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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를 철학하다] 2강 후기

유택 2023.01.26 12:53 조회 수 : 92

연말 연초에 속시끄러운 일들로 마음이 힘들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정화스님의 <반야심경>과 <금강경>

진경샘의 <불교를 철학하다>와 <선불교를 철학하다>를

다시 꺼내어 읽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습니다.

연필로 줄을 치고,

마음에 두고두고 새기고픈 글귀는

형광펜으로 빡빡 칠했건만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아서 이렇게 발췌까지 하며

마음에 다시 새겨봅니다.

살면서 순간 뚜껑이 열릴 것 같을때..

1. ‘90초 이론’ 딱 90초만 참아봐라! 신경전달물질 분명 바뀐다! (정화스님)

2. ‘E~ SSiba SSibal~’ 대신 ‘뚜뚜루루루~’ 노래하며 웃어라! (진경샘)

두 개의 불교 수업으로 다시 올 해를 시작하렵니다.

감사합니다.

 

==아래는 발췌==

 

<불교를 철학하다>

 

‘역사적 조건’이란 말을 ‘연기적 조건’이라고 바꾸어 쓰는 것만으로 마르크스의 이런 발상은 연기적 사유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사고방식을 그는 ‘역사유물론’이라고 명명하는데, 이때 ‘유물론’은 물질의 실재성을 강조하는 통상의 ‘유물론’과 다르다.(26)

 

업의 힘, 관성적인 성향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연기의 개념과 더불어 열리게 된다. 과거의 업에서 벗어난 새로운 업을, 새로운 성향을 만들어내는 것은 연기의 개념이 있을 때 가능하다.(37)

 

뜻하지 않은 것이 내 안으로 밀려들어옴을 수긍하는 것이다. 이렇게 발생하는 죽음을 블랑쇼는 ‘비인칭적 죽음(비인격적 죽음)’이라고 명명한다.(88)

 

‘머무는 곳 없이 보시를 행하는 것’ 주었다는 생각 없이 주는 것, 그런 만큼 받으려는 마음도 동반하지 않고, 그렇기에 받은 이에게 어떤 채무감도 부과하지 않는 것, 따라서 교환으로 이어질 이유가 없는 증여, 이것이 절대적인 증여고 그렇게 주어지는 것이 절대적 선물이다. 무주상 보시(103)

 

불교에선 ‘불법’이라고 표현하는 삶의 지혜에 대한 가르침을 설하는 사람도 특별히 선물이란 생각 없이 그저 할 일을 한다며 설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듣는 사람도 선물이라는 생각 없이 그저 ‘듣는다’ 내지 ‘배운다’는 생각만으로 듣기 마련이다. 그러나 좋은 삶을 살려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선물이 어디 있을까? 이런 종류의 선물을 불교에선 ‘법시’라고 한다.(104)

 

중도란 진위와 선악 같은 양자의 ‘중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떠나서 사태의 ‘한가운데’로 들어서는 길이다. 극단의 두 범주를 벗어나야만 보이는 사태의 미묘한 실상에 대한 섬세하고 정확하게 다가가는 것이다. (164)

 

어떤 규정성도 없음, 그것이 ‘공’이다. 그렇기에 공은 단지 ‘없음’을 뜻하는 ‘무’가 아니다. 그건 차라리 가능한 규정성들이 너무 많아서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하는게 더 적절하다.(178)

 

어떤 것이 음식물이나 생명체가 되게 하는 것이 연기적 조건이라면, 어떤 연기적 조건과도 만나기 이전의 상태가 공이다. 그렇기에 어떤 것의 본성이 ‘공’함을 본다는 것은 텅 빈 허공을 보는 것도, 아무 것도 없는 무를 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만나게 될 연기적 조건에 따라 얻게 될 규정 가능성들을 보는 것이고, 그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을 보는 것이다.(178)

 

<중론>은 시간에 관한 파격적 명제를 제시한다. “시간은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구성요소들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로 개체화 되려면 이처럼 리듬을 맞추어 ‘하나처럼’ 움직여야 한다. 시간은 이때 탄생한다. 개체화가 중단되면 그 개체의 시간도 소멸한다. 하나처럼 맞추어 움직이는 것에 연하여 시간은 발생한다. 그 이전에 시간은 없다. 이는 모든 연기적 결합, 모든 리듬적 동조를 향해 열려 있음을 뜻한다. 모든 시간을 향해 열린 순수 잠재성, <중론>이 말하는 시간의 공성이란 이런 것이다.(183)

 

“불사의 존재가 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인간을 제외하고 모든 피조물은 죽음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불사의 존재들이다. 신성하고 공포스럽고 불가해한 것은 인간이 불사의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알렙>,26쪽).”(204)

 

이런 의미에서 ‘일체유심조’는 연기법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연기법의 다른 표현이다. 내가 갖고 있는 마음이 일체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내 마음 밖에서 내게 다가온 연기적 조건이, 그 조건 속에 스며들어 있는 마음들이 나의 마음을 만들고 모든 것을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체유심조’는 내 마음이 모든 걸 결정한다는 식의 관념론과 반대되는 방향의 사고라고 해야 할 것이다.(248)

 

