 학생들이 글을 쓰면서 이 용어를 사용하면 나는 빈정거리는 투의 평을 하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하고, 공평하게 하려면 해당 동물이 비인간일 뿐만 아니라 비펭귄, 비하에나, 기타 등등이기도 하다고 덧붙여야 할 것이라고 여백에 적는다"(pp. 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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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움벨트,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 둘레 세계(김은주), 환경 세계(김환석), 주변 세계(김효진)라는 번역어를 사용하는데 혹시, 진경쌤이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2
“추위에 용감하게 맞서서 살아남으려면 이런 종류의 기억력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우리 종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27쪽, 12)
“동일한 능력은 그것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다.” (126쪽, 12)
“독자적으로 자기가 처한 환경 속의 물건들을 복잡하게 조작해야 할 필요성” (153쪽)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준비된 학습, 이것은 각 생물이 살아남기 위해 배울 필요가 있는 것들을 배우도록 강요받는다는 개념이다. (96쪽)
(*.*) 여기서 필요를 단순하게 생각해도 될까요?
3
“새가 인간의 몸과 자기 몸을 비교해 어떻게 이에 상응하는 것을 알아낼 수 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169쪽
“나는 많은 유인원이 핵심 단어를 일부 알고, 우리 목소리 톤이나 시선, 제스쳐 같은 맥락 정보에 매우 민감한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181쪽
(*.*) 감응, 개념이 쓸모가 있을까요? -
이재훈
1. "우리가 영화나 시트콤에 나오는 유인원을 보면서 발작적으로 웃는 이유는 유인원이 본질적으로 우습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동료 유인원과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싶어하기 때문이다."(p.26) 이런 심리적 현상은 인간과 유사한 로봇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를 타자성에 대한 인간의 태도라는 측면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2. 2장에 걸쳐 동물행동학과 행동주의라는 두 학파 사이의 대립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들의 대립을 동물의 타자성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을까요?
3. 동물행동학과 행동주의의 차이를 보면서 다른 존재의 타자성을 이해한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습니다. 행동주의자들은 동물을 인간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격한 거부감을 보였고, 그 결과 그들은 동물에 대해 왜곡된 이해를 가지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동물에게 감정이입을 하듯이 무턱대고 동물을 인간화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나친 인간화와 지나친 비인간화 사이에서의 균형감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중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걸 일반화해서 동물 외의 타자에 대해서도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타자성을 이해하는게 이런 면에서도 어려운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뭐 딱히 질문은 아닙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구요...
4. 저자가 소개한 관찰 사례들에서 동물들이 종에 따라 특정 조건에서 인지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와 관련해 이진경 선생님께서 외부의 사유를 말씀하시면서 조건을 강조하셨던 것이 떠올랐는데요, 이렇게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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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저자가 서문에서 인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명백히 밝혔듯이 ..."나는 인간의 인지를 동물인지의 한 종류로 바라본다" 진화론적 세계관은 인간과 동물, 식물을 발생적 연속성 속에서 파악하고 인간의 지능도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의 한가지 형태로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란스 드 발이 강조하는 것은 "수렴진화" , 즉 어떤 종이든 그 종이 속해있는 움벨트(처한 조건)에서 필요하다면 인지력도 언어 능력도 서로 연관없이 발달한다고 강조하는 듯합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기위한 정리입니다만 ^^:;;이 책을 다 읽고나면 질문이 생길 듯합니다.
창근 샘의 마무리는 정말 놀랄만 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꾸벅....
그리고, 오늘 강의할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을 읽고 난 후 질문거리를 찾고 있는데... 이 책도 그렇고 다음 책 <매혹식물> 도 그렇고 읽으면 일단 이해는 되는 수준이라 질문거리를 이것저것 엮어서 찾아보고 있습니다. 질문이 없다고 난처해 하지 마시길 바라면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