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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아시다시피, 내일(8월 11일)이면 최겔 선생님의 <역사철학강의>에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지난 5주가 긴 시간 같으면서도 짧은 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튼 이번 강의들을 토대로 나름대로 정리를 해보았답니다.

이렇게 후기라는 형식으로 강의 내용을 정리를 하면서 제가 느낀 점은

의외로 얻어가는 것이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가령 후기에 적혀있을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과 혹은 제 머릿속에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의 <2부 3장 세계제국>을 조큼은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할까요.

헤겔을 죽은 개 취급하면서도, 도처에 그의 사유가 숨겨져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앞으로도 헤겔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저에게 닥치기를 바랄뿐입니다. 부엉부엉 부엉이-되기.

지금은 말고…….(흑흑)

  

  

날씨가 상당히 매우 더워서 잠을 이룰 수 없어서 큰일이네요.

부디 다들 더위 조심들 하셔요.

그럼 우리는 내일 뵙도록 합시다.



무더위.jpg


    

 

1) 후기가 난삽해서 밑줄을 나름대로 쳤습니다.

2) 여기서의 페이지 표시는 <헤겔, 『역사철학강의』, 김종호 역, 삼성출판사, 1990.>입니다.

 



2016년 8월 2일 / 헤겔, 《역사철학강의》정리 / 병석

최겔의 ≪역사철학강의≫

 

_세계사; 이성reason과 정념passion의 이름으로 쓰여진 헤겔의 세계사


  

  

1) 이성 자체가 발전적 역사라는 구조물을 짓는다

→ 시간의 과정[혹은 흐름] 속에서 이성[절대정신]은 성숙해져간다. 그리고 시대에 따르는 이성의 성숙도에 걸 맞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자유의 정도는 달라진다. 가령 이집트에서 살펴볼 수 있는 피라미드나 스핑크스 같은 불가해한 것들도 이러한 맥락 속에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진리[자유와 이성]를 파악할 수 있는 정도는 시대의 따라 그 단계가 달라지는데, 이집트에서는 감각적 형상 속에 진리를 표현이었고 그것이 예술이다. 중세에 이르러 예술에 있던 자리에 내면의 터를 구축하여 믿음의 형식으로서의 종교가 자리 잡는다. 그리고 근대에 이르러 이성에 기반을 둔 철학이 존재하게 된다. 이렇듯 진리를 인식하는 것은 시대의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절대이성을 인식하게 되는 형식들; 예술[감성]→종교[믿음]→철학[개념]]

    

 

2) 세계사는 이성의 세계지배이다.

→ “이성은 아주 자유로이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사유이다.” (73)

이성은 자기 안에서 영향을 섭취하고 자기가 가공하는 자기 자신의 재료이다. 이성은 이성 자신의 전제이고, 이성의 목적은 절대적인 궁극 목적인 동시에 그 궁극목적을 실행하여, 내면적인 궁극목적을 자연적 우주의 현상은 물론이거니와-세계사 안에서-정신적 우주의 현상 안에도 산출해가는 자는 이성 자체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념이 참다운 것, 영원한 것, 절대적인 힘을 가지는 것이라는 사실, 이와 같은 이념이 세계 안에 계시되고, 이와 같은 이념-이러한 이념의 존엄과 영예-밖에는 아무것도 세계 안에 계시되지 않는다는 것은 철학 안에서 증명되고, 따라서 여기에서는 증명된 것으로서 전제된다. (70)

→ 이성은 그 자체로 즉자대자적이다.


즉자적

대자적

즉자대자적

실체성

나에게 맞서 있는

대상세계들

내적=외적

주관=객관

주체=객체

in itself

-분열을 전제함

for itself

in and for itself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하였지만 이 이성이라는 말도 섭리라는 말과 같이 애매한 말이다. 사람들은 줄곧 이성이라고 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만, 도대체 이성의 규정(의미/역할)과 이성의 내용은 어떠한 것인가, 어떤 것이 이성적이고 비이성적인가를 판정할 수 있는 표준이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전연 말할 수 없다. 그 규정에 있어서 파악된 이성, 이것이 비로소 사상(事象; Sache)이다. (76)

→ 이성의 규정에 관하여 생각해볼 때, 이성을 세계와의 관계에서 생각하는 한, 세계의 궁극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일치한다.

