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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 강좌 후기] 4.18 후기

멜로디 2014.04.25 02:30 조회 수 : 1323



"맑스를 위하여" 마지막 후기입니다^-^


2014/04/18 

 맑스주의와 인간주의


1. “인간주의라는 개념은 이데올로기적 개념이다(267)”


-       포이어바흐의 관한 테제 여섯 번째 테제에서 맑스는인간의 본질 대한 규정에 관해 언급하며 포이어바흐의 인간주의에 대한 관점을 비판한다. 포이어바흐는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이미 규정 전제하고 있는데, 맑스는 이를 거부하면서 인간을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 사회적 관계들의 집합 혹은 총체(totality 아니라 상이한 것들이 모여있다는 의미에서/ ‘이미 주어진구조화된 복합적 전체 참고할 것)라고 보았다. 말하자면 사회적 관계들이 변하면 인간 본질도 변한다고 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관념론(칸트, 헤겔)에서의주체 실천도 사회적 관계로 실천을 보았던 맑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맑스는 실천 그 자체로써 물질적 과정을 드러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       알튀세르에게 인간주의라는 개념은 기본적으로 과학이 아니다. 인간주의는 이데올로기적 개념이다. 그런데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주의현실적 인간주의로서, 이데올로기이기는 하지만 이론이 개입해 들어가야 할 지점을 지적해주는 신호로서의 역할을 하는 실천적 개념이다. ‘현실적 인간주의가 실천적 개념이라는 의미는 이데올로기 장 안에 속하면서, 과학이 분석해야할 대상을 지시해주는 묘한 위치에 있음을 뜻한다. 한편, 과학적 이론이 생산될 때 그것은 스스로는 소멸하는 성질을 가진다.



 

2. “사람들은 이데올로기를 산다


-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와 인간주의’(맑스를 위하여 중)라는 에세이에서 이데올로기에 대해 거의 처음으로 언급한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잘못된 관념 혹은 환상 등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는 주체subject가 살아가는 방식, 삶의 방식이라며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점을 전환시킨다. 이데올로기를 현실에 대한 왜곡 혹은 환상으로 파악하는 관점(맑스주의에서의 이데올로기, ‘허위의식’)을 비판하면서, 심급의 접합으로 물질적 과정을  출현시키려 했던 맑스의 실천을 따라 이데올로기를 잘못된 인식이 아니라 하나의 물질적 실천으로 사고하려고 했다.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는 인식론적 차원이 아니라 존재론적, 사회적 실천으로 파악된다.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실재 조건에 대해서 개인이 맺는 상상적 관계에 대한 표상(표상들의 체계)이라고 본다. 실재 조건에 대한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자신이 실재와의 관계를 다시 재현하는 어떤 모드가 있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방식으로 그것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를 파악하게 되면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반영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양식의 문제가 된다.


 

3. 이데올로기의 경제적 기능


-       이데올로기가 하는 역할은 개인을 특정 기능을 수행하도록 데려다 그 자리에 집어넣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능들 자체는 비어있는 장소이다. , 그 장소에 누가 들어와도 상관없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기능‘who’라는 질문에 무관심하다. 그런데 이데올로기는 개인이 특정 기능을 수행하는 자리에 들어갈 때 나는 숙명적으로 이런 일을 하도록 태어났다는 식으로 정체성을 확립하여 들어오도록 만든다.  예를 들어,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나는 삼성의 직원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미국의 중국식당의 fortune cookie는 이데올로기의 이러한 조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쿠키를 쪼갰을 때 나오는 메시지를 마치 신으로부터 오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현상은 이데올로기가 일으키는 목적론적 환상으로,  목적론적 환상(이데올로기의 조작)에 의해  ‘who’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이데올로기적 호명). 경제적 기능들을 실재적 조건이라고 한다면 이데올로기가 실재적 조건을 경험하는 모드를 만들어줌으로써 마치 자기 고유성을 만드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그런 담론적 문화적 실천을 fortune cookie와 같은 장치를 통해서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알튀세르는 노동자가 실재적 조건을 체험하는 방식이 이데올로기적이라며, 착취를 당할 때조차 자신이 자유롭게 계약하고 일한다는 환상을 갖고 살아간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데올로기적 체험은 프롤레타리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이 아니라 부르주아지도 해당되며 그들은 이데올로기 속에 살면서 그것을 생산한다.

