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사변적 우화: 새로운 동맹을 위하여> 4주차 공지드립니다.
4번째 강의는 10월 13일에 진행되겠습니다.
오프라인 참여자 분들은 수유너머104 2층의 대강의실로 강의 시작 시간까지 와주시면 되고,
온라인 참여자 분들은 강의 시작 15분전 안내드릴 줌 주소로 접속해주시면 됩니다.
이번 주에는 <종과 종이 만날때>의 2부에 해당하는 6장에서 8장까지를 읽어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지난 강의 때 시간이 없어 충분히 다루지 못한 4장과 5장도 다룰 예정이니 4장과 5장도 한 번 훑어보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읽으시면서 궁금하셨던 지점이나, 인상 깊었던 부분을 이 공지글에 댓글로 달아주세요.
이번 주 발제는 6,7장은 탁선경 선생님께서, 8장은 장숙희 선생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그럼 이번주 목요일에 뵙겠습니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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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몇 문장 적어봅니다.
"반려-종의 관계성 속에 있는 것이 아버지에게는 생존 가능한 삶의 방식이었다. 휠체어와 목발, 그리고 그의 부모님들과 친구들의 돌봄과 자원을 포함한 연이은 파트너 사슬을 가진 아버지는 운이 좋았다. 그 활력은 그 모든 파트너들과 관련된 삶으로부터 나왔다." p.213
"인간은 자신의 파트너가 자신과는 다른 종의 성숙한(혹은 미성숙한) 개체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종 특유의 관심 대상이나 그 객체 특유의 습관을 지니고 있다는 점, 그리고<야생의 부름>에 등장하는 개처럼 모피를 걸친 어린이가 아니며, 인간의 지향이나 판타지의 연장이 아니란 점을 이해하는 것은 분명히 중요하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슬플 정도로 많다." p.265
"어질리티에서 숙련된 인간 경기자는, 제대로 된 일생의 반려는 말할 것도 없고, 어느 시점에 인간이 개를 신뢰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개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신뢰를 얻은 시점을 매우 잘 인식한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내가 아는 인간들은 상호 신뢰에 서투르다." p.278
"어질리티에서 인간들은 결코 핸들러가 아니다(후견인도 아니다). 그들은 숙련된 어른들로 구성된 종 횡단적 팀의 멤버들이다. 접촉지대에서 들리는 비대칭적이지만 가끔은 방향성이 있는 놀라운 권위의 음색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나는 "파트너"라는 말을 한층 더 좋아한다."p.280
이 문장들을 보면서 저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모두 중요한 내용들 아닌가 싶었습니다. 제일 위의 해러웨이의 아버지의 경우 장애(해러웨이 가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지만)를 가졌기에, 그리고 아래 어질리티의 경우 개와의 관계 덕분에 반려 혹은 파트너와의 관계의 문제에 대해서 사고할 수 있게 되지만, 저는 계속해서 인간들 간의 관계의 문제로 가져와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자꾸 생각하다보니 제가 인간중심주의에 깊이 빠져있어서 그런가 싶기도 합니다. 당장 내가 매일 상호작용 하는 파트너인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건 중요하겠지 싶으면서도 여전히 인간중심주의적인가 싶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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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저는 지난 시간에 얘기 나눈 부분에 관한 질문입니다.
실험동물과 생체실험을 당하는 전쟁포로의 처지가 다르지 않다고 보는데요, 실험동물이 실험을 당하는 행위가 노동이라면 전쟁포로의 그것도 노동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실험에 사용되는 칼, 가위, 주사기 등의 비생명 물질들도 노동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실험동물을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실험동물을 대할 때 그들이 지닌 생명체로서의 특성을 잘 이해해 그들이 최소한으로 고통받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최선일 것 같고, 헤러웨이도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실험동물을 그렇게 대하기 위해 그들이 노동자라는 생각이 꼭 필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장인이 자기 도구가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도구를 그 특성에 맞게 잘 다루고 관리하는 것처럼 실험동물이 노동자라는 생각 없이도 동물을 특성에 맞게 다루고 관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험동물이 노동자라면 인간과 실험동물의 관계에서 그 이상의 것이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요?
안녕하십니까, 박소영입니다.
저는 4강 진도 부분 중에서, 특히 6장에 눈길이 많이 갔습니다. 저는 해러웨이의 ‘반려종’이라는 용어가 ‘반려’라는 어휘의 일반 용례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다소간 오인되고 있다는 느낌을 계속 받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종과 종이 만날 때』의 전(前)반부 핵심 내용들이 대부분 인간 이외의 동물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해러웨이는 있을지도 모를 그런 식의 오해를 얼마간 불식할 수 있는 이야기로 6장을 꾸렸습니다. 반려종의 함의와 반려종적 사유가 동물, 인간, 심지어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까지 모두 포괄하는 물질(작용)에 관한 철학하기임을 재확인시켜주었다고나 할까요. 제게는 그렇게 읽혔습니다.
저는 해러웨이를 읽을 때 자유로워집니다. 그리고 격려와 위안을 받습니다. 그 자유로움을 어떻게 손뼉치고 즐거워하며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지, 어떻게 설명해낼 수 있을지, 아직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해 안타깝고 방법을 찾지 못하는 저의 모자람이 부끄럽습니다.
그나저나 한두 대목을 추리는 것이 이렇게나 힘들다니요. 안간힘을 써서 두 대목만 선택하였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보았고 경험했던 이런 적극적인 보기/관심갖기(둘 다 라틴어에서는 동사이며, 레스페체레respecere와 레스펙투스respectus가 된다)라는 어조에 이끌리고 있다. 이런 종류의 관심이 갖는 구체적인 관계성이 나의 주의를 붙잡는다: 관심을 갖기, 다른 방식으로 보기, 중히 여기기, 뒤돌아보기, 계속 관심 갖기, 계속 지켜보기, 다른 사람의 관심을 느끼기, 유념하기, 보살피기. 이런 종류의 관심은, 모순어법적이고, 필수적인 ‘관계성 속의 자율성’을 해방하고, 동시에 그 속으로 해방되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205)
“반려종—온갖 종류의 세속성과 신체성 속에서 아래로도 쭉 함께 형성되는—은 그 속에서는 모든 종류의 종이 문제시되는 비-휴머니즘을 위한 나의 어색한 용어이다. 내게는, 우리가 사람들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때조차, 동물/인간/살아있는 것/살아있지 않은 것의 카테고리 분리는 관심을 가질 가치가 있는 조우 속에서 풀어져 너덜너덜해지는 것 같다. 내가 이야기하고 쓰려고 하는 윤리적인 관심은 다양한 종들의 차이를 횡단하는 방식으로 경험될 수 있다. ... 반려종은 영원히 논증 불가능한 카테고리, 그 관계를 존재와 분석의 최소 단위로 주장하는 ‘의문시되는 카테고리’이다. 캐런 배러드의 행위적 실재론과 내부-작용에 관한 이론에 빚져서 생각하는데, 종이라는 말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그것의 지위가 인공물, 기계, 풍경, 유기체, 인간과 같은 식으로 미리 결정될 수 없는 일종의 내부-존재intra-ontics/내부-익살스러운 행동intra-antics이다.”(20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