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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논문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니체는 제3논문에서 예술-철학-종교-과학이 금욕주의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드러낸다. 1논문 그리스도교의 심리학에서 ‘원한의 정신’을 / 2논문 양심의 심리학에서 ‘양심의 가책’을 거쳐 / 3논문 성직자의 심리학에서는 ‘금욕주의적 이상’에 도달했다. 먼저, 금욕주의적 이상은 원한의 정신과 양심의 가책의 복합체이자, 이것들이 실존할 수 있는 방식들이다. 특히, 금욕주의적 이상은 원한의 정신과 양심의 가책 배후에 있던 하나의 충동을 드러내는데, 바로 허무주의이다. (*3논문은 ‘하나의 잠언(#1)과 이것에 대한 주석(#2~28)’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_《도덕의 계보》서문)
 
  [1] 허무주의, ‘허무에 대한 의지’   (아포리즘 #1)

금욕주의는 종말의 의지이며 데카당스(자기파괴적 퇴폐주의) 이상임에도 불구하고, 금욕주의의 거대한 힘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공허에 대한 공포’(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를 대신하는 ‘허무에 대한 의지’(무를 의욕하는 것)로부터 금욕주의가 힘을 얻는다.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금욕주의가 인간에게 그렇게 많은 의미(예술가들, 철학자들, 성직자들, 생리적 장애자들에게 갖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는, 인간의 의지가 지닌 ‘공허의 공포’가 표현되어 있다. 인간의 의지는 하나의 목표가 필요하다. 인간의 의지는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허무를 의욕한다. 즉 인간은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허무를 의지한다. 인간은 그토록 의지의 동물이다! 도덕의 계보학은 이러한 인간의 의지를 해석하는 작업이다. 인간에게 금욕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허무를 의지하게 되었는가? 다음은 금욕주의에 표현된 의지의 유형들이다.
 
  [2] 예술가의 경우 :: ‘예술가들에게 금욕주의는······’   (아포리즘 #2~5)
“예술가들에게 금욕주의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거나, 너무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바그너가 용기있고 쾌활했던 시절 <루터의 결혼>은 순결과 관능을 동시에 찬미하는 것이었지만, 바그너가 만년 <파르지팔>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순결과 관능의 불쾌한 대립이었다. 바그너는 포이어바흐의 ‘건강한 관능’을 부정하고, 전향ㆍ개종ㆍ부정ㆍ기독교ㆍ중세를 설교하고 작품의 테마는 구원이 되었다.

바그너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 먼저, 바그너가 완전무결한 예술가의 욕망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완전무결한 예술가란 실재적ㆍ현실적인 것과는 동떨어진 존재인데, 바그너는 이러한 영원한 비실재성과 허구성에 절망하여 금지되어 있는 것에 손을 뻗어 현실적이 되고자 한다. 완전무결한 예술가는 예술가의 불완전한 욕망인데, 늙어버린 바그너도 이 같은 불완전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예술이 허구가 아니라 현실이 되고 싶어하는 순간, 그는 철학의 가치평가를 필요로 한다. 다음, 예술가 바그너가 철학자 쇼펜하우어를 자신의 보호벽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바그너는 음악을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했으나, 이제 쇼펜하우어의 철학으로 음악의 가치상승이 이루어져 음악가는 신탁을 전하는 자ㆍ저편 세계의 전화기가 되었고 금욕주의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3] 철학자의 경우 :: ‘철학자에게 금욕주의는······’   (아포리즘 #6~10, 12)
“철학자들에게 금욕주의는 더 높은 정신성에서 가장 유리한 조건을 찾는 후각과 본능 같은 것이다.”