즉 이 세계의 궁극목적이라는 표현에는 이성이 실현되고 현실화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_ 헤겔 철학에서의 개인과 국가[공동체]

   《역사철학강의》라는 텍스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주된 문제의식 중의 하나는 ‘우리는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공동체(보편)과 개인(특수) 사이에는 법과 제도라는 매개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윤리적 형태로 존재한다. 헤겔철학에서는 그 매개를 인륜이라고 명명한다. 인륜을 영어로 옮기면 ethics다. 그리고 철학에서는 ethos가 습속을 가리킨다. 습관과 풍속이라는 의미에서 moral[라틴어]과 연관된다. 에토스는 공동체의 관습과 공동의 선을 말한다. 인륜을 담백하게 표현하자면 우리의 삶에 녹아들은 것,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바람직하다고 옳다고 느끼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따르는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르는 그것이 인륜이다. 남존여비(男尊女卑)를 간단한 예로 볼 수 있겠다. 적어도 “그것이 왜 그래야 돼?” 라는 문제제기의 질문을 받기 전까지 그것의 정당함은 인정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 세계에서는 외적인 형식으로서 인륜이 묶였던 시대라는 것이다. 그리스 시대에는 외적인 행위가 관습에 포함된다는 점에서 헤겔이 외면적 총체성이라고 명명한다. 때문에 법과 제도가 필요 없는 시대가 그리스 시대며, 그러한 시대를 헤겔은 “절대정신의 행복한 유년시대”라고 명명하고 있다. [루카치- 그리스 시대와 총체성]


→《소설의 이론》이 갖는 부제가 <대서사 문학의 형식들에 관한 역사철학적 시론>이라는 점에서 루카치가 헤겔의 《역사철학강의》에 영향을 받았을 것 같다. 아무튼 헤겔이 그리스 시대를 설명하는 맥락은 ‘비헤겔적 마르크스주의자’로 분류되는 벤야민이나 아도르노와는 다른 결을 가진 게오르그 루카치를 이해해볼 수 있는 단초가 된다. 즉 헤겔적 마르크스주의자로 명명되는 루카치가 말하는 전형Typus으로 구현된 참다운 예술의 총체성이 표현된 절대정신이겠다. (루가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미학적 텍스트에 대한 입문>(1945) 참조)

   한편으로는 루가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다음과 같이 그리스 시대를 표현한 것은 헤겔이 말한 절대정신의 행복한 유년시대를 염두에 둔 것일 테다.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 그 시대에는 모든 것이 새롭지만 친숙하며, 모험에 찬 것이지만 뜻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이다. 세계는 넓지만 마치 자기 집과 같은데, 영혼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이 하늘에 떠 있는 별들과 본질적 특성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게오르그 루카치, 『소설의 이론』, (김경식 역, 문예출판사), 27쪽)

    

 

   로마시대에 이르러 그리스 시대에서 살펴볼 수 있던 외면적 총체성은 깨진다. 로마 제국에는 그리스 시대에서 볼 수 없었던 법과 제도가 인간을 강제한다. 왜 그러한가? 그 이유는 로마민족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과 야만성 때문에 바로 그러하다. 그래서 현대유럽 민법의 근원이 되는 로마법이 개인과 공동체를 매개한다는 것이 헤겔의 관점이다. 다만 여기서는 선[그리스]과 악[로마]의 이분법론 사고 발동시키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가치구도에 대해 헤겔이 일정 부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과정이 역사 진보에 있어서 불가피했다고 헤겔은 말한다. 즉 로마시대가 외적으로는 역사[자유]의 후퇴나 타락을 보여준다는 면이 있지만, 어떤 면으로 본다면 그것은 절대정신이라는 역사의 진정한 주체가 한걸음 내딛는 과정을 로마 시대가 담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라는 유년 시대에 몰랐던 것을 찾아가고자 하는 성장통을 로마 시대가 겪는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를 만나면서 중세인은 내면을 발견하게 됐었는데, 그렇게 발견된 내면이야 말로 역사의 진정한 주체가 되는 조건이 됐다.

