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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독일 비애극의 원천 마지막 부분 쪽글

은선 2014.08.14 18:01 조회 수 : 1174

저번에 못와서 아쉽습니다. ㅜㅜ


쪽글 올려봅니다. 


엠블럼으로서의 시체 



323 가장 광범위한 맥락에서 여기저기서 어쩌면 아직은 모호하고 문화사적인 느낌을 주는 방법을 통해 끌어올 수 있는 것들은 

그것들이 무엇이든 알레고리적 시각 아래서 서로 접근하고 이념으로서의 비애극으로 모여든다. 


오로지 알레고리적 구조 덕택에 비애극이 시대사적 조건으로부터 자라 나오는 소재들을 내용으로서 도화시킨다는 바로 그 이유때문에 본 논고는 비애극 형식의 알레고리적 구조를 집요하게 파고 들 수 있는 것이고, 또 파고들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이 동화된 내용은 그 내용이 해명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었던 신학적 개념들을 벗어나서는 발전시킬 수 없다. 순수하게 미학적인 고찰에서는 역설이 마지막 말이 될 수 밖에 없는 반면 비애극의 알레고리적 한계형식은 오로지 보다 상위의 영역인 신학적 영역으로부터만 비판적으로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항상 어떤 세속적인 것이 신성한 것으로 해소되는 것처럼 그러한 해소작읍을 역사와 역사신학의 의미에서 그리고 보증된 구원의 전체 질서라는 의미에서 정태적으로가 아니라 역동적으로만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크의 비애극이 질풍노도나 낭문주의와 보다 분명하게 관련을 맺지 못하더라도 그러하며, 비애극의 최상의 부분을 구제하는 일을 가장 최신의 드라마 시도들에서 절박하게 기대하는 것이 어렵더라도 아니 어쩌면 헛된 일이라 할지라도 그러하다.- 이제 이루어져야 할 비애극의 내용의 구성작업은 특히 소재상의 확인들 이외의 여타 것들은 얻어낼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까다로운 모티프들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바로크 드라마들에서 넘쳐나는 잔혹한 장면과 고문장면들에서는 대체 어떤 종류의 사정이 있는 것일까? 바로크 예술비평의 거리낌없고 성찰이 결여된 태도에 걸맞게 사료들은 이에 대해 직접적 답변을 거의 주지 못한다. 숨겨져 있지만 가치가 있는 답변은 이렇다. "인간의 몸 전체는 상징적 상속으로 들어설 수 없다. 그러나 몸의 일부는 그러한 상을 만드는 데 부적절하지 않다. 엠블럼의 규범들을 두고 벌어진 한 논재을 한 서술한 글에 그렇게 씌여져 있다. 

325

정통 엠블럼 작가의 생각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즉 인간의 신체는 유기적인 것을 부수어 그 파편들에서 진정한 의미를 고정되고 문자에 걸맞은 의미를 읽어낼 것을 명하는 계율에서 예외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 


326

순교가 살아 있는 자의 신체를 그와 같이 엠블럼적인 방식으로 요리한다면 그와 더불어 드라마 작가에게 신체적 고통이 행동의 모티프로서 항상 주어져있었단 사실도 하찮은 점이 아니다. 데카르트의 이원론만이 바로크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정신 신체학적 영향에 관한 학설의 결과로서 격정에 관한 이론이 최고도로 집중조명된다. 


신체의 알레고리화는 시체에서만 힘차게 관철될 수 있다는 점이 명약관화 하기 때문이다. 비애극의 인물들이 죽는 이유는 오직 그렇게 해서만 시체로서 알레고리적 고향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불멸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체를 위하여 인물들은 몰락한다. 


메멘토보리가 신체속에 기억 자체에 들어 있는 것이다. 중세와 바로크 시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표상으로 327 휩사여 있던 현상은 그들의 삶의 종말에 대한 생각만이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면, 전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328 17세기의 비애극에서는 시체가 최고의 엠블럼적 소도구가 된다. 시체 없이는 찬미라는 것도 거의 상상할 수 없다. 찬미는 "창백한 시체들과 함께 화려하게 펼쳐지며 폭군들의 과제는 비애극에 그런 시체들을 제공하는 일이었다. 


