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올리는 후기라서 죄송합니다.
저에게 전반적으로 난이도가 높은 수업인데, 특히 5강은 더 어려웠던 것 같군요. ㅠㅠ
제가 이해했던 부분을 중심으로 해서라도 간략하게 후기를 올리고자 합니다.
벤야민은 시대사적 의미에서 폄하된 알레고리를 격상시키려고 하는데, 여기에서 알레고리는 기법이라기보다는 형세로 이야기됩니다. 알레고리 개념은 벤야민의 사상을 초기부터 후기까지 관통하며, 보들레르 론까지도 이어집니다. 오늘날 알레고리의 대표적인 예로 상품 광고를 들 수 있고요, 벤야민은 채플린 영화를 파편화, 리듬의 분절, 기계에 대한 미메시스라는 측면에서 알레고리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아름다운 가상' 혹은 '아우라'는 파괴되지요. 맑스주의 전통에서는 알레고리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데, 특히 루카치가 그러합니다. 루카치는 '부르주아의 퇴폐와 몰락' 정도로 부정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68의 이론가들에 의해 알레고리는 재구성되는데, 이는 아방가르드 실험 정신에 주목하다가 재조명된 것입니다. 대표적인 이론가로 페터 뷔르거가 있습니다.
모호하고 감각적이기 그지없는 오늘날의 상품광고가 알레고리의 예구나, 하면서 머리를 탁 치게 되었습니다.
다만, 벤야민이 상징을 완전히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적 상징은 높이 평가합니다. 단지 괴테의 의고전적 상징 개념을 반대하고 있을 뿐입니다. 감각적 대상과 초감각적 대상의 통일, 이것이 신학적 상징의 역설입니다. 의고전주의의 세속적(세계사적) 상징개념과 함께 그것의 사변적 짝인 알레고리의 개념이 동시에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의고전주의는 넓게는 르네상스 이래로, 특수한 의미로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고대의 예술을 모범으로 삼는 예술(미술) 양식을 말합니다. 이는 전체적으로 예술의 발전사를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의 몰락에 주목하는 벤야민과 알로이스 리글과 구별됩니다. 리글 같은 경우에는 로마 후기를 조명하지요.
저는 수업 이전에 교재를 읽을 때에는 신학적 상징과 의고전주의의 상징이 잘 구별되지 않았는데, 선생님이 역시 정확하게 지적해주시네요.
크로이처는 상징들의 본질을 1)순간적인 것, 2)총체적인 것, 3)그 원천을 규명할 수 없는 것, 4)필연적인 것으로 정의합니다.
이 부분을 읽다가 저는 '순간? 순간은 벤야민이 좋아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상징보다는 알레고리에 어울리는 것 아닌가?' 하고 반사적으로 멈칫했는데요, 제 생각에 여기에서 말하는 "순간"은 보편성으로의 어떤 순간적인 것이고 정지 상태의 변증법에서 말하는 정지와는 다른 개념이 아닌가 싶습니다. 크로이처도 '순간'의 속성으로 '생산적 간명함', '신적인 표지' 등을 제시하는데, 여기에서 '생산적 간명함'은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로 대응하니까 단순명료하다는 말이 아닐까요? 즉, 크로이처가 말하는 상징의 '순간'은 보편성, 총체성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그런 순간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의 짧은 생각입니다)
247페이지의 <상징에서는 몰락이 이상화되는 가운데 자연의 변용된 얼굴이 구원의 빛 속에서 순간적으로 계시되는 반면, 알레고리 속에는 역사의 죽어가는 얼굴표정이 굳어진 원초적 풍경으로서 관찰자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시적이고 멋있으면서도, 한 번에 의미 파악이 잘 되지 않는, 그런 벤야민다운 듯한 문장이었습니다. 모든 역사가 죽음과 삶의 역사고, 알레고리는 생성, 소멸까지 보여준다는 점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그리고 275페이지와 276페이지를 읽으면서, 독일 비애극이 정말로 공연이 되었는지 아닌지 역사적 진실이 좀 궁금해지는군요.^^;;
다들 더위 조심하시고, 목요일날 뵈어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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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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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
지용님도 진백님도 오독일 가능성은 거의 없음.