먼저, 쇼펜하우어는 미적 관조=금욕주의를 통해 의지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는 칸트의 ‘미적 관조’를 성적인 관심을 억제하고 의지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해석하여, 금욕적 가치를 표명했다. “의지에서 해방되는 것은 오직 미적 표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미적 관조의 순간이야말로 보잘 것 없는 의지의 충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다음, 철학자의 금욕주의는 최고의 정신성을 이루기 위해 유리한 조건을 찾는 본능적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철학자들에게는 특유의 관능에 대한 과민함/악감정과 금욕주의에 대한 편견/애착이 있다. “철학자라는 동물도 최대한의 힘의 감정에 이르는 최선의 좋은 조건들을 본능적으로 추구한다.” 철학자들은 ‘예민한 후각’으로 결혼이나 자식 같은 방해물들을 미리 알아차리고 피하거나, ‘부자유를 거부하고 황야로 떠나는 결단’을 택한다. 철학자들의 금욕주의에는 청빈ㆍ겸손ㆍ순결이라는 3개의 거창한 수식어가 있다. 이것은 최선의 생존과 생산성을 위한 조건들이지, 덕과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한편, 금욕주의는 철학의 출현형식이며 존재조건이다. 철학은 금욕주의의 ‘걸음마끈’을 잡고서야 비로소 걷는 법을 배웠다. 철학자는 사유의 양식을 금단의 땅에서 찾는 자로서, 철학자가 지니고 있는 충동-덕-이성은 오랫동안 도덕과 양심의 요구에 역행했다. 철학자들은 ‘인과성이라는 거대한 그물망 뒤에 숨은 목적이나 윤리라는 거미’와 싸우려 들었으며, 영혼조차 해부하려 들었고, 병이나 악덕에서조차 뭔가 긍정적인 것을 발견하려 들었으며, 법이라는 금지에 대해서도 복종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철학자와 같은 ‘명상적 인간’은 자신들에 대한 경멸과 불신을 물리치고 외경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한 잔인성과 독창적인 자기 거세’라는 금욕주의의 강력한 수단을 썼다. 철학자들은 세계 부정적이고 삶을 적대시하고 감각을 믿지 않고 관능에서 벗어난 초탈의 태도를 견지해 왔는데, 이것은 철학이 발생하고 유지되어왔던 조건들의 결과이다. ‘철학적 정신’은 살아남기 위해 이처럼 ‘금욕주의 외투’를 걸치고 ‘종교적 인간’으로 가장해야 했다. 금욕주의의 고치 안에서 ‘불쾌하고 어두운 애벌레’의 형태를 취하지 않고서는 철학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4] 성직자의 경우 :: ‘성직자들에게 금욕주의는······’   (아포리즘 #11, 13~16, 17~22)
“성직자들에게 금욕주의는 본래의 믿음이나, 권력의 최상의 도구 혹은 권력 자체를 지향하는 최고의 면허이다.”

먼저, 성직자에게 금욕주의란, 삶과 대립하는 삶, 삶을 비난하는 삶, 자기모순적인 삶으로 건너가는 다리이다.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우리 삶을 ‘삶이 스스로 대립적이고 배타적인 관계를 맺는’ 생존, ‘스스로 등을 돌리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생존과 관련 맺게 한다. 이들은 우리에게 이런 가치평가를 함께 하기를 요구하며, 이런 자기모순적 삶을 함께 살기를 요구한다. 이 세계의 죄악과 저 세계의 구원. 이렇게 자기모순적인 삶이 가능한 것은, ‘삶 자체가 가진 관심사’이고 여기서 희열을 느끼는 부정적인 힘의 의지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삶의 기저에 있는 조건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기갈들린 본능과 힘 의지의 원한이 지배하고, 힘의 원천을 봉쇄하기 위해 힘을 사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다음, 성직자들의 금욕주의 삶을 거스르는 삶역시 자신을 보존하려는 삶이며 자신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그들 역시 자신이 존재하는 데 가장 이상적인 환경을 ‘이 세계’에 구축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기의 불행한 의식을 다른 이의 양심에 주입할 때, 혁신적이고 반항적인 인간들이 삶의 실험에 싫증을 내게 했을 때, 대지의 공기를 삶에 적대적으로 만들 때, 건강한 이들이 병자가 되었을 때, 그는 지배력을 발휘한다. ‘고통받는 자의 세계’가 그가 다스리는 왕국이다.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의사가 병자에 대해 갖는 지배력을 획득하는데, 그는 의사가 되기 위해 우선 아픈 사람들을 만들어낸다. 그는 ‘인간에 대한 혐오’와 ‘인간에 대한 동정’을 앓는 사람으로,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을 허물어버린다. “내가 다른 존재였으면 좋았을 걸!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진저리가 난다.” 이렇게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병든 이들의 의사로-구원자로-목자로-변호인으로 행동하면서, 강자의 영향으로부터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를 약자로 건강한 자를 환자로 만들어낸다.

그리고나서,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병자들, 고통받는 자들을 관리하는 다양한 기술을 발휘한다. ① 고통의 원인이 되는 비난받을 자를 찾아준다. 처음에는 비난이 타인을 향하도록, 나중에는 자신을 향하도록. ② 해석을 통해 고통을 완화하는데, 진정제ㆍ마취제ㆍ수면제 등 생명감을 약화시키거나 마비시키는 약물과 같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다룰 뿐이지, 고통의 원인을 다루는 사람은 아니다. ③ 기계적 활동(노동 : 아무 생각없이 하는 정확한 복종, 엄격한 생활방식, 시간준수)을 도입하여, 고통이 의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일종의 ‘자기 망각’ 내지 ‘자기 무시’의 기술. ④ 우울증과 자기혐오에 대한 처방으로, 공동체의 소소한 즐거움을 제공한다. 이로써 다양한 상호부조모임, 공동체, 집회 등이 생겨나는데, 이는 ‘삶을 긍정하는 충동’과 ‘힘에의 의지’에 대한 자극이며 그들로서는 예외적인 처방이다. ⑤ 고통을 오히려 갈망하게 하는 격정적인 죄의식을 만들어내는데, 고통의 감정이 분출될 때 고통에 죄있는 자(원인)로서 자신을 지목한다. ‘고통’ 자체를 ‘벌’로 이해하게 하여, 병자를 죄인으로 만든다. 자기 삶에서 지옥을 발명하기.
결론적으로 금욕주의적 성직자들의 처방은 길들여진, 약화된, 용기를 잃은, 소소해진, 연약해진, 거세된 등같은 효과를 낳았다. 이것은 병자의 병을 더 깊게 만들먼서 이루어진 일이다. 병은 급속히 퍼졌고 그만큼 성직자들에 대한 갈망이 커졌으며, 성직자들의 지배력이 확대되는 동시에 병은 더 깊어졌다.
 