 

 


4. “이데올로기의 바깥은 없다  그러나


-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에는 바깥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에서 그는 과학에 대해서는 이데올로기가 항상 바깥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과학이 제대로 형성된 사람에게는 이데올로기적 혼동이 있을 수 없다며,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분리시킨다. 누군가를 이데올로기 속에 있다혹은 있었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말하는 사람이 과학 속에 있어야 한다. ,  이데올로기(안에 있는 사람들)는 그것의 입장에서 보면 바깥이 없지만, 과학과 현실의 입장에서 보면 바깥 밖에 없게 된다.



 

5. 이데올로기적 오인 vs 과학


-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의해 형성된 주체(subjectification에 의한 subhect)타율적성격을 지닌다. 마치 기독교인이 강제를 계기로 믿음을 형성하듯이 타율성의 계기로만 이데올로기적 주체가 형성되는데, 타율성의 강제로 형성된 주체는 자신이 신을 믿기 때문에 기도를 한다고 뒤집어 생각하며 자신의 믿음을 자발적 믿음이라고 오인한다. 이렇게 믿는 순간 그 바깥에 있던 강제적, 타율적 장치들이 그의 의식 속에서 사라지게 되고 믿음만이 남게 된다. 그는 그 믿음을 본래적인 것으로, 충만한 것으로 인식한다. 에셔의 서로를 그리는 손의 인과관계처럼, 자기가 자기를 야기하는 영원한 이데올로기적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바깥은 없다. 그에게 남는 것은 끊임없는 원환 운동만 있게 된다. 여기에서 바깥은 애초에 강제했던 장치들 이다.

-       과학은 이와 달리 바깥을 가지고 와서 현실 사회를 설명한다. 그런데 인식론적 단절 이후 생긴 개념 concept(과학적 개념)이 과학적인 것이지 개념을 둘러싼 담론 전체가 과학적인 것은 아니라는데 유의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의 비가역성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과학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담론 때문에 깨끗한 단절은 있을 수 없다.

 


6. 토픽 topique과 인식론적 단절


-        심급들 사이의 관계를 사고 하는 것을 ‘topique’라고 한다. topique는 원래 ‘topos’(고대 그리스의 장소’)에서 온 말이다.  topos암기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가 소피스트들이 등장을 하면서 수사법의 용어로 바뀌었다. 칸트는 topik을 오성, 지성 등을 분류하는 장소적 개념으로 사용했고, 프로이트도 무의식과 의식을 나누는 장소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 알튀세르는 topique을 심급들의 장소적 개념으로 사용했다. 알튀세르의 topique은 인식론적 단절의 효과에 의한 것이고 이에 종속된 것이었으나, 후기에 그는 topique에 인식론적 단절이 종속됐다고 말을 바꾼다.

-       알튀세르는 인식론적 단절로 과학적 지식을 생산했을 때조차 그것이 그대로 과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심급들 안에, topique안에 이데올로기가 재기입된다고 보았다.

 

<토픽>

   

이데올로기 ------------인식론적 단절----------------→ 역사과학 (심급들)

                    ←------------재기입------------------------

 

이론은 이중적 장소를 가진다. 이론은 과학적 장소를 갖지만, 이데올로기에 다시 기입되기 때문이다.

토픽에서 이론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관계를 보면, 이데올로기에서 이론으로의 계속되는 단절(절단)을 통해서 현실과의 접촉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현실과의 완전한 접촉은 투명한 인식이 불가능하므로 불가능하다(완전히 과학과 현실의 입장에 있지 않는 한) .  토픽의 계속되는 단절은 결국 엄청난 이데올로기적 담론의 층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닐까???

 

 

 

7. 알튀세르는 플라톤주의자(?)

