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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5강 후기 '불량 병사'와 제국(1)

김요섭 2017.08.30 15:18 조회 수 : 23608

몇주전에 올렸어야 하는데 다른 일에 밀려서 많이 늦어졌네요. 

 

쓰다보니 분량이 좀 많아서 두번에 나눠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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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에 던지는 '다른' 질문들] 5강 후기

 

 

불량 병사와 제국

 

 

카케모토 츠요시 선생의 「어떤 일본병사의 논리 – 후루야마 고마오의 전장소설에서」는 후루야마 고마오의 소설을 중심으로 제국의 논리를 내면화는 않으면서 병사의 목소리를 재현하는 방식을 주목한다. 후루야마 고마오의 소설은 전쟁 기간 내내 군인 다운은 자세를 보이지 않음으로써 일등병으로 진급하지 못한 불량군인이었던 자신의 시선에서 전쟁을 바라본다. 카케모토 츠요시는 후루야마의 전쟁 문학에서 병사로서의 주체성을 내면화하지 않는 지점들을 주목한다.

후루야마는 ‘운’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태평양전쟁이라는 사건과 일본 제국이라는 국민국가의 교차 속에 배치된 인간들을 우연적 상황에 지배되는 무기력한 존재로 설명한다. 병사들의 생존은 운의 결과일 뿐이며 이는 국가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라고 판단한다. 카게모토는 ‘운’의 논리가 병사를 포함해 제국의 모든 성원들을 국가의 주체에서 역사와 시간의 객체로 위치이동 시킨다는 점에서 제국이 요구한 주체화된 병사의 논리에 균열을 가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우연의 지배 속에 놓여있는 객체적 인간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필연성의 논리를 통해서 병사들을 동원하는 제국의 시선과 합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후루야마의 ‘운’의 논리가 전쟁에 대한 책임과 반성의 사유를 회피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주목하는 것은 바로 제국의 세계와는 분열을 내재할 수밖에 없는, 주체화를 거부하는 자기 정립 방식이기 때문이다.

‘운’의 논리는 전쟁의 주체들을 오히려 객체로 뒤바꿔 평가함으로써 제국의 논리를 빗겨나가는, 판단의 영역이라면 ‘페니스’에 대한 후루야마의 태도는 병사되기라는 제국적 주체화의 과정을 거부하는 실천의 영역이다. 카게모토는 일본 병사되기 속에는 성적 가해의 주체라는 폭력적 남성성의 실천이 결부되어 있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위안소제도였다는 히코사카 다이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병사되기와 (콘돔인 ‘돌격 일번(突擊 一番)’을 착용한 병사의 ‘무기’인) ‘페니스’를 사용하는 ‘성 능력 - 성적 착취’가 결합되어 있었음을 지적한다. 제국의 병사로 거듭나기는 곧 위안부를 성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페니스’의 사용을 통해서 남성다움을 증명하는 일이며 이러한 관점은 안연선의 『성노예와 병사 만들기』(삼인, 2003)에서 ‘위안부’와 일본군이 각자 위안소 제도를 통해서 제국의 신민(국민)으로 훈육된다는 설명과 유사하다.(위안소 제도의 목적을 ‘정신적 위안’에서 찾음으로써 성적 착취의 존재를 주변화한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의 관점도 병사와 ‘위안부’가 천황의 안배 아래 의사가족적 관계로(천황제 가부장의 구조로) 결합됨으로써 제국의 국민이 된다고 설명하여 위안소 제도를 통한 병사와 ‘위안부’ (제국적)주체화의 문제를 인지하고는 있다.)

