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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인 부처, 부처인 중생

 

이번에 새로 나온 스님의 새 책 『왜 깨달음은 늘 한박자 늦을까』을 읽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왜 그런 제목으로 정하셨는지 이유를 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지금도 잘 모르겠고 아리송 하기만 하다. 꼭 여쭤봐야겠다.

 

이번 새 책에서 좋았던 점은, 우선 글이 경어체가 아니라 반말(?..!)이어서 참 좋다. 속 시원하다. 중간 중간에 웃음이 나오는 스님 특유의 표현들이 숨어 있다. 이 책 서문에 보면 “새로울 것이 없는 제 이야기를 늘 다른 이야기처럼 들어주시는 분들…”이라는 언급이 있다. 나는 해당사항이 안되는거 같다. 부끄럽지만 항상 스님 말씀이 비슷비슷하게 느껴져서 큰 일이다.

 

나는 스님의 책을 읽고 강의를 들을때면 일단 막 따라가진다. 막 가다가 문뜩 정신을 차려보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꼭 귀신에 홀린 거 같다. 여기서 ‘귀신’은 부정의 뉘앙스가 아니고 뭐랄까 나의 이해 범위를 벗어나는 것들을 말할 때 종종 쓰는 단어이다. 어쨌든 내 혼을 쏙 빼놓는다고 해야 하나. 지금 생각해보면 ‘~이 따로 없다’라는 표현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실컷 노력해서 긴 글을 읽었는데 마지막에 ‘따로 없다’니! 불성이란게 따로 없다 부처가 따로 없다 깨달음이란게 따로 없다.

 

스님의 몇몇 수업을 듣긴 했지만 사실 스님이 다루는 불교경전들이 가지는 차이들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스님의 책을 통해서 또 스님의 육성으로 들었을 때 전해지는 느낌들이 좋아서 우선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들은 패스하고 그냥 느낌만 잘 간직하려는 중이다. 스님이시긴 하지만, 동시대 한 인간이 전하는 본인의 ‘삶의 철학’으로 나는 매번 보고 듣고 있다.

 

이번 책의 소제목을 나보고 하나 빼 보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코 <중생인 부처, 부처인 중생> 이라고 말하고 싶다. 스님의 이전 책 『대승기신론1,2』 책표지에도 이런 말이 씌여있다. <왜 믿지 못할까 모두가 다 부처인 것을!> 스님께서 우리들에게 꼭 전달하고 싶은 말씀의 핵심인 것 같다.

 

내일 있을 마지막 강의가 기다려진다.

정화스님.jpeg

 

『왜 깨달음은 늘 한박자 늦을까

마음대로 풀어 쓴 『전신법요』와 『완릉록』

 

(아래는 발췌)

 

나의 길을 나라는 주체가 걸어가는 것도 아니거늘, 주체라는 생각은 어떻게 돌출한 잠꼬대일까.(24)

 

부처를 구하고 도를 구하는 마음이 부처도 잃고 도도 잃고 마는 마음이다. 얻으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무심이다.(30)

 

달마대사는 무슨 까닭으로 중국에 왔을까? 심오한 물음 같지만 자칫하면 목적론에 빠지기 쉬운 질문이다. 왜 사느냐고 물을 수는 있어도 그 물음에 대한 답 또한 목적론을 피해야 하듯. 지금 여기뿐이거늘 어찌 내일을 그리는 그림이 오늘 일이 될 수 있겠는가.(32)

 

형상이 부처 아님이 없으나 알아차린 형상에 머물지 않는 마음 씀이어야 부처를 볼 수 있다. 부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빈 마음으로 볼 때라야 모든 것이 부처의 형상이 된다.(33)

 

‘본래 얻을 수 없거늘 무얼 위해 그리 바쁜가’라는 말을 잊지 않는 것도 좋은 방편이다.(35)

 

얻으려 하는 일은 어느 것이든 숙제가 된다.(40)

 

‘당신의 짐은 당신이 만든 허구’라는 말을 들으려고 하기는 할까.(41)

 

하늘에 침 뱉는 일을 하면서 침을 피하기 바쁜 삶이다. 이를 윤회하는 삶이라고 한다.(49)

 

불성이란 것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인연처에서 깨어 있는 작용을 하는 유/무심이 불성이다. 길에서 길을 잃는 일이 도를 찾는 일이다.(53)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이라는 뜻이 그렇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며, 오늘조차 수많은 인연이 만들어 내고 있으니 발 딛는 순간마다 다른 오늘을 연출하면서 오늘을 완성해 간다고 할 수 있기에, 어떤 발자국이 오늘일까. 두 찰나를 한 찰나로 보는 순간 항상한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된다. 찰나마다 다른 흐름이어야 무상하다는 의미를 완성할 수 있지 않은가. 모든 사건 사물은 완성을 허물면서 새로운 완성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흐름(도)의 실상이 이러하거늘 어디에다 같은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59)

 

무심은 배워서 되는 마음 상태가 아니다.(65)

 

근사하게나마 도를 배운다고 하지만 도는 익혀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65)

 

