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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를 철학하다] 4강 후기

papanaya1 2023.02.07 11:54 조회 수 : 58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

4차 강의는  펼쳐지면서 접히는 '공'과 '색'의 이치와, 그 이치를 증득하고  '있음'을 아는 이의 행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4차 강의에서도 역시 잔혹한 활극은 여전했지만 겨우 손가락이 잘리는 정도여서 스릴이 이전만큼은 아니었습니다.

# 1 : 선생님께서는  불법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손가락을 하나 치켜드는 행위로 응답하는 것은, 손가락을 드는 작은 행위 하나로도 또 다른 가능 세계가 현행화되어 펼쳐지는 이치를 밝혀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십니다. 그와 달리 법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에 주장자를 들어 올리거나 두 주먹을 불끈 쥐어 올리는 것은 모든 세계로의 분기 가능성을 내장한 잠재성의 장을 내보이는 것이라고 해석하십니다.  현행성과 잠재성의 두 측면을 나누어 각각 말씀하셨지만  주먹을 쥐어야 한 손가락을 들 수 있고, 손가락이 펼쳐져 있어야 주먹을 쥘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신 것은  현행성과 잠재성이 연기적으로 결부되어 부단한 생성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을 말하시려는 듯합니다.

#2 : 그러니, 어떻게 불법의 세계가 텅 빈 채 고요할 수 있겠습니까?  구지 스님이 어제 든 손가락과 오늘 든 손가락조차 손가락을 드는 순간을 둘러싼 무수한 차이들....장소, 때, 손가락을 드는 속도..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차이들이 찰라의 순간에 폭풍처럼 엮여 들어왔다가 치켜든 손가락을 따라 다른 가능 세계로 열린 문을 향해 터지듯 몰려 나갈테니 말입니다. 가히 부글부글 끓고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법신의 세계가 어떻게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두 암주가 공히 주먹을 불끈 쥐어 보여서 법신임을 내보였지만 조주 스님은 그 차이를 예민하게 알아 본게 아니겠습니까? 법신일지라도 육신으로 나투고 있는 바에야 그릇이 작다 크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 보다 감탄할 만한 것은 그 법신조차 동일자로 환원하지 않는 조주 스님의 감지력입니다. 조주 스님은 깨달은 자들, 혹은 깨달았다고 자들의 그릇의 차이를 명백하게 본 셈이지 않겠습니까?   깨달음에도 수준과 강도가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3 : 일단 동자승의 잘린 손가락에 애도를 표합니다. 그러나 동자승은 응당 받아야 할 대가를 치른 듯합니다. 동자승은 단지 손가락을 치켜드는 행위를 '동일하게' 반복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스승인 구지가 들었던 손가락은 매번 다른 손가락이었고, 그래서  또 무수히 차이나는 가능 세계들을 열어 젖히는 행위였다는 것을 동자는 알지 못했던 것이겠지요. 만일 동자승이 자신의 행위가 불러 내는 결과에 재미가 들려서 그것을 동일하게 반복한다면 그에게 손가락은 필경 족쇄가 되었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재밌고 좋았을 지 모르지만 그 동일한 것이 고착된 채 반복될 때 오히려 고통을 가져 온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경험을 통해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러니 구지 스님이 동자승의 손가락을 잽싸게 자른 것은 제자가 짊어지게 될 구차한 족쇄를 일거에 덜어주는 자비행이었고 스승의 도리를 다 한 것일 겁니다. 그리고 스승은 그 짐을 강제로 덜고 숨가쁘게 달아다는 동자승을 향해  마지막 숙제를 내줍니다.... 마침내 스승이 치켜든 손가락을 멀리서 보면서 동자승은 무언가를 봤을 겁니다. 폭발적으로 고양된 해상도로 비로소 감지되는 미세한 차이들, 그리고 그 차이들이 폭풍처럼 서로 접속하면서 이어지는 그 어떤 생성의 장관들..... 동자승은 손가락 하나 내어주고 봉잡은 셈이죠..