329


기독교에서 신들의 몸


다른 어디에서보다 이 지점에서 분명하게 중세로 소급하는 흔적들을 만드는 것은 어떤 고서 애호가적인 관심이 아니다. 왜냐하면 알레고리적 세계관이 갖는 기독교적 시원이 바로크에 대해 갖는 의미에 대한 인식은 아무리 강조해도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330 세가지 점에서 바로크의 기독교와 중세의 기독교가 객관적인 유사성을 보여준다. 이교도 신들에 벌이는 투쟁, 알레고리의 승리, 신체성의 수난이 그  둘에 똑같이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 모티프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것들은 앞으로 드러나겠지만 종교사적 관점에서 볼 때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알레고리의 원천은 오로지 그 괒점 아래서만 밝힐 수 있다. 고대의 판테온이 해체된 것이 이 원천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면 그 판테온이 인문주의에서 부활한 사실이 17세기가 그에 반발하도록 자극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많다. 


331 바르부르크는 어떻게 르네상스 시대가 천체 현상들을 인간적으로 포착하여 그것들이 지닌 마적인 힘을 적어도 이미지를 통해 제한 할 수 있었는지 탁월하게 서술했다. 

332 악마들에 대한 불안으로 말미암아 의심스러운 신체성이 아주 옥죄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미 중세에 그 신체성을 엠블럼과 같은 방식으로 제압하는 일에 과격하게 뛰어들었다. 엠블럼으로서의 나체 그 다음의 베촐트의 서술에 우리는 그렇게 제목을 달 수 있을 것이다. 


333


알레고리적 해석은 무엇보다 두 방향을 지시했다. 즉 알레고리적 해석은 고대 신들의 진정한 다이몬적 본성을 기독교적으로 확정하기로 되어 있었고, 또한 육신을 신성하게 사멸시키는 데 쓰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와 바로크가 곧잘 우상들을 사자들의 뼈와 의미심장하게 엮곤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334 알레고리의 원천 속에 있는 슬픔


알레고리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오로지 그 개념이 신학적 상징으로부터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단순한 장식어로부터도 뚜렷하게 변별되는 규정 속에서만 비애극에 부합할 수 있다. 알레고린ㄴ 고대 신들의표상에 대한스콜라 철학적인 아라베스크 장식으로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정 반대의 것이 들어 맞는다. 교회가 신들을 자신의 신도들의 기억에서 간단히 추방시킬 수 있었더라면 알레고리적 해석은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알레고리적 해석은 어떤 승리에 대한 아류적 기념비가 아니기 때문이다. 알레고리적 해속은 오히려 꺾이지 않고 살아남은 고대의 삶의 잔재를 제어해야만 하는 주문과도 같은 말이라 하겠다. 


335

이 모든 것은 물론 알레고리를 집중적으로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알레고리 자체가 여하한 종류의 신학적 본질들의 추상적 증발에 머무르지 않고 그 이상을 의미한다면 다시 말해 그 신학적 본질들이 자신들에 걸맞지 않은 심지어 적대적인 환경속에서 계속 살아남았음을 의미한다면 로마 후기의 견핸ㄴ 알레고리에 대한 본래적 견해가 이니다. 알레고리가 그 신들의 세계를 구제한 것이다. 사물들의 무상함에 대한 통찰과 그 사물들을 영원 속으로 끌어들여 구제하려는 뱌려가 알레고리 적인 것 속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프다. 


알레고리는 무상성과 영원성이 가장 가까이 무주치는 곳에서 가장 영속적으로 자리 잡는다. 우제너 자신은 신들의 이름에서 특정한 고대의 신들이 지닌 단지 겉보기에만 추상적인 본성과 알레고리적 추상화 사이에 놓인 역사철학적 경계선을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주었다 그 추상적 개념들이 거의 시종일관 그늘에 묻힌 채 마치 아무 생명도 없는 것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특별한 신들도 인격신들 앞에서 빛이 바랠 수 밖에 없었다는 데 원인이 있었다. 즉 그것은 말의 투명성 ㄸ문이다. 이러한 즉흥적 종교적 사고들을 통해 아마도 고대의 토양은 알레고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개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알레고리 자체는 기독교적이었다. 우상과 육신의 영역에서는 무상함만이 아니라 죄가 현저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비쳐져만 했단, 점이다. 알레고리적 관찰자에게만 아닜느게 아니라 관찰자 관저의 대상에도 내재해있다. 