후루야마는 일본군의 페니스 집착을 조롱하면서 위안소를 가기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제국의 병사되기를 회피한다. 그는 페니스로 체중을 견디는 병사를 상상함으로써 일본군의 남근주의를 조롱하며 위안소를 이용하는 대신 자위를 통해서 성욕을 해소한다. 카게모토는 ‘자위’와 ‘화류병’을 금기시하는 당시 일본의 성교육의 성격을 지적하면서 화류계를 즐기던 경험을 통해 위안소를 바라보고 자위하며 위안소를 거부하는 태도가 (병사로서의)젠더 재생산을 거부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후루야마의 소설은 이처럼 제국의 논리에 빗겨서 있는 지점에서 병사들의 시선을 재현한다. 그의 접근은 한 편으로 제국이 만들어내려고 했던 병사가 되기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불량 병사’의 목소리이면서 동시에 제국에 의해서 관념화되지 않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필터링 되지 않은 목소리를 되살린다는 점에서 ‘병사’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카게모토 선생의 연구에서 주목할 점은 후루야마의 소설이 제국의 논리에서 빗겨 서려는 ‘불량 병사’의 재현이자 동시에 제국의 프로파간다와 연합군에 의해서 만들어진 전후 일본국가의 담론 어디에도 수용되지 않는 ‘병사’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있음을 설명한다는 점이다. 즉 후루야마의 ‘불량 병사’는 일본 ‘제국’이 만들어 내려고 했던 병사-주체도, 전후 일본 국가의 기억과 담론 속에서 (재)구성된 병사도 아닌 우연히 전쟁터의 공간 위에 배치된 ‘병사’의 시선과 목소리를 재현한다는 점에서 고유함을 가진다. 국가에 동원된 주체를 설명하는 문제는 이중의 부담이 있다. 사건 속에서 동원된 개인은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관념적 주체의 형상에 의해 굴절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건에 대한 기억과 사후의 담론속에서 재구성될 수 있다. 재현은 이러한 이중의 굴절 속에서 개별 주체의 경험을 훼손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후루야마의 ‘불량 병사’를 주목하는 카게모토의 연구가 가진 의미는 병사의 존재를 (재)구성하는 재현의 불안전성을 우회하는 방식을 일정부분 설명해준다는 점이다.

(제국의 신민으로써)병사와 제국의 규율에서 일탈한 ‘불량 병사’, 그리고 담론적 재현의 포위를 벗어난 개인인 ‘병사’라는 구분을 후루야마의 소설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병사와 ‘불량 병사’, ‘병사’ 사이에는 끝내 빗겨 서지 못하는 연속성이 자리한다. 이는 다시 ‘나=병사’라는 공통성이다. 즉 그 재현의 양식과 심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전시에 이들이 놓여있던 자리가 제국의 병사였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할 때 병사를 동원했던 제국의 전쟁은 별다른 오작동 없이 수행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불량 병사’와 전쟁 수행 사이의 연속성은 카게모토 선생이 인용한 후루야마 소설의 한 부분에서 불길하게 암시된다. “군대에서, 나는 어떠했는가. 운이 좋게도 나는, 포로를 죽이라, 라고는 명령받지 않았다. 그러나, 가령, 명령을 내렸다면…….” 후루야마의 전쟁문학 삼부작 중 한 편에서 인용한 이 부분에서 주인공 ‘나’의 독백은 ‘불량 병사’가 제국의 군대에서 행동할 수 있는 일탈의 한계영역을 정확히 그어준다. ‘불량 병사’는 위안소를 가지 않고 병사들의 남성성을 비웃을 수 있지만 명령이 내려온다면 그는 전쟁 속에서 인간을 살해할 수 있으며 전쟁포로에 대한 불법적인 살인도 마찬가지다. ‘불량 병사’가 제국의 전쟁 범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단지 좋은 ‘운’을 통해서 다른 업무를 배정받는 것뿐이다. 후루야마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하는데 그는 운이 좋게도 전선의 잔혹행위에 직접가담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포로수용소의 관리자로 복무함으로써 그의 불량한 태도와 일탈 여부는 제국의 전쟁 수행 과정에 어떤 저해요인도 되지 않았다.

인민을 동원의 대상으로써 주체화하는 제국 혹은 국민국가의 규율 속에 일탈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상시적인 조건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특정한 정치적 주체로써의 국민을 창출하고자 하는 국가는 단순히 일회적으로 국민됨의 조건을 선포함으로써 이를 달성할 수는 없다. 실상 국가에 의해서 선포된 국민됨이란 지속적인 국가의 규율의 수행 속에서 달성되는 일시적 상태에 가깝다.(이승만 정권시기 반공국민의 형성을 연구한 김득중은 ‘반공국민’이란 국가의 규율 속에서 계속 실천해가는 수행성의 성격이 강하다고 지적한다.『빨갱이의 탄생』(선인, 2009), 국민됨과 수행성의 문제는 국가에 불만을 드러낸 상이군인들에게도 적용된 빨갱이 담론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김봉국, 「이승만 정부 초기 애도-원호정치」, 『애도의 정치』, 길, 2017)) 국민의 입장에선 자신의 국민됨을 끝없는 자기 실천 속에서 증명해야하며 국가의 입장에선 국민됨에 대한 지속적인 규율과 감시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국가는 일탈하는 주체들의 존재를 전제하고 국민을 창출해야만 한다. 후루야마 고마오와 같은 불량 병사의 존재는 제국에게 있어 예외적인 상황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도 아니다. 상시적으로 존재하는 불안이며 동시에 관리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물론 어떤 일탈은 국가의 규율을 초과하며 오히려 국가의 국가됨을 의문시하고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저항과 (랑시에르적 의미의)정치로 거듭나기도 한다. 문제는 과연 후루야마의 일탈이 제국에게 있어 어떤 것이었느냐 하는 점이다.

