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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의 문학] 4강 후기

달공 2019.02.06 16:17 조회 수 : 128

 

Ⅰ. 사물의 시작(詩作)

 

송승환 선생님의 강의는 기다림을 낳는다. 그 기다림은 고요하지만 출렁이는 잔잔한 파도의 모습을 닮았다. 지난 번에 이어 이번 강의는 ‘가시적인 것의 바깥’이다. 보이는 것 바깥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보고 있지만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시작은 항상 보이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움도 언제나 다가오는 그 무엇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송승환 선생님의 이번 강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로댕론」에서 시작되었다. 릴케가 언어의 조형성에 관심을 가지고 대상에 집중하게 된 계기는 로댕과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촌사람’인 그가 대도시 파리를 가게 된 계기도 로댕과의 만남을 통해서였고, 로댕의 작업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는 그 이전과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운다. “모든 것이 내 안 깊숙이 들어와서, 여느 때 같으면 끝이었던 곳에 머물지 않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아직 서투르지만 주어진 시간을 잘 이용”하여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네가 누구라도, 저녁이면

네 눈에 익은 것들로 들어찬 방에서 나와 보라

먼 곳을 배경으로 너의 집은 마지막 집인 듯 고즈넉하다

네가 누구라도

지칠 대로 지쳐, 닳고 닳은 문지방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너의 두 눈으로

아주 천천히 너는 한 그루 검은 나무를 일으켜

하늘에다 세운다 : 쭉 뻗은 고독한 모습, 그리하여

너는 세계 하나를 만들었으니, 그 세계는 크고,

침묵 속에서도 익어가는 한 마디 말과 같다.

그리고 네 의지가 그 세계의 뜻을 파악하면,

너의 두 눈은 그 세계를 살며시 풀어준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서시」, 『형상시집』 중에서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는 너무나 눈에 익어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만약 사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눈에 익은 것들로 가득찬 방에서 나와”야 한다. 우리는 사물을 존재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부재’속에서 발견한다. 보지 못했던 사물들이 내게 드러날 때는 이미 그 사물은 내가 알고 있는 곳에서 벗어나 있거나 아니면 내가 그 사물의 자리에서 벗어나 있을 때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는 우선 위치(position)를 바꾸어야 한다. “닳고 닳은 문지방에서” 벗어나면 “한 그루 검은 나무를 일으켜” “세계 하나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세계는 크기 때문에 침묵 속에서도 “그 세계의 뜻을 파악하면” 그 세계는 살며시 네게 말을 건네줄지도 모른다. 릴케에 따르면 형상은 영감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서 드러난다. 예술은 리얼한 것이 아니라 리얼하게 보이는 것이기에 시인은 언어의 조형성에 주목해야 한다. 사물 안에 간직되어 있는 형상은 가시적인 것 바깥에 놓여있다. 그래서 보이는 것만 믿고 사는 사람은 삶의 깊이가 없다. 우리가 보이는 것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것의 심연으로 향할 때 삶은 비로소 깊이로 확장된다.

송승환 선생님은 사물을 새롭게 인식하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조건을 말씀하셨다. 우선 자신의 위치를 변화시켜야 하고, 그래서 다르게 보이는 사물을 ‘다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사물은 새로운 의미로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되는데, 이때 사물의 언어는 세계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나의 내면에 들어와 새로운 시적 순간으로 변용된다. 새로운 세계의 탄생은 이전 세계의 죽음을 전제하고 있기에 일상 언어를 잃어버리는 경험은 곧 사물과 일체감을 느끼는 순간으로 바뀔 수 있게 된다. 세계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항상 ‘표면’일 수밖에 없기에 표면이 가장 깊다. 나와 세계가 마주하여 동시에 의미있게 바뀌게 되는 표면, 그것이 곧 가시적인 것의 바깥이 아닐까?

 

Ⅱ. 지워지는 시, 드러나는 아름다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시인 중에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시인들에게는 사랑받는 김종삼 시인의 시를 두 편 읽었다. 그 중에 한 편을 적어본다.

