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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신에 다가가는 6개의 단어] 세 번째 시간 공지

세 번째 시간 공지입니다.

 

시간 : 2017년 7월 26일 (수요일) 늦은 7시 30분

 

주소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성산로 315(연희동 435번지) 서울정형외과 주차장 쪽 입구)

수유너머 104 / 2층 소강의실로 오시면 되어요.

 

(오시는길: http://www.nomadist.org/s104/index.php?mid=board_YQeO19&document_srl=1503)

 

처음 오시는 분들은 헤맬 수 있으니 조금 일찍 출발해 주세요!

 

 개인적인 불찰로 인해서 후기를 저가 직접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사과의 말씀 전합니다. ㅠㅠ 후기를 쓸 수 있는 기회를 모두와 공평하게 나눌 수 있어야 되는데...

 루쉰은 '자질구레한 일'에도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소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작동하는 권력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작은 일도 소중하다는 상대주의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크고 작은 일을 나누는 것에 대해서 회의합니다. 그러면서 루쉰은 자신의 변발과 수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루쉰은 1902년 일본으로 건너간 뒤 자신의 변발을 자릅니다. 이때 특별히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거대한 목표가 있었다기 보다는 불편하다는 신체로 와 닿는 직접적인 이유에서 변발을 잘랐습니다. 하지만 다시 신해혁명 전 중국으로 돌아온 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서 변발을 하고 있기 전과는 다른 시선을 감지합니다. 그것은 모욕과 조롱의 시선이었으며, 혹은 자신과 친한 사람에게서는 연민과 동정의 시선이었습니다. 변발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권력 안에 포섭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며 포섭된 자로부터는 권력을 잃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청조시기의 권력은 이렇듯 아주 사소해보이는 머리카락으로까지 스며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권력에서 이탈함으로써 받는 대가는 비단 실재적인 정치권력에 의해서 받는 것도 있겠지만, 자신을 둘러싼 주변 사람에서부터 그 대가는 시작됩니다. 감시와 처벌이란 것은 특정한 권력자에게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바로 옆에서부터 강하게 작동됩니다.

 이처럼 신체까지 스며들어와 강하게 작동하는 권력 안에서 개인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자유를 잃게 됩니다. 루쉰이 살던 시기에 전족은 권력이 여성의 신체에 강하게 작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전족을 거부하게 된다면 그것은 한족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족을 받아들여야만 개인은 한족 여성으로 기능할 수 있게됩니다. 이렇듯 권력이 강하게 작동하는 이유는 그것이 강력한 억압을 준다라기보다는 권력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이 삶을 살아가는 것에 유리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루쉰은 자신을 찾아와 변발을 자르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 사람들에게 자르지 말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르지 말라는 이유란 잘랐을 때의 불편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의 억압의 강도가 강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초래하는 불편함이 크기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루쉰이 살고 있던 시기는 권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다면 정말로 죽음을 감내해야 할 수도 있었습니다. 권력이 작동하는 형태가 현재보다 훨씬 가시적인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현대의 권력이 가장 잘 작동하는 영역이 CCTV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서부터 계속해서 범죄 예방을 목적으로 내세워서 CCTV의 숫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만큼 범죄 예방의 효과가 있을 지도 모르지만 CCTV로 인해서 자율적인 영역 역시도 계속해서 축소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 자율적인 영역의 축소보다 우선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 CCTV에 대한 개인차원의 인식에 있을 것입니다. CCTV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기에 안심하면서 밤늦게도 거리를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는 생각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권력이 자신을 범죄로부터 지켜주고 있다는 환상이 만연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루쉰이 말한 노예 상태일 것입니다.

  노예 상태란 자신의 존재만으로 스스로 설 수 없는 상태이기에 자신을 의존할 무언가를 갈구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쉰은 유학자들이 이야기한 중국 역사에 대한 '일치일란'의 상태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폭군이 등장하고, 그 폭군을 제압하는 성왕이 교차해서 등장하는 서사에 대해 거부를 한 것입니다. 루쉰이 보기에 중국의 역사는 오로지 노예의 역사입니다. 폭군이든 성왕이든 결국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통치되는 노예들이기 때문입니다. 혼란의 시기에는 태평성대를 원하면서 노예가 되기를 원하고, 태평성대시기에는 자신이 이때 태어난 노예임을 감사하는 것이 루쉰이 본 중국의 역사입니다. 중국의 역사는 폭군의 역사일뿐이며, 그리고 거기에 의존하여 사는 노예의 역사입니다. 성왕과 폭군의 구분은 없고, 나쁜 폭군이거나 좋은 폭군이거나의 구분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전통이란 것 역시도 노예의 역사를 체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루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밑바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의 탄생을 방해하는 가르치고 억제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이 유지되는 이유는 그 전통이 유익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그 전통을 유지하려는 개인들의 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개인들의 의식이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기존에 있던 것을 유지하려는 자들의 의식입니다. 이러한 의식을 담고있는 자들에게 다름은 전혀 생성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노예상태를 극복하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루쉰은 그것에 대해 '무뢰의 정신'이라고 대답합니다. 끈기 있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정신이 바로 '무뢰의 정신'입니다. '무뢰의 정신'은 과거의 전통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노예의 정신에도 길들여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것에도 의존하고자 하지 않는 상태, 다만 걷는 것만을 갈구하는 상태가 바로 '무뢰의 정신'일 것입니다. '무뢰의 정신'을 가진 자에게는 과거의 자신이 걸어온 길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무엇이 중요하다고 길을 걷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미리 무언가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에게 있었고, 있고, 있을 것이란 오직 새로운 것들과의 마주침과 엮임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이전에 습속을 타파할 수 있고,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루쉰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보길 원하는 것을 치워버립니다. 그렇게 함으로 사람들은 진정 자신과 대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가치 척도에도 잡히지 않는 상태, 자신을 대상화하지 않기에, 오롯한 하나의 존재로 대면할 수 있는 상태가 바로 루쉰이 이야기한 '입인'의 상태였을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하나의 존재로 대면한 나 자신은 계속해서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 쉬다가라고, 저 앞에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자신마저도 저 앞에 무언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걸어야만 합니다.

이것으로 간략한 후기는 마칩니다~ 다음으로 내일 할 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 3강 이이(而已)- 절망의 저편: 루쉰은 청년들의 해방과 자유를 갈망하고 글을 씁니다. 그러나 중국혁명 과정에 자신의 글이 청년들을 죽음의 길로 이르게 했다는 자각에 괴로워합니다. 어떤 말도, 글도 드러낼 수 없었던 상황 속에서 루쉰은 자신의 절망의 허망함을 자각하고 “따름”의 세계와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자질구레한 그렇지만 자신에게 절실한 세계를 그려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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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씨가 정말로 절망적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걸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유너머에 와야만 합니다. ㅎㅎ 다들 냉방병 조심하시길 바라며 건강한 모습으로 뵙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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