전체주의적 체제 속에서도 일탈은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며 어떤 일탈은 국가의 주요한 정치적 목표에 대한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일본의 사례에 대해서는 아는바가 제한적이므로 같은 시기 독일의 사례를 통해서 전체주의 체제의 국가가 감내해야 했던 일탈, 특히 나치국가의 핵심적인 정치적 목표였던 ‘유대인 없는 유럽’과 ‘인종적 순수성의 유지’에서 국가가 직면한 일탈의 대략적으로 살펴보자. ‘인종적 순수성’과 ‘유대인 없는 유럽’이라는 나치 국가의 핵심적 목표는 흔히 홀로코스트라 불리는 극단적인 수단, 즉 제노사이드(지그문트 바우만은 제노사이드를 특정한 사회를 구성하려고 하는 국가의 전망을 실천하는 극단적 사회공학이라고 규정한다.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새물결, 2013)까지 용인했다. 인구절멸과 같은 극단적 수단을 동원할 만큼 이 문제에 대한 나치 국가의 목표는 확고했지만 동시에 이를 향하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인 국민/병사의 일탈을 직면한다. 독일인들이 반유대주의 나치집회에는 열성적으로 참여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면 자신의 예외적이고 선량한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끊기를 거부한다는 하인리히 힘러의 불평처럼(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개마고원, 2009) 반유대주의라는 국가적 목표를 심정적으로 외면하는 독일인의 일탈 사례가 존재하며 보호받을 유대인을 외면하게 하려는 압력은 나치국가 초기에 유대인 규정에 대한 혼란으로 나타났고 일부에서는 총통의 특정 유대인에 대한 ‘해방’조치로 이어지기도 한다.(힐베르크, 같은 책)

유대인 ‘이웃’에 대해서 독일들이 보였던 정서적 태도의 문제는 나치 국가가 유대인에게 가한 공개적 폭력이었던 ‘부서진 수정의 밤’에서 극명하게 들어난다. 1938년 나치 돌격대가 감행한 유대인들에 대한 집단 린치는 1회적 사건으로 그치고 마는데 유대인 ‘이웃’에 대한 가시적 폭력에 대한 독일인들의 거부감 때문에 지속될 수 없었던 것이다. 힘러가 불만스럽게 토로하던 나치의 이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일탈적 태도는 나치 국가로 하여금 ‘유대인 없는 유럽’을 실현하는데 있어 행정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부서진 수정의 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을 독일사회에서 제거하려는 행정적 조치들은 흔들림 없이 지속되어 학살수용소와 같은 극단적 수단까지 고도화되어간다.

나치국가의 국민됨(인종적 순수성과 반유대주의에 대한 신념)을 내면화하지 않은 독일 국민들의 ‘일탈’은 행정적 부담이었으나 동시에 행정적으로 극복 가능한 문제였다. 독일 국민은 이웃 유대인이 폭행당하는 상황을 지켜보기 힘들어 했지만 유대인들의 법적 권리가 제한되는 일련의 흐름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독일의 지식인 사회조차 유대인들이 겪은 직업적 차별과 금지 조치에는 침묵했다.(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나치시대의 일상사』, 개마고원, 2003) 독일인들의 일탈은 린치에 대한 심정적 불만에 머물렀을 뿐 ‘유대인 없는 유럽’이라는 나치 국가의 목표를 되묻지 않았다. 유대인들을 제거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독일 국민과 병사들의 심정적 불만은 새로운 행정적 조치와 기술적 대안을 통해서 극복되어갔다. 즉 가시적 폭력에 대한 불만은 동유럽 식민지 게토로의 강제이동으로, 유대인 총살에 대한 병사들의 정서적 충격과 불안은 가스실을 통해서 관리해나간 것이다.(지그문트 바우만, 앞의 책) 물론 일부 일탈사례가 나치국가에게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한 사례도 있으나 전반적으로 ‘유대인 없는 유럽’이라는 목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존재하지 않았다.(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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