   중세의 정신은 부분과 전체, 특수와 보편 사이에 존재했던 고대 그리스적 의미에서 조화로운 일체성을 상실했다. 그것은 중세 사회의 어두운 모습은 이러한 상실과 결여의 감각을 곧이곧대로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헤겔은 공동체의 유무를 전제로 둔 사인(私人)과 개인(個人)을 구분한다. 중세에 이르러 역사는 한걸음 후퇴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세에는 내면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헤겔은 중세를 내면의 거울[빛]을 다듬었던 시대로 중세를 읽는다.

 

 

그렇다면 헤겔이 바라본 근대는?    

 

_[분열의] 변증법; 1+1≠2

   화해[혹은 유화] 헤겔의 사상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중요한 부분이다. 변증법에 대한 통념적인 이해는 정[테제]과 반[안티테제]이 만나 합[진테제]정도 겠다.[1+1=2] 정반합의 변증법은 헤겔이 자신의 개념을 정리해 놓은 ≪철학사전≫에서 간략하게 설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헤겔의 변증법을 통속적인 차원에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는 변증법을 간단하게 정반합으로 정리하기 보다는, 변증법을 통해 헤겔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생산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다.

   지양, 이 단어는 변증법의 과정을 설명한다. 그런데 지양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가 요상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없애고[폐지하고], 바꾸고[대체하고], 들어올리는[변형하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헤겔이 설명하는 즉자[in itself]라는 단어에 잠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단어가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in itself 가 갖는 의미는 그것 안에 다른 내부를 설정한다. 즉 in itself는 한국어로 ‘그 자체’라는 단일한 뉘앙스를 가진 단어로 번역되는데, 독일어 원문이나 혹은 영어의 번역을 우리가 살펴보면 그것[it] 안에 그것이 분열되어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즉자적인 이성과 정신에서의 정과 반을 보건대, 우리는 정과 반은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 즉 정 안에 그 정과는 다른 반이 들어가 있다는 말이다. 하나의 정 속에 정과 반으로 분열해 있는데, 자신[정]에 대립하고, 그리고 다른 3항으로 나아가는 것이 합이다. 요컨대 내 안에 또 다른 반목하는 내가 있고, 나와 나의 대립을 통해 제 3의 나로 나가는 것이 헤겔이 말하는 지양이자, 변증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변증법의 과정은 거대한 묶음들의 합이 아니라, 낱낱의 것들이 자기분열을 하고 다른 것으로 이행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1+1=2”가 아니라 “1+1=귀요미”라는 의미겠다.] 그러한 의미에서 헤겔은 세계사를 설명할 때, 애초에 정신이 있었는데, 정신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라고 말했으며 거기에 그 사례로서 세계사의 여행이라는 살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정신이라는 뼈 안에는 세계라는[물질] 것이 살이 내포하고 있다. 담백하게 말하자면 정신과 물질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안에 물질이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헤겔이 독일관념론자임을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이에 대해 루카치는 뒤집는다. 왜냐하면 그는 본질과 현상의 참다운 변증법에 대해 이 양쪽은 모두 객관적인 혈실의 모멘트들이라 말하며, 그것은 인간 의식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양쪽 다 현실의 산물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관계에 올라서거나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이 변증법의 의미에서의 합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바로 그러하다. 때문에 헤겔의 의하면 동일한 하나의 의해서 인간이 성장해간다는 것은 거짓이다. 오히려 내적인 분열이 극심해지고 내적인 마찰이 극대화 됐을 때 우리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며, 그것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다시 내쏟는 과정 속에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헤겔에게서의 분열은 성장과 발전이 원동력이다. 그래서 자기 안에 있는 타자와 만나는 서사화의 과정을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합의 관계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화해라는 것이다. 화해라는 것에는 이면이 있다. 화해라는 것은 결국 어떤 상태를 인정하는 것이다. 너와 나는 대립하고 있지만, 지금 현재의 화해라기보다는 ‘앞으로 있을’ 조화를 전제한다.