배운 것으로 보면 도서관을 채울 만큼 많지만, 그 속에 자신의 대승심이 없으면, 소화되지 않는 상황에서 다시 먹기를 멈추지 않는 것과 같아 아픔만을 키운다. 해서 배우는 일이 독약을 먹는 일이 된다고까지 이야기한다.(70)

 

말하는 순간 말이 갖는 의미체계 속에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80)

 

앎과 함의 일치가 이렇다. 구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구하지 않는 것과 정신승리를 하는 것은 다르다. 그렇지만 구하는 세계에서는 누구라도 정신승리법으로 살고 있다. 구해진 것이 얼마 동안 그대를 들뜨게 했는가를 보라. 그 순간을 지나고 나면 그와 같은 증상이 없는데도 자랑거리로 그 증상을 대신하면서 정신승리법을 이어 가지 않는가. 어쩌면 잃을까를 염려하면서 불안을 잠재우고 있지는 않은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마음을 분별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구하는 마음의 뒷배가 분별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이 열심히 일을 하는 게 문제다. 아픈 마음과 왜소한 자아상을 키우는 마음인데도 쉼 없이 일을 한다.(94)

 

시비를 다투고 명예를 다투며 재산을 다투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을 유위로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생각 길이 무위적으로 열린다. 세속은 무위도 유위고, 유위도 유위다. 제 살을 깎아 먹는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그것인 줄 알 수 없는 일을 자연스럽게 한다. 그러면서 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냐고 한다. 아파하면서. 본래 청정하다는 말은 귓등으로 듣지 않는다. 다들 제 몫에 맞는 병 속에 든 새 꼴이다.(99)

 

도를 구하는 일이 도를 탐하는 일이 되는 역설.(102)

 

욕망하지만 욕탐으로 흐르지 않고 분노하지만 미움으로만 흐르지 않는 평상심이 도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117)

 

‘그대 마음을 보세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대의 마음이 중생이고, 부처이니까.(120)

 

이름 붙이는 순간 실상과 멀어지고 잡는 순간 번뇌가 탄생한다. 탄생과 소멸이 한순간이다.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일이 없다. 어느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말로서만 남아 있다. 이렇게 모인 말들을 지고 있는 것이 중생인 부처이고 그 말에 매이지 않으면 부처인 중생이다.(124)

 

‘나란 무엇인가? 부처란 무엇인가’가 그것이다. 허나 이 질문 또한 헛짚었다. 임시 그렇게 현상한 개체로서의 나는 무엇이면서 동시에 그 무엇에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 부처란 머물지 않는 것을 아는 마음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그 마음은 온갖 것을 만들어 내면서도, 돌아서는 순간 어느새 그 마음조차 사라지니, 마음이 부처라고 할 때조차 부처를 볼 수 있거나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마음을 떠나 마음을 찾는 꼴이 되고 만다.(135)

 

진짜 부처님이라는 분별상을 취하면 그것은 진짜 부처님을 여의는 일.(139)

 

몸이 아팠으나 괴롭지는 않았다. 이것이 성인의 무심이다. 온전히 아픔을 느꼈지만, 아픔이 사라지고 즐거움이 오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이다. 괴로움은 바라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 발생하는 마음 현상이다.(140)

 

무심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집착하는 일이 없는 마음으로 성인의 마음 씀이라 할 수 있다.(141)

 

눈이 보는 것이라고 하면 꿈을 보는 것은 무엇인가. 보는 것이 마음이라는 말이 더 와닿지 않는가.(156)

 

여기서도 조심해야 한다. 모든 분별상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 것이 여래라는 뜻이지, 분별상이 사라지면 여래가 보인다고 생각하면 그 또한 새로운 환상을 만들고 만다는 점을.(157)

 

신념을 갖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다른 색깔의 신념으로 그곳을 메우면서 하루하루를 잘 살았다고 여기고 내일을 기대한다.(163)

 

하니 배우고 익힌 상이 다 비워진 것과 같은 배움 없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배움이라는 것을 잊지 말게.(167)

 

연기법을 체득하게 되는 순간 낱낱은 사라진다.(168)

 

여기서 조심해야 한다. ‘나도 여래다’라는 선언은 반드시 ‘너도 여래다’가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173)

 

불교를 공부하는 것이 불교의 견해를 축적하는 것이어서는 부처의 삶을 지향하면서 중생인 부처로 살기로 자처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181)

 

해서 마음 밖에 중생의 삶과 부처의 삶이 따로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면 바람에 흔들리는 쑥대 꼴을 면할 수 없다.(182)

 

쇠로 된 산속에 갇힌 꼴.(183)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인 부처가 부처인 중생인 줄을 비로소 알게 된 것과 같다.(184)

 

어쨌든 ‘아무것도 구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하기는 해야 하니. 왜냐하면 부처를 구하지 않아야 부처가 따로 없는 줄 알고, 법문을 구하지 않아야 흐르는 사건이 들려주는 법문을 들을 수 있고, 수행자를 구하지 않아야 누구라도 함께 수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186)

 

마음이 만든 상은 어느 것이든 허상이다. 실재하지 않는다.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얻을 수 없다. 해서 가장 위대한 노력은 얻으려는 일을 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190)