다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문구, "대상은 둘이다. 감각적 대상, 초감각적 대상. 밀떡과 포도주는 감각적 대상이다. 각각 성체(聖體)와 성혈(聖血)이라 한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초감각적 대상이다." 대상(사물)이 둘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대상이 서로 성질을 달리하는 모순적 양극이 공존한다는 말, 그래서 패러독스(역설)라 규정한 것. 예컨대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통일인 것처럼...
그리고 독일 비애극이 정말 공연된 것일까 아닐까하는 문제는 그 진위를 밝히기 어려움. 그런데 벤야민은 공연을 위한 연극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임. 알레고리에 비추어 보면 공연되었는가 아닌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공연이 안된 드라마라 하면 그것은 '연극적인 것(스펙터클)'이라기 보다는 '독서용' 드라마라는 것인데, 말하자면 시각성을 강조한 보는(감각적) 드라마라기 보다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읽는(로고스적, 이성적) 드라마라는 규정이 성립할 것임. 하지만 벤야민의 알레고리 입장에서 보면 이성적 드라마가 아니면서도 '독서용 드라마임. 왜냐하면 알레고리는 다르게 말하기일뿐만 아니라 다르게 읽기(해석학적 전통)이기도 하기 때문에. 다만 시각적 세계(이미지계)를 읽을 수 있는 자는 모든 일반 관객은 아닐 것임. "특권"을 지닌 관객이란 결국 텍스트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다르게 읽은 소수의 몇몇 사람들일 터인데, 이들은 아마도 '자연을 책처럼' 읽을 줄 알았던 바로크인일 것임.
하고, 그것이 미사
1. "각각의 감정은 어떤 선험적 대상과 결합되어 있으며 이 대상의 서술이 각 감정의 현상학이다"(209). 감정은 "운동성이 있는 반사적 태도로서 구체적으로 구조지어진 세계에 대답"(210)한다. "비애극을 지배하는 법칙들이" "서술하는 것은" "경험적인 주체에서 벗어나 풍부한 대상에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감정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다"(210).
대상은 둘이다. 감각적 대상, 초감각적 대상. 밀떡과 포도주는 감각적 대상이다. 각각 성체(聖體)와 성혈(聖血)이라 한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초감각적 대상이다. 미사 가운데 성변화가 일어나면 밀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 이것이 텍스트가 말하는 감각적 대상과 초감각적 대상의 통일이자 신학적 상징의 역설이다. '성체', '성혈'이 신학적/신앙적 상징이다.
2. 신학적 상징의 역설은 현상과 본질의 관계와는 전혀 다르다.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예술작품에서 어떤 '이념'의 '현상적 나타남'이 '상징'으로 언급되"(238)면서 "'상징'개념을 통속적으로 사용하는 관행", '상징'개념의 남용이 일어난다. 그 결과 "진정한 상징개념과는 명칭 이외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어떤 상징개념을"(237) "끌어들였다"(237). "형식과 내용이 분리할 수 없게 결합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이 상징개념이, 변증법적 단련이 부족한 탓에 형식분석에서는 내용을 내용분석에서는 형식을 놓치는 무능함을 철학적으로 미화시키는 데 이용되"(238)었다.
3. "표지들"(243). "상징을 이념들의 표지, 그 자체로 완결되고 압축되어 있으며 언제나 자체 속에 머무는 표지로 여기고, 알레고리는 같은 이념들에 대한 모사, 연속적으로 진행해 나가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스스로 물줄기를 이루고 드라마틱하게 움직이며 흘러가는 모사로 인정하는 설명으로 온전히 만족"(246).
상징이냐, 알레고리냐. 결국 '이념'을 둘러싼 각축이다. 여기서 다시 철학의 두가지 근원적 과제, 현상의 구제와 이념들의 재현(참44)으로 돌아간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념은] 현상에 도달하는가? 현상들의 재현 속에서.(참45) 그 재현이란 ? [대체로] 알레고리적 재현/표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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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제가 읽은 바입니다. 오독일 가능성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