#4 : 석가모니 부처님은 6 년여의 고행 끝에 삼천 대천 세계를 한 눈에 보는 무한 해상도를 얻으셨습니다. 위없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거야 말할 나위가 없지만 그런 무한 해상도의 지각 능력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참 불편할 수도 있을 겁니다.  오죽했으면 사리불은 세포같은 것들이 보이는 까닭에 밥조차 먹을 수 없었겠습니까? 부처님이 찾아와 '심안으로 보지 말고 육안으로 보라'라는 말로 달래서 간신히 밥을 멕이기는 했습니다만,  심안과 육안를 잘 분별해서 쓰는 역량을 갖지 못한다면 삶의 곤욕과 불편은 이루 말할 수가 없겠지요. 그런 점에서 색이 공한 이치를 깨닫는다고 공부가 끝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공이 색이 되는 이치도 깨달아야, 즉 때에 따라서 심안이 아니라 육안으로 볼 줄도 알아야 비로소 공부도 좀 익어가는 것이 될테고, 남한테 좋은 일도 좀 할 수 있는 역량이 생기는 게 아니겠습니까?

#5 :  조주가 남전에게 '있음'을 아는 이의 행보에 관해 물었던 것은 공이 색이 되는 이치에 관한 물음처럼 보입니다. 그 때 조주가 말한 '있음'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12연기에서 그 '有'와 같은 뜻인지 저는 확실히 알지는 못합니다. 아무튼 부처님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12연기에 따르면  '있음' 은   '생'의 연기적 조건이자 뒤 이어서 '노' '병사'로 이어지는 윤회의 한 고리일 텐데, 남전 스님처럼 깨달으셨다는 분이 왜 그 생사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시주집의 물소가 된다고 말하는지 사실 좀 어리둥절했습니다.

#6 :  연기법이 자칫  '있음'의 상태를 설명하는 방법에 머문다면 현행적인 것을 수동적으로 감내하도록 만드는 변명 수단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으니 내가 지금 이 몬양인 까닭은 다 저것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그런데 그렇게 연기법을 오해하거나 오용하는 것은 '있음'을 동일성이 형성되고 유지된 것으로만 보는 관점탓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있음'을 동일성의 반복으로만 본다면 '연기'는 결국 그것이 그것이게끔 한 계기들을 수집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려 때문일까요?  선생님은 '있음'을 안다는 것을 존재자의 존재를 안다는 전제하고, 그 존재를 안다는 것은 부여된 존재의 의미를 아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의 있고 없음의 차이를 안다는 뜻이라고 설명하십니다. 멋진 차이의 존재론입니다. !  '있음', 즉 존재를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통해 발산되는 그 의미와 효과의 반복이라고 한다면, 연기법은 존재의 실상에 대한 설명적인 도구를 넘어 존재의 변이와 생성을 촉발하는 실천적인 함의를 갖게 될 것입니다. 연기법은  어떤 대상이 없어지거나 생김으로써 촉발되는세계의 변화를 포착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또 다른 세계로의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차이의 존재론을 통해 연기법에 실천적인 역동성을 부여하는 것. 혹은 차이의 존재론에 올려 놓음으로써 연기법의 진면목을 구현하려는 것, 그것이 혹 선생님의 기획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7 : 차이의 존재론과 결부할 때,  남전 스님이 ''산 밑 시주 집에 가서 한 마리 물소가 되어야지"라고 한 말의 의미가 더 잘 드러납니다.  연기법에 따르면서도 연기법에 매이지 않는 실천적인 결행의 경지를 드러낸 것이지요. 그런데 왜 하필 '물소'였을까요?  '물소'가 있고 없음에 따라 시주 집의 농사는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고 그 시주로 생활하는 남전 스님의 수행 역시 달라졌을 지도 모르기 때문일 것같습니다. 따라서 '물소'의 '있음'을 안다는 것은 그 '물소'의 '존재 효과'를 아는 것이며, 산 아래와 산 위의 절을 아우르는 세계의 특이성을 규정하는 특이점으로서의 '물소'의 존재 의미를 안다는 뜻일 것입니다.  숭산 스님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선방을 차리기 위해 지옥으로 가겠다고 말씀하셨을테지요. 남전 스님은 산 아래 축생으로 거듭나기를 주저하지 않고 숭산 스님은 지옥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사들의 그러한 모습에서 공성을 깨치고 '있음'을 아는 이들이 연기법을 타고 노니는 행보를 봅니다.