 

   변증법 속에 의미의 모순을 가진 지양을 헤겔이 포함시킨 이유는 그가 프랑스 혁명을 어떻게 목격했는지를 살펴봐야 알 수 있다. 그에게 자유라는 이념이 만방으로 퍼져가는 사건이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관념에 머물렀던 자유라는 개념이 육화되는 사건, 신분제를 타파해버리고, 모두가 자유롭다고 인식하게 된 것이 프랑스 혁명이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혁명 후에 있었던 자코뱅[좌파]의 독재다. 역사는 분명 자유를 향한 여행인데 자코뱅의 독재를 헤겔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혁명이 끝난 뒤에도 세상에는 공포정치가 존재하는가. 《정신현상학》 자유의 전제로도 표현되는데, 역사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것을 전제하지만, 이 절대적인 자유를 우리는 알아볼 수 없다고 헤겔은 정리한다. 즉 [절대]이성의 자유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이성의 간지] 왜냐하면 헤겔에게서 참다운 자유는 도착[=전도] 되는 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유와 공포 혹은 광기와 이성은 서로 등을 맞대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완전한 종식으로서의 자유과 완전한 통일로서의 조화의 이면에는 아슬아슬한 차이로 자유와 조화를 버텨주는 이해할 수 없는 착종된 지점이 있고, 그 지점이 무너지는 순간에 자유는 공포로 바뀐다. 이면에 있는 착종들. 본래적인 이성에 내재되고 있는 그 반대를 상정할 수밖에 없다. 절대정신 안에 비정신으로서의 광기가 내재해 있다. 또한 절대의식, 지식으로서의 정신은 그 이면에는 무의식적으로서의 무지가 내장되어있다는 말이다. 자유가 전제로, 기쁨이 공포로 도착 혹은 전도되는 지점을 설명해야 하지만, 그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변증법이 동원되는 것이다. 그래서 변증법은 서사화 전략이다. 사물의 사태라는 것, 정신에는 이면이 달라붙어 있다. 헤겔은 헤겔에 대한 막강한 오해는 정반합으로 인해 세상 모두가 화평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역사의 비어진 페이지다. 행복은 없다. 역사가 종말해도 우리가 행복할 것이라고 착가하지 말라고 헤겔은 말한다.

 

    

 

 

 

 

_기타등등  

  


 

_역사의 종말

역사의 종말은 언제인가, 절대적인 조화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 이념적으로 설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이념의 이면에는 광기와 무지 같은 도착의 지대를 가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우리가 상정하는 갈등과 부조화, 대립이 끝나고 하나로 통합되는 시대는 도래하지 않는다고 헤겔은 말한다.

역사 그 자체가 아니라, 역사의 종말은 역사를 살아가고 있는 주체로서의 이성, 정신이 자신의 목적을 완수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유를 찾아내는 것이며, 태초에 개념과 정의만 존재했던 정신이 세계사라는 시공간적인 과정을 최종적으로 다 거친 후에 이 세계를 나의 것으로 장악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모를 것은 없다. 다 나에게 주어져 있는, 다 내 것이었는데, 나는 모르고 투쟁했을 뿐이다. 이것도 내거야. 그러므로 받아드려야 한다. 어떻게? 지양을 통해서. 이성의 역사를 통해 가둬버리면 역사는 끝나겠지. 모르는 것이 없는 상태. 이 세상은 내 손안에 있다. 이것이 역사의 종말이며, 인식의 차원에서는 절대지의 상태이며, 감성적 형식으로서 예술, 믿음을 통한 형식으로서는 종교, 개념을 통한 철학을 통해 이월되어 가는 상황을 말한다. 진리를 인식하는데 감관을 의지할 필요가 없어진다. 세계의 진리를 내 것으로 가지게 된다는 것. 말 그대로 앎의 상태로 진리를 파악하게 되는 것을 절대지라고 한다. 헤겔을 향한 쉬운 비판. 역사의 종말이 있으면 우리네의 삶은 계속된다. 종말론에 대한 반비판. 삶은 그러나 계속 지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오해가 있다.

동시성과 비동시성은 같이 간다. 역사의 종말론이라 함은 동시성과 비동시성이 함께 가기 때문에.