  [5] 소위 ‘금욕주의의 적대자들’   :: 과학자들(#23, 24, 25), 역사학자들(#26), 무신론자들(#27)
“금욕주의는 지상에 존재하는 어떤 힘도 금욕주의의 작업을 위한 도구로 믿는다.”
금욕주의는 보편적인 것이어서, 인간 생활의 모든 관심을 사소하게 보이게 한다. 금욕주의는 시대-민족-인류를 하나의 목표에 비추어 해석하는데, 자기해석에서 거부하거나-부정하거나-긍정하거나-시인하는 해석체계이다.

먼저, 현대과학은 금욕주의의 반대가 아니라, 금욕주의의 가장 최근의 세련된 형식이다. 현대과학은 진정한 현실철학이며, 신이나 저편 세계나 부정의 덕목 없이도 잘 해체해나갔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금욕주의의 반대자는 아닌데, 과학에는 ‘불만, 불신, 설치류 벌레, 자기멸시, 양심의 가책’이 숨어있다. 과학은 금욕주의적 이상의 반대자라고 말하기 이전에, ‘자기마비와 사유능력의 마모’ 같은 ‘과학적 금욕주의’가 존재한다. (많은 학자들이 ‘정신없는 채’로 밤낮 일을 하는 ‘자기마비’) 또한 과학자들에게는 신앙심 없음이 자부심이 아니라 창백함으로 나타나는데, 창백한 무신론자-정신의 결핵환자이다. 이들은 금욕주의를 정신화함으로써 출현한 자들이고, 최전선에 있는 전투병이자 정찰병이고 가장 위험하고 민감하고 불가해한 형식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리에 대한 믿음에 무조건적으로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리를 향한 무조건적인 의지란 금욕주의 자체에 대한 신앙이다. 과학과 금욕주의는 모두 ‘진리에 대한 과대평가’라는 같은 지반 위에 있다.

다음, 현대 역사기술은 고도로 금욕주의적이며, 동시에 고도로 허무주의적이다. 현대의 역사기술, 특히 실증주의 역사기술은 사실의 말만을 받아적는 ‘사실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자 하며, 적극적인 가치판단을 포기한다. 특히 현대적인 역사가들은 관조적인 무리들로서, 반쯤은 사물을 객관적인 등받이에 앉아 관조하면서 반쯤은 이상을 위조하는 자들이다. 선택해야 한다면, 완전히 비역사주의자나 반역사주의자보다 ‘관조하는 자들’이 백배나 나쁘다!
또한, 무신론 역시 금욕주의의 대립물이 아니라, 금욕주의의 마지막 발전과정이며 논리적 귀결이다. 신에 대한 단순한 불신이 아니라 엄격한 추론으로 무신론이 도출되는 것은, ‘2천년에 걸친 진리를 향한 훈련의 파국’이다. “정신은 진리를 향한 의지를 제외하고는, 이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신론의 의지는 정신적으로 정식화된 금욕주의이며, 종교적인 것을 제거한 신비주의이다. 사건의 경계선(문턱)을 뚫고 가기 위해 진리의 의지에 대한 물음이 던져져 있다. 문제는 ‘진리’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의지’에 대한 비판이다. ‘진리를 향한 의지’ 자체를 문제 삼을 때, 도덕은 몰락할 것이다.
 
  [6] 하나의 의지로서의 허무주의   (아포리즘 #28)
 
금욕주의의 최종적인 형태는 허무주의이다. 병든 동물로서 인간이 ‘고통’에 대해 괴로워할 때, 금욕주의는 하나의 ‘의미’를 부여해주었다.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고통에 대한 해석은 그 자체로서 고통을 완화하는 동시에, 새롭고 독성이 강한 고통을 가져왔고, 고통은 점차 ‘죄’쪽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금욕주의와 더불어 인간은 “하나의 의미를 갖게 되었고, 더 이상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같은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금욕주의에 표현된 의지들은 허무를 향한 의지이다. 앞에서 다룬 금욕주의에 표현된 의지들은, 인간적인 것에 대한 증오-동물적인 것에 대한 증오-물질적인 것에 대한 증오-관능에 대한 증오-심지어 자신에 대한 혐오이기도 했다. 또한 그것은 행복과 미에 대한 두려움이자, 모든 현상-변화-생성-죽음-소망-욕망으로부터의 도피욕망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삶에 대한 적대였으며, ‘허무를 향한 의지’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을 의욕했는가가 아니라, ‘의지’가 구출되었다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삶에 대한 적대이고 삶의 기본전제에 대한 저항이지만, 그 때조차 하나의 의지이다. 따라서 금욕주의의 최후형태인 허무주의에서, 금욕주의를 극복하게 하는 ‘힘의 의지’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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