 

싱그러운 거목들 언덕은 언제나 천천히 가고 있었다

 

나는 누구나 한번 가는 길을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었다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악기를 가진 아이와

손쥐고 가고 있었다

 

너무 조용하다

- 김종삼, 「풍경」(1982) 전문

 

선생님에 의하면, 김종삼 시인의 시는 거의 과거진행형 묘사체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의 빈번한 사용과 함께 과거진행형의 시제는 놀랍게도 영원성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의 영원성은 사라지는 영원성이다. 언덕위에 거목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본 시인에게 거목들은 ‘언제나’ 천천히 가고 있다. 그 언덕 위에 난 길은 누구나 한번 가는 길인데, 그 길은 알다시피 ‘죽음’의 길이다. 그런데 그 길을 거목과 함께 나는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다. 거목이 천천히 가고 있듯이 나도 가고 있는 이 길 위에 거목은 항상 싱그럽다. 왜 싱그러울까? 죽음 앞에서 살아있는 모든 사물은 싱그럽다. 게다가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악기는, 있지만 보이지 않는 악기이기에 그 악기를 가진 아이조차 사실은 이 세상에 없는 아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아이와 함께 가고 있다. 그러나 이 시가 놀라운 것은 사실 마지막 연이다. 단 한 줄로 이루어져 있는 이 시의 마지막은 “너무 조용하다.” 과거형으로 진행하다가 문득 ‘조용하다’는 현재형으로 마무리되는 이 시는 도대체 나는, 나무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라는 의문을 품게 한다. 김종삼 시는 ‘언제나’ 현재의 순간적 존재와 대비되는 현실의 고통을 지워버리며 보이는 것 너머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는 마지막 연에서 과거형으로 묘사되었던 앞에 쓰여진 시들을 지워가기 시작한다. 과거의 익숙한 세계가 지워지는 결별의 순간을 나의 죽음이라 부를 수 있다면, 이런 나의 죽음이 전제되어야 현재적 삶에 있어서 지금 여기의 사물은 아름다움으로 내게 다가올 수 있다.

 

송승환 선생님은 잘 알다시피 시인이면서 문학평론가다. 시를 쓸 때는 시인이겠지만 시를 읽을 때는 평론가의 관점으로 읽는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때의 독해는 시를 써보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것을 (혹은 볼 수 없었을 것을) 보여주신다. “어떻게 이 지점에서 이 단어를 선택할 수 있었을까?” 이런 감탄은 정말 시를 써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감응(affect)이다. 송승환 선생님의 강의가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바로 이런 점이 아닐까? 우리는 잠시나마 시인의 눈을 빌려 시를 읽는 평론가의 입장(position)에 서게 된다. 이 수업은 거의 밤11시가 넘어야 끝났는데, 쉬는 시간 이후 2부부터 함께 읽기 시작한 「두이노의 비가」 때문일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그 유명한 「두이노의 비가」를 한 편도 아니고 세 편(1, 8, 9)을 읽었다. (세상에 이런 수업이 있을 수 있을까? 지겨울 것 같은데 그런 줄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그런...ㅜㅜ).

 

추신: 이 수업의 백미는 ‘역시’ 뒷풀이였다. 함께 수강한 어느 선생님께서 송승환 선생님 강의가 너무나 좋았다는 소감을 마치 한 편의 시처럼 시작하셨는데, 단지 한 사람, 송승환 선생님만 남겨놓고 거기에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을 다 지워버리셨다. 아마 그 놀라운 능력은 송승환 선생님의 단 두 번의 강의로 인한 것이었으리라. 보라, 감응된 자의 놀라운 위력을... 혹자는 누구나 시인일 수 있다지만 누구나 들었던 강의의 내용대로 삶의 현장에서 '새로움'을 실현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그런데 그 분은 “지워가면서 드러나는 그 어떤 아름다움”을 보여주셨다. 그렇다. 가끔 그런 분도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일상을 다른 위치에서 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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