역사의 종말이라는 감각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이냐. 종말을 얘기할 때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기원을 얘기하는 것은 종말을 보기 위한 것이고 종말을 얘기하는 것은 기원을 설정하기 위해서다. 근대인이 바라본 지난 세계, 그가 바라본 인류에 대한 서사화 전략을 바라본 것이다. 이른바 서사의 주체를 우리가 바라본 것이다. 헤겔이 하는 세계화에 대한 이야기들은 소설과 닮았다. 자기 시대를 서사화 한 방식, 모든 시대는 대개 그런 방식으로 삶의 사실과 자신의 관점을 담아 낸 것이다.

 

 

_철학으로서의 역사, 역사로서의 철학

파편으로 흩어져있는 사실들(fact)을 하나로 꿸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철학이다. 헤겔에게는 역사를 나열하는 것은 의미 없다. 차라리 그렇게 나열된 사실들을 어떻게 엮어 볼 것인가가 그에게 중요했다. 마치 푸코가 17~18세기는 정치경제학이 있고 생물학이 있고 언어학이 있으면, 세 개가 다른 분야라 하더라도 18세기 19세기 언어학과 18세기 언어학과 18세기 생물학 이 더 닮았다. 이것들이 서로 닮았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해체주의 아주 첨단적인 인문학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는 해체주의와서도 역사의 이야기성 서사로서의 역사는 인정됐다. 다만 복수로서. 헤겔은 여기서 단 하나, 여럿중에 하나라는 것을 헤겔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어찌 보면 헤겔은 이성의 간지를 체득했고, 자기 시대의 역사를 서술하고 끝맺음 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 그의 철학 뒷자리에서 니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역사를 그려봐라.

    

 

_반역사

헤겔이 설명하는 역사는 합리적이고 이성이고 관념적이라는 것은 반역사, 비판이 아니다. 반역사적이라고 하는 것은 헤겔의 종말론을 끝까지 밀고간다면 어떻게 되는지 보고자 하는 것. 해질녘의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되는 것. 그러나 해가지지 않는다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이 헤겔에 대한 반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혹은 ≪계몽의 변증법≫

    

 

 

_개념정리


    

 

1) 즉자적/ 대자적/ 즉자대자적

    

 

2) 추상과 구체[뼈와 살]

    

 

3) 물질과 정신 (77~80쪽)

 

    

 

4) 이성의 간지

① 로마 제국과 카이사르

    

 

② 십자군 원정이 역사의 타락, 퇴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결국 십자군 원정으로 인한 세계사의 의지를 타진하게 됐다. 즉 동 서양을 만나게 했고, 만방을 향한 자유의 확대라는 자신의 목적에 한 걸음 더 나가서게 된 것이다. 간교한 지혜[이성의 간지]라고 부르는 보편적인 목적에 따라 역사는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다. 요컨대 역사의 외적 형식을 피폐하게 만듦으로써 내면의 형식을 열어젖히고 있는 방식으로 역사는 나아간다. [로마 제국의 공화정과 카이사르가 갖는 일당 독제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 그렇다면 우리는 이성의 간지에 의해 역사의 의미는 ‘사후적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까지라도 자유로울 수도 없을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완전한 자유를 구가하게 되는 [혹은 절대정신의 발현이 되는] 헤겔의 “역사의 종말”은 현실이 아닌 픽션에 불과하다.

    

 

5) 사인(私人)과 개인(個人)의 구분; 상반될 뿐만 아니라 개념적으로도 대립함.

개인적(individual)이라는 것은 공동체와의 관계를 전제한 개별자의 자기의식을 가리킨다.

사적(private)이란 공동체와의 유대를 박탈당한, 원자론적 개별자를 가리킨다. -보편과 절연 당함. 중세 봉건적 제도

    

 

 

6) 헤겔철학에서의 일관성의 구도

    

 

신은 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을 인간에게 주었다. 따라서 신은 벌써 은폐된 것, 비밀스러운 것은 아니다. 우리들에게는 신을 인식할 가능성과 더불어 신을 인식할 의무가 주어져 있다. 물론 신은 심정이 협량한 인간, 머리가 공허한 인간을 그의 아들로서 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이 신을 인식할 것을 요구하고, 설령 그 정신 자체는 빈약하다 할지라도 신에 대한 인식을 풍부하게 가지고, 이 신의 인식에 모든 가치를 주는 자만을 그의 아들로서 원한다.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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