 

1) 스피노자의 인식의 3단계

 

   1종 인식   상상적인 것      경험적으로 알되 원리에 대해 무지

   2종 인식 지성 understand  인식론적 단절로  원리를     이해하는 단계

   3종 인식 직관지     개별적, 특이한 본질을 직관적으로 아는 단계

 

 

2) 플라톤의 cut

 

-       국가론에서 cut 언급

-       플라톤이 이데아 :  idea간의 cut, 인식론적 단절과 관련된 사고의 기원


-       지식(episteme)와 의견(doxa)를 구분


 지식

. noema 철학      직관지 /  변증법적 실천을 통해 기원을 향해 나아간 단계

. logos 오성         최초의 공리, 그러나  기원의 증명이 되지 않음

 

              의견

. 확신 (사물)

. 추측(예술, 재현, 시물라크르)

 

 

3)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주의자였고 그런 한에서 플라톤주의자였던 것. 그러나 이론적인 관념을 정치적 효과에서 사고하고 실천해야 했기 때문에 점점 더 진리의 작용에서 멀어지고 미로 속을 헤메게 되는 처지가 됨. 발리바르는 알튀세르가 심급에 이론과 이데올로기가 이중기입된다는 관점을 갖게 되면서, 진리의 영역으로 가는 플라톤과는 달리 동굴 속으로 미로를 헤매야했다며 알튀세르가  플라톤주의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다고 전함. 후기 알튀세르는 인식론적 단절이 심급(혹은 토픽)에 종속 된다고 보고 다시 복잡한 사고 속으로 들어간 것.

 

 

질문) 과학이라는 개념을  끝가지 가져가나?

- 과학의 비가역성은 끝까지 가져감.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여 침묵하소서라는 에세이의 마지막 부분에서 알튀세르 추론을 쫓아가면서 진리가 소멸할 수도 있다라고 결론 지음. 진리(과학)은 비가역적이라고 사고했는데, 알튀세르 논의를 계속 따라가다보니까 진리가 소멸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고 언급. 이 에세이는 문제적 에세이이기도 함. 어쨌든 끝까지 비가역성을 포기했다고 보고싶진 않으나 자기 해체적인 차원으로 많이 간 것 같다. 정세 속에서 사유하는 과정에서 과학에 대한 생각이 후기로 갈수록 바뀐 것으로 보임.

 

 

8. 과잉결정을 통한 이데올로기적 호명

-       

   -     -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가 평소 이상의 대단한 충성심을 요구하는 시기가 있을 때(과잉결정의 시기), 주체는 이데올로기적 호명을 마치 자신이 선택해서 그런 것인 양 뒤바꾸어 생각할 수 있다. 알튀세르는 평소에는 이데올로기적 호명을 특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떤 시기(월드컵, 김연아 혹은 국가 안보적 위기의 상황 등등)에 이데올로기적 주체가 형성되면서 국가나 소속 집단 등에 충성을 다하는 현상은 '과잉결정'을 통해 이뤄진다고 보았다. 평소에는 무의미한 실천들을 하며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어떤 사건등을 통해서 그것이 자기자신의 문제가 되어버리는 과잉결정의 시기가 있다는 것이고, 이렇게 보면 혁명도 애국도 과잉결정이 되어야 나타나는 것.

 


9. “이데올로기는 역사는 없다

-       

       -   이데올로기는 전후 변화는 있으나, 진전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개별적 이데올로기는 나타났다 사라지고 변하기도 할 수 있지만 이데올로기 일반은 역사를 가지지 않고 계속해서 뱅글 뱅글 돌고 있다.

 

-        -   발리바르는 '경제도 역사를 갖지 않는다'고 본다. 마치 경제가 실재이고 이데올로기가 상상인 양 얘기되는 느낌이 있으나 그렇지 않다고 본 것. 오히려 이데올로기, 경제 등 여러가지 복잡한 심급 전체가 실재라고 생각했다. 알튀세르에게 경제는 역사라고 사고하는 면이 있었는데 발리바르는 경제도 역사를 가지지 않는다고 본다. 생산력의 발전은 있어도 그것을 역사, 전진이라고 보지 않는다.

 

 

10.  구조의 알튀세리앙 vs 정세의 알튀세리앙

-      

        - 과잉결정을 전면화시키는, 정세를 중요시하는 경향(레닌의 당면시점의 차원에서 논의)과 구조를 중심에 놓고 사고 하는 경향 간의 갈등.

-       - 구조의 알튀세리앙과 최종심급: 최종심급이 구조를 보장하므로 구조는 최종심급이 없으면 구조를 생각할 수 없다.


-       - 정세의 알튀세리앙과 과잉결정: 구조 혹은 최종심급을 없애고 균등한 방식으로 사고하면서 과잉결정만 남기려는 경향.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라클라우, 무페의 최종심급에 대한 비판.