 

분별상을 좇는다는 것은 분별상에 의해 느낌 등이 널뛰기를 한다는 뜻이다.(198)

 

석가모니 부처님의 마음과 중생인 부처의 마음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말은 듣기로는 그럴듯하지만, 중생인 부처들의 마음 씀을 살펴보면 ‘그 말이 가당키나 하겠는가’라는 것이 더 가슴에 와닿지 않는가. 마음이 바뀌어야 부처의 마음이 현상된다는 말이 훨씬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해서 달마 스님의 말이 자다 봉창 뜯는 소리로 들릴 수 밖에 없겠지만, 종국에는 ‘그대 마음이 중생이고 부처다’라는 말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면서 선의 요체를 있는 그대로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201)

 

변치 않는 본질로서의 마음 또는 부처가 없기에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이 가능하다. 말을 하되 말에 매이지 않아야 하고, 만들어진 의미에 머물지 않아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203)

 

관점에 매이지 않아야 부처인 중생의 마음 씀이 시작된다. 마음 하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데 온갖 인연이 관여하고 있기에. 그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은 우연으로.(208)

 

하니 분명히 알아야 한다. 뭇 생명 모두가 본래 깨달음을 실현하고 있다는 것을. 생명계의 흐름이 이러하니 다시 보리를 얻으려 하는 일이 깨달음을 등지는 일이 되고 만다. 해서 어렵다. 깨닫지 못하면 뭇 생명의 활동 그 자체가 깨달은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없고, 깨닫고 보면 본래 깨달음조차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니. 깨달음을 향해 치열하게 공부해야 한다고 하지만, 자칫하면 또 다른 환상에 끌려가는 것이 되고 마니.(214)

 

무심 그대로가 부처고, 뭇 생명의 본원이다. 수행으로 깨달은 마음을 만들어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변치 않는 실체로 생각하면서 그 마음을 찾고자 하는 것을 수행으로 여겨서는 삼아승지겁이 지나도 결코 깨달을 수 없다.(216)

 

거칠게 말하면 실재하는 것은 관계망뿐이다. 관계라는 의미로만 보면 사건/사물들의 관계인 것 같지만, 실체를 갖지 않는 사건/사물들이 어찌 관계의 중심축이 될 수 있겠는가. 해도 일상의식으로는 사건/사물들만 보인다. 해서 현상한 사건/사물에 현혹될 수밖에 없다.(220)

 

연기법신의 자리를 생각하지 않고 ‘부처’라는 분이 ‘나’에게 ‘법’을 설했고, ‘나’는 그 ‘법’을 듣고 곧바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여긴다면 새로운 견해가 생긴 것일 뿐이다.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이야기다.(223)

 

몸에서 발생한 느낌을 좇아가면 곧바로 즐겁거나 괴로운 마음 현상을 초래하게 되고, 마음이 만든 환상을 좇아가면 연기법신인 무심을 놓치게 되니.(226)

 

열심히 했는데도 하고 나면 텅 빈 가슴만 남았다면, 열심히 하는 일을 멈추어야 하지 않을까.(227)

 

그럴듯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의 자기는 늘 그럴듯한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 되므로, 그럴듯한 자기를 그리면서 하는 일이 실제로는 지금 여기의 자기를 부족한 사람으로 만드는 일을 가열차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227)

 

무심을 사건/사물에 대해 ‘관심 없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229)

 

느낌 그 자체로 보면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이렇게 느낀다’라고 하는 순간 느낌이 주체가 아니고 자아가 주체가 되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어쩌면 쓸데없는 질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허무는 그렇게 탄생된다. 느낌이 부차적일 때.(230)

 

경계가 만들어지면 경계에 끄달리고 경계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어찌할 줄 모르는 마음으로는 있음과 없음을 넘어설 수 없다.(232)

 

반쯤 바뀐 생각은 아직 바뀐 것이 아니다. 어느때는 앞의 판단으로 다른 때는 뒤의 판단으로 왔다 갔다 하는 상태를 어찌 바뀌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온전히 바뀌어야 바뀐 것이다.(236)

 

웃을 때는 온전히 웃고 울 때는 온전히 우는 마음이 부처다. 드러난 현상으로만 보면 누구나 그렇게 사는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다른 이를 울게 하면서도 본인은 웃고자 하는 이들도 넘친다. 이것이 분별된 현실이다.(238)

 

얻으려는 수행은 허공을 움켜쥐고 그것이 보배이기를 바라는 것과 다름이 없다.(246)

 

선은 체득된 마음이지 언어 문자를 통해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247)

 

이익과 칭찬이 좋은 것 같지만, 그대는 그것으로 인해 자유롭게 되었는가. 되돌아보면 그것들을 좇아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을 칭찬해 주어야 할 것 같기는 하지만, 어느 틈에 이익과 손해를 헤아리면서 결과에 들뜨고 가라앉은 삶이 지속되지는 않는지.(256)

 

그런데도 공부인 가운데 기필코 불도를 얻겠다고 하는 이들이 있으나 그와 같은 견해야말로 불도와 어긋난 것일 뿐이다.(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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