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스님의 차라투스투라 강의를 들으면서 니체와 더불어 불교철학, 생물학이 다양하게 연결되면서 난해한 텍스트가 풀리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
1월 19일 강의에서는 차라투스투라 2부에서 밤의 노래 - 춤에 부친 노래 - 만가 (무덤의 노래) - 자기극복에 대하여 장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장 제목은 책세상판에서 따왔습니다)
사실 강의에 오기 전에 친구와 얘기하다가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둘이서 결론을 내렸었습니다. ㅎㅎ
늘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은 무언가를 바라는 인간의 마음이 현재를 고통스럽게 느끼게끔 하는 것이겠지요.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요.
이런 얘기를 하고 나서 정화스님 강의가 드디어 시작되었는데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춤에 부친 노래 장에서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알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나를 둘러싸고 생각에 잠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왠일인가! 차라투스트라여! 너는 아직 살아 있는가?
무슨 이유로? 무엇을 위해? 무엇으로써? 어디로? 어디에서? 어떻게? 아직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아, 벗들이여. 내 속에서 그런 물음을 던지는 것은 저녁이다. 나의 슬픔이여, 나를 용서하라!
저녁이 되었다. 용서하라. 저녁이 된 것을! (책세상판 179쪽)
오늘의 화두는 이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녁이 차라투스투라에게 물어보는 것처럼, 인간은 저녁이 되고 밤이 되었을 때 낮에는 떠오르지 않았던 질문들과 만나게 된다는 것이죠. 책에는 저녁이 차라투스투라에게 물어보지만,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는 그런 질문이 아닐까요. 인생을 고해로 만드는 것은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밤이라는 시간이 왔지요.
그렇지만 이것이 단순히 무의미한 고통일까요. 차라투스투라는 오히려 밤이 되고, 고통스럽고, 마침내 죽어서 무덤에 들었을 때, 이 무덤을 새로 깨고 나오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인간이 생명체로 내부에 지니고 있는 다양한 모습들이 밤이 되어 올라와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 때,
이 질문들이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들어 "더 이상 이전에 살던 것처럼 살 수 없다고 깨달았거나, 살고 싶지 않다고 느꼈을 때"
인간은 이런 깨달음을 지혜로써 어렵게 받아들여, 이전에 자신이 알던 자기 모습을 죽이는 무덤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무덤에 들고 난 후에 어떻게 해서든 이 무덤을 깨고 이전과 다른 사람으로 부활하는 게 생명의 지혜라고 정리할 수 있었지요.
흠, 이건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인데? 라고 생각하는데 스님께서 딱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신약에서 다루는 예수의 일대기나 니체를 대변하는 차라투스투라는 모두 일단 "죽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나 차라투스투라나 인간에게 늘 변하는無常 생명으로써 "무덤을 깨고 나오는 자", 변해가고 있는 생명이 되기를 권하는 거라고 할 수 있지요.
차라투스투라가 말하는 생명의 지혜는 "보라, 나는 항상 스스로를 극복해야 하는 존재라는 비밀을" (책세상판 190쪽) 이라는 문장에 압축되어 있죠.
이런 맥락에서 정화스님이 하신 말씀을 인용하여 이 횡설수설 후기를 마무리하면 저는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자"가 되어야겠다고, "현재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자"로 살면서 "고통스럽게 나의 무덤을 깨보자" 라고 강의를 끝내며 또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약 2년 전에 정화스님이 수유너머N에서 베르그송 강의를 하실 무렵에 저는 "다르게 살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하는 그런 고민? "이전에 살던 것과 정말 다르게 살고 싶다"라는 강한 의문이 있었고, 그 결과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공부하러 갔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대학원은 무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만... ㅋㅋ
이제 무덤에서 나와야 할 때가 가까워지면서, 사실은 하루라도 빨리 이 답답한 무덤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2년 전에 내가 가졌던 다르게 살고 싶다 라는 "가시지 않는 갈증, 욕망"이 무엇이었나를 차라투스트라와 정화스님의 강의를 통해 되새김질 하고 있습니다. ^^ (역시 정화스님 강의 좋아요~)
진희 샘! 헤헤
진희 샘 맘 속에 숨어 있는 '장난 끼 많은 괴물'이 어여 꿈틀대기를..ㅎ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