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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위와 변모의 이야기, 『마왕』

“무게가 가중되었는데 오히려 몸이 떠오르는 느낌! 놀라운 역설! ‘전위’라는 단어가 즉각 내 펜 아래 나타난다. 말하자면 기호의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좋은 것은 가장 나쁜 것이 되고, 반대로 가장 나쁜 것은 가장 좋은 것이 되었다. 선의적 전위, 이로운 전위, 신적 전위....”(122)

“순수성의 악마가 들러붙은 인간은 자기 주위에 파괴와 죽음의 씨를 뿌린다. 종교적 정화운동, 정치적 숙명, 종족의 순수성 보존 등은 잔혹한 순수성의 변형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한결같이 범죄에 이르게 되는데, 특히 즐겨 사용되는 범죄 도구는 순수성과 지옥의 상징인 불이다”(115)

“한편 때때로 뒤틀리는 사물의 운행과 일시적인 것과 부정확한 것에 익숙해진 양서 동물 같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환경의 배반에 맞설 줄 안다.”(127)

 탁월한 문학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전복적인 사건과 사유, 경계를 지우는 모호한 지대에서 낯선 언어와 문장에 신체적으로 감응하게 되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왕』은 나에게 모처럼 탁월한 문학이 주는 읽기의 즐거움을 경험하게 해준 작품이었다. 곳곳에서 멈추고 문장에 밑줄을 긋고 다시 돌아가 지나온 문단을 읽기도 하고 때로 놀라움과 당황스러움과 맞닥뜨리는 문학작품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감응에 고양되는 경험을...

  시작하는 첫 문장에서 식인귀라고 불려지는 주인공 아벨 티포주라는 특이한 인물의 특성과 상황 그리고 그가 만나고 만들어내는 사건들은 당황스럽고 때로 충격적이며 의미가 모호하다. 나치즘의 광기가 활개치는 역사적 상황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신화와 상징이 섞이면서 우리의 통념과 상식, 익숙한 서사를 배반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투르니에는 근원적인 원형의 신화, 전설, 민담, 성서, 동화 들을 차용하고 변용하여 현대적인 신화적 인물 아벨 티포주를 창조해냈다. 아이를 유괴하는 괴테의 발라드 속 마왕은 독일군의 포로로서 나치에 부역하는 존재가 되어 아이들을 부모들로부터 빼앗아 나폴라로 모으는 티포주의 모습에서 구현된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티포주는 아이를 짊어지는 존재일 뿐 아니라 아이에 의해서 구원받는 전복된 마왕이 된다. 투르니에가 창조한 새로운 식인귀이자 마왕, 티포주는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존재의 모호함과 다양한 면모를 그의 체험과 변모를 통해 드러낸다. 그리고 야만과 문명, 성과 속, 아름다움과 추악함, 윤리와 비윤리 등 우리에게 익숙한 대비적 관념들을 모호하게 뒤섞이게 한다.

 티포주는 사회의 외톨이이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미숙한 어떤 면에서 어른이 되지 못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는 운명의 변덕에 쉽게 절망하거나 압도되지 않는다. ‘기호해독자’로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상징과 기호들을 독해하면서 조정하고 그는 다른 영토에서 다른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조국을 떠나 계속 이동하는 유랑민이기도 한 티포주는 동프로이센의 대지와 공기, 동물들과 교감한다. 라인강의 비둘기들, 운홀트(고라니), 바브르블뢰(말), 캉델라브르(사슴) 등은 티포주가 교감을 나누고 욕망하는 『마왕』의 서사를 빛나게 하는 고귀한 존재들이다. 그들과의 일화는 아름답고 낯설며 금기시되는 것들과 우리를 대면시킨다.

 러시안 군에 의해 불태워지는 나폴라에서 에프라임을 짊어지고 나오는 티포주는 순수성의 악마 혹은 나치즘과 대비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질성과 모순으로 가득한 그는 수호자로 변모된다.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뺏어가는 마왕이자 아이를 짊어지고 구원하는 수호자로 변모하는 식인귀 티포주. 그 둘은 나뉘어져 있지 않다. 하나의 존재이다. 

 티포주를 모함하는 음모를 꾸민 자도 어린아이(마티엔)이고 티포주가 짊어지는 그를 변모시키는 자도 어린아이이다(에프라임). 어떤 존재도 무구하지 않으며 혼자서 이루는 구원이란 없다는 것. 삶은 상징과 기호로 가득차 있으며 그것은 머리로 읽어내고 이해하기보다는 우리의 신체로 받아들이고 감응하고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 삶은 그 상징과 기호들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체화시켜나가는 전위와 변모의 과정이라는 것을 기억해두자.

 더불어 『마왕』은 다양한 글쓰기의 방법과 스타일에 대해 영감을 주는 소설이기도 했다. 일기쓰기와 기록의 1인칭 서사, 그리고 3인칭 서사가 겹치고 반복되면서 다층적인 이야기 구조를 구축한다. 거기에 더하여 충실한 자료에 기반한 역사적, 지리학적, 자연학적 지식과 묘사는 그 이야기들을 더 탄탄하고 풍성하게 하는 배양토가 된다.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짊어짐’에 대한 설명과 암시는 작품 전반부에서 다양하게 서술되지만 다층의 이야기들을 통과하여 마지막에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드러난다. 작품 전체를 조망하면서 변형되고 되풀이되는 신화적 구도가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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