-       - 라클라우와 지젝의 갈등: 계급적대에 대한 관점 차. 계급적대에 중요성을 부과해야 한다고 보며 그것이 개별성과 동시에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지젝의 논의는 알튀세르의 최종심급의 논의로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라클라우는 정세에 중심을 두는 쪽이기 때문에 계급적대를 중심으로 두는 것은 환원주의라고 비판하는 것.

 


11. 발리바르의 대안, “두 개의 토대

-     

         -  알튀세르는 최종심급론을 끝까지 가져가지 않고 폐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마주침의 유물론을 펼침. 후기 알튀세르에게는 과잉결정이 전면으로 들어온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구조 유물론이 아니라 정세의 유물론으로 갔다고 볼 수도 있다. 알튀세르가 최종심급을 폐기하면서 동요했던 것에 대해 발리바르는 대안을 제시한다. 경제 하나의 토대가 아니라, 경제라는 토대와 이데올로기라는 토대, 즉 두 개의 토대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경제만큼 물질적인 것이고 어떤 상부구조가 아니라는 것. 그럼 상부구조는? 정치. 정치는 여전히 상부구조. 이데올로기라는 상징과 상상적인 질서가 있다면 이것 또한 경제만큼이나 물질적인 규정력을 가지고 있다고 본 것이다. 발리바르는 두 개의 토대가 정치를 떠받치고 있다고 보았고, 정치의 3가지 개념이 있다고 말한다.

 

-            <정치의 세 개념(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의 첫 챕터)>

1.      (1) 해방의 정치 : 자기 자신과 관련있는 정치 정치의 자율성 / 랑시에르?

2.      (2) 변혁의 정치 : 경제와 관계있는 정치,  정치의 타율성 / 맑스(정치의 진실은 경제에 있다), 푸코(진실은 권력관계 속에 있다), 네그리 등

3.      (3) Civilite (시민공존 or 시민다움 or 시민윤리):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정치. 타율성의 타율성(2번이 다시 타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 상징적 폭력들에 대한 부분들/아감벤, 지젝, 바디우 등

 

è 발리바르의 구조의 핵심은 경제적인 인과성(2)이 있고, 그와 별개로  이데올로기적 인과성(3)이 있다는 것. 프로이트- 맑스주의는 이 두 가지(2번과 3)를 종합하는 보편적 인과성을 찾는다. 이데올로기와 경제를 포괄하는 보편적 인과성을 발견하면 마치 현자의 돌처럼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생각. 라이히, 지젝 등 프로이트-맑스주의의 시도들은 보편적 단일한 인과성을 찾으려는 시도들로 보임. 그러나 발리바르는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함. 왜냐하면 두 개의 토대의 인과성은 너무 다르니까. 그럼에도 경제적 인과성이 작동을 할 때는 이데올로기적 인과성을 통해서만 작동하고, 이데올로기 또한 경제를 통해서 작동한다며 이중적 인과성을 설명. 그런데 이중적 인과성이 독자적 완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타자의 인과성을 통해서 작동하며, 자기 완결성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둘 다 역사가 없다’. (경제나 이데올로기나 항상 타자의 인과성을 통해서만 작동하므로 역사는 없다.) 이렇게 보면 정세와 구조가 대립했던 관점이 변함. 정세는 경제와 이데올로기 사이에 위치한다. 구조 또한 없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구조와 이데올로기적 구조 두 가지가 있고 그것이 역사 속에서 마주치면서 아주 독특한 정세를 만들어내게 된다. 이것은 이 상태에서 보면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이것이 추상적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역사 속에서 경제적 인과성과 이데올로기 인과성의 마주침을 발견해 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 가지 인과율이 어떻게 작동을 하는지 분석하는 것이 과제가 된다.

è 이데올로기적인 사회적 유대 양식과 경제적 교환의 양식, 두 토대  사이의 마주침의 관점에서 정세를 파악한다면, 경제적 인과성으로부터 사회적인 인과성을 만들어 낼 수 없게 된다. 알튀세르가 경제의 토대로부터 상부구조적 국가가 나온다는 관점을 벗어나기 위해 최종심급을 만들고 후에 폐기하던 동요들을 발리바르는 두 개의 토대와 둘 사이의 관계로써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이제 단 하나의 국가 형태를 지니지 않아도 되며, 민족국가가 아닌 다른 형태로 결합하는 자본주의 국가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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