즉 몰락한 자연의 슬픔이 그 자연을 침묵케 한다. 모든 슬픔에는 침묵에의 경향이 내제하며 이 점은 전달의 무능함이나 전달의욕의 부재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함축한다. 337


338 


서양의 알레고리적 해석의 원천에 세 가지 가장 중요한 요인들은 비고대적이고 반고대적이다. 즉 그 신들은 낯선 세계속으로 들어와 그 모습을 분명히 드러냈으며 사악해지고 또 피조물이 되었다. 올림포스적인 것의 의상이 남게 되는 데 이 의상 주의로 시간이 흐르면서 엠블럼들이 모여들게 된다. 그리고 이 의상은 악마의 육신처럼 피조물적 특성을 띈다. 이런 의미에서 에루헤메로스의 계몽된 헬레니즘 신학은 희한하게도 부분적으로는 생성되어가는 민중신앙의 요소를 보여준다. 

신들이 무력해졌다는 증명은 악마적인 대리자들이 그 신들에게서 박탈한 권능들을 전유하면서 다시 약화되었다/ 다른 한 편 엠블럼과 의상들 외 이름들이 남았으며 이것들은 자신들이 유래한 삶의 맥락들이 사라져가는 만큼, 그 속에서 이 말들이 새로운 내용 알레고리적 서술이 되도록 예정된 내용을 획득하는 개념들의 원천이 된다. 


340 고대 올림포스적 측면은 예부터 전승되어온 다이몬적 측면에서 탈취해내야 할 어떤 것이었다 


사탄의 공포와 약속들


알레고리적 관점은 기독교가 설정한 죄를 짊어진 육신과 판테온에서 체현된 보다 더 순수한 신들의 자연 사이의 대결에서 발원했다. 르네상스에 이르러 이교적인 것이 반종교개혁 시대에 들어 기독교적인 것이 새로이 활성화되면서 알레고리 역시 그 둘의 대결형식으로서 새로워질 수 밖에 없었다. 


비애극을 두고 볼 때중세는 사탄의 형상 속에서 물질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 사이의 매듭을 단단히 조이게 되었다. 무엇보다 다양한 이교적 심급들이 신학적으로 엄격히 윤곽이 잡힌 적 그리스도 하나로 집약되면서 다이몬들 속에보다 더 분평히 물질 속에 어둡고 특출한 현상이 들어있다고 상정되었다   하인리이 폰 켄트는 "뭔가 공간적인 것 이거나 점과 같이 공간 속에서 한 장소를 점유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은 멜랑콜리에 젖어 있으며 최상의 수학자들이 되지만 가장 열악한 형이상학자들이 된다. 344  바로크적 박학다식함이 비애극 문학에 대해 갖는 의미가 확인된다. 왜냐하면 오로지 지식을 갖춘 자에게만 무언가가 알레고리적으로 서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지식을 노리는 순수 호기심과 오만한 인간의 고립이 통일이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이 알레고리의 의도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때로는 폭군 음모꾼으로 유혹하는 것은 금지된 것에 대한 근거를 찾는 데서 약속되는 자유라는 가상 경건한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데서 약속되는 자립의 가상 악의 공허한 심연에서 나타나는 무한성의 가상이다. 오로지 탈 영혼화된 물질성만이 그 정신성의 고향이다. 순전히 물질적인 것과 그러한 절대적 정신성은 사탄적인 영역의 양극이다. 

346

" 단 한명의 악마가 자네 보다는 더 많이 안다네."


신비한 균형


악 자체는 알레고리 속에서만 존재하고 오로지 알레고리일 뿐이며 자체와는 다른 무엇을 의미한다. 즉 그 악은 바로 그것이 표상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폭군과 음모꾼들이 체현하는 절대적 악덕들은 알레고리들이다. 그 악덕들은 실제하지 않는다.


352 바로크 밤베르크 발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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