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제가 후기쓰는 방식은 지금까지 배운 것을 정리하는 것이었는데..
아직 2주차밖에 되지 않아서 그런지 개념들 간의 연관관계가 머리 속에 확 자리잡히지 않아서, 지금까지 배운 것을 정리하기에는 제 능력이 부족하네요.
그래서 그냥 이번 후기에서는 내용 정리보다는 수업을 들으면서 의문점을 몇 개 던지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1.) 자기성과 이야기성의 차이는 정확히 무엇인가요?
- 자기성은 자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주체의 영속적인 운동을 가리킵니다. 저번 강의 시간에 제 질문에 대한 선생님의 답변을 상기해보면, 자체성은 인간을 '자연'으로 고정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기에 일종의 명사라고 말할 수 있고, 반대로 그러한 고정화랑은 별개로 인간을 인간이게끔 만드는 운동이 자기성이기에 그것은 동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두 항을 연결시켜주는 것이 이야기성이라고 말하셨구요. 그렇다면 이야기성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끊임없이 차이의 반복을 일으키는 주체를 문법을 바탕으로 하는 언어로 포획하는 것이 이야기성인가요? 그렇다 함은 이야기성은 인간의 표현의 영역 중에서도 특히 기표적(혹은 의미적)인 기호체제를 가리키는 것인가요?
2.) 이야기성이 신체를 살로 만드는 것인가요?
- 선생님은 1주차 때 개체성과 개별성을 구분하시면서 신체들의 움직임을 개체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러한 신체적인 움직임이 상식을 통해 하나의 계열로 묶일 때 그것을 개별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맞나요...??ㅠㅠ). 그럼 개체적인 것은 아직 비신체적인 것으로 포획되지 않은 순수한 신체적인 것의 움직임일텐데.. 그것을 살로 엮어내는 것은 무엇인가요? 일단 2주차 페이퍼 4쪽에 보면 리쾨르 인용문에서 보면 '언술이 물질적 신체의 운명을 고유한다'라는 문장이 있긴 한데.. 이 언술이 이야기성을 가리키는 것인가요? 그리고 이 이야기성을 통해 어떤 의미가 구축되는 것이고, 그때 이 이야기성으로부터 배제된 것이 생겨나고, 그 배제된 잔여적인 것을 새롭게 구제하는 것이 또 해석이고.. 뭐 이런 것인가요? 저는 일단 이 이야기성이 어떤 기표적(의미적)인 기호체제인 것으로 보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성은 '상식'(bon sens)과 동일한 외연의 개념인 것 같은데.. 맞나요....??ㅠㅠ
일단 크게 제 질문은 이 두 가지입니다. 역시 질문하는 것도 능력이네요.. 정말 모르면 뭘 질문해야할지도 모른다는데.. 아직 저는 능력이 부족해서 총괄정리는 커녕 질문조차 제대로 정리되지 않네요. 이 후기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는 것으로 마지막은 마치면서.. 선생님께 하나만 부탁을 드리자면요.. 수업 때 조금만 사례들을 언급해가시면서 내용을 전개해나가주시면 안될까요??ㅠㅠ 개념들의 치밀한 전개를 글이 아닌 듣기로 따라가는 것이 조금 벅찰 때가 있더라구요..ㅠㅠ 잠깐 내가 쉬어갈 수 있게, 조금씩 재밌는 사례를 첨부해주시면서 설명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이상으로 후기 마치겠습니다!
질문을 늦게 확인했네요~~ 죄송^^
1. 자기성과 이야기성의 차이는 정확히 무엇인가요?
일단 ‘기표적인 것’과 ‘의미적인 것’은 다릅니다. 특히 의미에 대한 논의는 다음 시간에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이어갈 텐데요, 의미는 늘 ‘사건’과 함께 가지요. 기표적인 것은 언제나 사건을 숨깁니다. 그와 함께 의미도 감추지요. 하지만 기표가 없으면 의미도 사건도 스스로를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문법은 이러한 사건과 의미의 표현으로서 기표들을 구조화하는 매개에 해당되지요. 이야기성은 문법의 층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그 문법적인 층을 시간성으로 가져갑니다. 그래서 그것에 시간성의 차원을 부여하지요. 이것은 언술 내부에 어떤 것을 지칭하는 특성과 더불어 어떤 역사적 지향성과 연속성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지칭은 주체와 대상이며, 역사적 지향성과 연속성은 동일성입니다. 따라서 이야기성은 문법적 차원에 시간성을 도입함으로써 주체의 동일성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체의 동일성은 우리가 배웠다시피, 자기(ipse)와 자체(idem)를 오가면서 생겨납니다. 이야기성은 이 왕복운동을 구성하는 것이지요. 주의해야 할 것은 질문 중에 ‘주체를 포획한다’는 것이 나오는데, 이 말은 이미 주체의 실존을 전제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리쾨르에게 주체는 최종적인 것입니다. 이야기성을 통해 최종적으로 ‘전유’되는 것이지요. 인간은 주체성이기 이전에 자기성이며,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성의 양상은 늘 운동하는 것이며, 동사적 특성을 띄는 것입니다. 반면 자체성은 그것이 자기성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연, 즉 필연성을 띱니다. 저는 이 자체성을 인간의 유한성이 가닿지 못하는 것, 하지만 그 유한성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인 것, 다시 말해 ‘죽음’이라고 봅니다.
2. 이야기성이 신체를 살로 만드는 것인가요?
우선 거칠게나마 분류하자면, 개체성(individualité)은 신체(corp)와 개별성(individuel)은 살(chair)과 상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용된 리쾨르의 말 “언술이 물질적 신체의 운명을 공유한다”는 것은 언술이 가지고 있는 물질성(예컨대 목소리라는 음성적, 물리적 엔터티)이 곧 ‘신체’와 함께 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리쾨르가 말하는 ‘신체’는 거기 주석 5에도 있다시피, 저의 논의 선상에서는 ‘살’에 해당됩니다. 즉 이미 ‘개별화’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개별화된 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이야기성’인가? 이게 중요한 질문으로 보입니다.
결론을 이야기 하자면, 이야기성이 가지고 있는 물질적 신체성이 ‘살’의 한 ‘국면’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국면이 있는데, 그것이 사실 더 중요합니다. 저는 그것을 들뢰즈와 더불어 ‘의미’ 즉 ‘사건’이라고 봅니다. 비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하나의 개별성(이것을 ‘개성’이라고 봐도 무난합니다)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이야기성의 씨줄과 사건(의미)의 날줄이 교차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 다른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올랭피아》가 우리의 감각과 지각을 거쳐 하나의 ‘그’ 작품이 되는 사건의 시간과 이런저런 그림들 중에서 우리가 왜 ‘이’ 그림을 택했으며, 또 그것을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했고, 우리 각자가 무엇을 그 그림으로부터 의미화했는지를 음미하는 이야기의 시간이 하나의 공간을 만날 때 《올랭피아》는 바로 ‘그것’, 즉 개별적인 것이 됩니다. 두 개의 시간과 하나의 공간이 만나는 그 ‘점’이 바로 ‘개별성’이고 ‘살’이지요.(뒤에 이야기하겠지만, 이 ‘점’에서 우리는 ‘사건 자체’를 만나지는 못합니다. 사건은 ‘점’이 아니라 ‘모나드’기 때문이지요.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해보도록 합시다.)
3. 강의에 철학 개념이 소나기처럼 쏟아지지요? ^^ 제가 더 노력해서 되도록 사례들을 많이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