부처라는 말에서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어떤 ‘인격’을 떠올리는 것에 대해선 이렇게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부처란, 연기법의 작용을 통찰하여 그에 응하되 내부화된 성향에 머물지 않고 그때마다 적절한 대응의 양상을 찾아내는 능력에 부여된 이름이다. 어떤 결정성도 갖지 않기에 어떤 연기적 조건에도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그런 능력 자체에, 능산적인 능력으로서의 마음이라고 했던 그런 능력에 붙인 이름이 부처다. 애초에 모든 마음이 그렇기에, 비록 내부화되어 안정적이지만 동시에 관성적인 마음의 작용을 넘어서, 관성적인 힘에서 벗어나 이탈의 선을 그리는 능력이 바로 부처다.(260)

 

 

<선불교를 철학하다 : 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

 

모든 형상 있는 것에서 형상 없음을 보면 여래를 보리라(57)

 

부처가 어떤 인격적인 능력이나 불변의 본성이 아니라 공성을 뜻하는 한, 진여의 공성을 갖는 모든 것은 잠재적으로 부처라고 해야 한다. 개나 고양이, 대나무나 기왓장도 모두 공성을 가지므로, 잠재적으로 부처이다. 즉 불성을 갖는다.(109)

 

공성이란 불변의 자성이 없음을 뜻하지만, 그건 역으로 주어진 연기적 조건에 따라 다른 ‘본성’을 가질 능력을 뜻한다. 즉 조건의 변화에 따라 자신을, 이른바 ‘본성’마저 바꾸어가는 잠재적 능력이다.(110)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이렇듯 조건에 따라 묘용을 바꾸어가는 능력, 그것이 곧 불성이다.(111)

 

진정한 ‘나’를 찾는 여행의 끝은 찾을 ‘나’가 없음을 아는 것이고, 불법을 찾는 여행의 끝은 찾을 불법이 따로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 찾을 것 없는 길을 반복하여 가게 하는 것, 그게 바로 불가능한 경전의 힘이고 찾을 것 없는 불법의 힘이다.(138)

 

유머란 남들을 웃기는 능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웃을 수 있는 능력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웃을 수 있는 여유와 유연성을 갖는 능력이고, 주어진 상황을 웃음으로 받아 넘기는 능력이다. 혹은 웃음을 위해 무언가를 망가뜨릴 줄 아는 능력, 혹은 웃음 때문에 무언가가 망가짐을 견디는 능력이다. 웃음 때문에 망가지는 것을 웃음으로 받아넘기는 능력이다.(170)

 

내가 없는 세계 속에 그렇게 내가 들어가 존재하게 될 때 발생하는 변화가 곧 나란 존재자의 존재의미다. 세계 안에서 나란 존재자가 갖는 의미는 내가 부여하는 의미나 ‘역사’ 같은 게 내게 부과하는 ‘사명’ 같은 게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 안에 내가 있음으로 인해 산출되는 효과가 바로 나의 존재의미다.(212)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고요한 곳을 찾고, 고요함을 얻겠다는 생각에서 소란스러운 것을 욕하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부처에 매인 것이고 고요함에 사로잡힌 것이다. 병 없는 삶의 욕망에 사로잡힌 것이다. 고요함을 위해 소란을 비난하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소란이고, 자신이 체험한 삼매를 자랑삼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소유욕이다. 부처가 되겠다는 욕망이야말로 최대의 탐심이고 깨달음에 대한 애착이야말로 최대의 집착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도 내려놓고 부처를 구하겠다는 마음도 내려놓으라고 하지 않던가.(355)

 

모든 생명체는 나름의 생존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다. ‘장애’라든지 ‘기형’이라든지, ‘불구’ 같은 관념은 특정한 형태의 유기체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관념일 뿐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기형’은 없다. 각자 자기 나름의 형태가 있을 뿐이다. 동시에 자연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불구’ 아닌 것도 없다. 인간은 물에 들어가면 죽고 상어는 뭍에 올라오면 죽는다. 익숙지 않은 환경에선 모두 다 불구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연은 ‘공평하다’. 우리는 그 공평한 평면 위에서, 좀 더 생명력을 고양시키려는 양상의 차이만을 가질 뿐이다.(384)

 

차별이 사라진 존재론적 평면에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아무 기준 없이, 아무것이든 그저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물을 하나의 초월적 척도로 재는 평면을 떠나 각자에게 ‘내재하는’ 각자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고, 그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평해가는 것이다. ‘내재성’의 평면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다. (390)

 

불교는 존재론적 평등성에 대한 장대한 사유의 장이다. 중관학의 공 사상은 모든 것이 연기적 조건을 떠난다면 어떤 본성도 없는 공으로서 동등함을 통찰한다. 잠재성 차원에서의 평등성을 보는 것이다. 화엄학은 모든 것이 시방삼세의 우주가 만들어낸 것이며, 인간이나 호랑이, 소나무 등 모든 존재자에 시방삼세의 우주가 깃들어 있다는 점에서 모두 동등함을 통찰한다. 현행성의 차원에서 평등성을 보는 것이다. 선은 분별을 떠날 때 모든 것이 각자의 차이 그대로 동등함을 통찰한다. 모든 것에게 각자의 것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각자가 가진 특이성과 힘을 되돌려 주는 것이다.(391)

 

어떤 것에 말려들어가거나 휘말려들 줄 모르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자기 안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말려들어갈 때 자아의 궤도에서 벗어나 이제까지 생각지 못했던 어떤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사유나 개념과의 만남은 분명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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