#8 : 궁금한 것은 선사들이 그렇게 '깨달음'을 부릴 줄 아는 능력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점입니다. '있음'을 안다라고 했을 때 그 '안다'는 것이 인지적인 앎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양자적인 수준보다 더 작은 차원에서부터 우주보다 더 큰 차원까지 차이가 들끓는 세계를 한 방에 꿰뚫는 것이 아니고서야 공성을 깨쳤다고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공성을 깨치고 '있음'을 안다는 것은 연기적 조건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며 생성을 이어가는 그 맥락을 자유 자재하게 지각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표상화되거나 의미화되기 이전의 그 들끓는 상태에 대한 훤한 지각이 없다면 제자의 답과 물음을 재빨리 알아채고 그를 숨이 턱 막히는 물음의 장으로 몰아가거나 족쇄를 한 방에 끌러 버리는 것과 같은 일을 여유있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선사들 특유의 여유와 활기는 광속의 한 천만배의 속도로 그 차이의 폭풍우 속을 횡단할 수 있는 역량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9 :  선사들은  차이가 발산하는 징후를 가공할 만한 속도로 잡아 챕니다.  말하자면 기호에 무척 민감한 분들이실 겁니다.  선사들의 수준과 비교가 되지는 않겠습니다만, 우리 시대에 여러 분야에서도 각 분야에 특화된 기호을 잡아 채는 데 일가견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강형욱씨는 강아지들이 발산하는 기호에, 오은영씨는 금쪽이들이 발산하는 기호에 민감합니다. 그들은 어리석음과 탐욕에 끄달려 강아지와 아이들을 고통에 빠뜨리고 그 결과 그 자신조차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해결책을 제시하기 전에 대부분  강아지와 금쪽이가 발산하는 기호들을 다시 보게 만드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같습니다. 모름지기 지혜로운 문제의 해결 방식은  고통의 징후를 연기적인 조건과 결부하여 예민하게 포착하는 데서 나오는 것일테니까요.

#10 : 선생님께서는 '지혜'를 주인이 되는 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존재의 차이를 연기적으로 꿰뚫어 보는 감응력과 더불어 그 배치를 적절하게 변화시켜 고통을 덜어주는 반응력을 갖추는 것이 지혜이고, 그것을 닦는 것이 주인이 되는 길이라는 뜻인 줄 압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제  이번 생에 한 소식 하는 것은 글러 보이는 터라... 부처가 된다거나 선사의 경지에 오르는 일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다만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를 둘러싼 , 생각보다 좁은 세계를 더 기쁘고 즐겁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자들의 고통을 좀 줄이는 데 쓸모 있는 지혜와 방책들은 마음을 낸다면,  굳이 양자적 수준과 우주적 차원을 횡단하는 가공할 속도를 증득하지는 못하더라도 충분히 마련할 수 있을 것 같기에... 그거라도 해 볼 생각입니다. 물론 그조차도 버벅거리기 십상이겠습니다만, 그래도 그 과정에서 무언가에 끄달리는 내 자신을 알아 채는 것만으로도 좀 나아지는 셈일 것이고, 재수가 좋으면 보기에 실한 주먹 하나 떠억 하니 들어 올릴 지도 모를 일이죠...  가왕 조용필씨도 노래했습니다.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지 내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지만, 내가 아는 것은 살아가는 방법 뿐이라고 말이죠... 용필이 형처럼 다들 살아가는 방법에서  소소한 깨달음들 이루어 나가시고, 어쩌다 확철 대오까지 하게 되시면 주변에도 좀  나누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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