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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yond 선악, 니체 그리고 수유

노민화
 
니체선생! ‘비극의 탄생과, 도덕의 계보학’에서 만난 이후 2년만이네요. 이번에는 운명애(Amor Fati)를 넘어 ‘사랑할만한 삶은 어떤 것일까?’로, 명령형 아포리즘을 빅 퀘스천으로 바꾸어 물으면서 그 해답이 숨겨져 있을 매 강좌의 길섶마다 스몰 퀘스천을 던지며 자유로운 시선으로 니체선생을 만나고 있습니다. 특히 이진경 선생님이란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서서 선생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으니 니체 선생 저편까지도 크게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만남, 3시간 넘게 우리들의 불금은 니체 선생에 대한 탐구로 더 달구어졌지요. 제7장 ‘우리의 미덕’에서는 우리가 추구할 미덕은 무엇인가?를, 제8장 ‘민족과 조국’에서는 미래 유럽 민주주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를, 제9장 ‘고귀함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어떤 것이 고귀한 자의 도덕이라고 해야 할까?, 고귀함이란 대체 무엇인가?를 다시 물었습니다.
 
‘우리의 미덕’ - 우리가 추구할 미덕은 무엇인가?
 
‘우리의 미덕’으로 시작하는 7장은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미생’의 대사가 생각나더이다. 오상식 차장(이성민)이 옆팀 과장에게 했던, 인턴 장그래(임시완)를 몇 번씩이나 울컥하면서 되뇌었던 대사, "우리애라고 불렀다". 그래, 니체 선생이 ‘우리의 미덕’이라고 불렀다? 몇번씩이나 되네여본다. ‘우리 미덕이라고 불렀다’라고.
선생께서 칭한 ‘우리’라는 대명사에는 긍정적인 정신의 소유자, 자유정신을 가진 자, 미래의 철학자를 의미할 터이니, 새로운 탈주와 배치의 수유너머공동체 문하생으로서 동류의식을 가져도 되겠지요? 이 연대감속에는 6가지 의문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우리 길라잡이 진경 선생님은 풀어주셨습니다.
먼저,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좋고 나쁨을 선택하지 않으면 된다((至道無難 唯嫌揀擇, 지도무난 유혐간택) 승찬스님의 ‘신심명’의 첫문장으로 시작해, 공동체 붕괴와 와해의 원인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까지 연결되었습니다.
이것은 도덕적 심판이나 비난은 편협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덜 편협한 사람들에게 즐겨 행하는 복수이고, 또 제대로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데 대해 일종의 보상을 받으려는 행위이고, 정신을 고양시키고 품위를 갖추며 악의를 정화할 기회가 되기도 한다(219절). 따라서 도덕은 ‘한 사람에게 타당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타당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부도덕한 일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221절). 요컨대 중요한 문제는 그가 누구이며 그 다른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즉 이해하는 것이다(221절)
분별하지 말라. 수시로 올라오는 도덕적인 분별들을 경계해야 한다. ‘좋고 싫음 더러움 깨끗함, 옳고 그름’ 등의 선판단과 분별을 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함으로써 사태가 정확히 이해된다는 것이겠지요. 공동체 해체와 붕괴를 들여다보면 군자연한 리더들이 자기 판단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요구하고 평가하는 양태들이 있어왔음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대중적인 관심과 무관심을 대조시키면서, 당신은 무엇에 관심을 쏟고 있나요? 묻고 있다고하시네요.
보다 까다롭고 보다 세련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나 모든 비범한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고 관심을 갖는 것의 대부분에 대해 평범한 인간들은 전혀 ‘흥미를 갖지 않는’ 듯합니다(220절).
떼거리나 무리에 속하지 않는 까다로운 인간, 고귀한 인간들은 교육받은 사람들, 학자들, 철학자들을 포함한 일반인의 범주와는 관심사가 다르다구요?
관심 없는 사심 없는 사람들. 쓸모, 돈, 배가 부르게도 하지 않는데 일종의 평생 공부만 하는 사람들, 세속적인 것에 관심 없는 사람들, 사람들이 관심 없는 것에 관심을 쏟는 사람은 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구요? 니체 강좌에 앉아있는 수강생들은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을까요? 최소한 선생에게 관심을 두는 학인이라면 고매하고 고상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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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의지를 강화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질문을 해봐야한다고 우리 안내자 진경 선생님께서 강조하십니다.
의지를 쇠약 시키는 것을 비판하면서 힘을 만들어내라는 뜻인데, 어떻게 하라는 의미일까요? 보다 높은 자, 고귀한 자는 남들이 의욕 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의욕을 합니다. 남들이 관심 없는 것에 꽂혀 갈 때 높은 곳으로 향해하고 있는 중입니다. 가고자 하는 길을 미친 듯이 돌진하는 것은 의지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강도를 높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강화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 자기도 모른 사이 높은 곳에 올라가고 있는 것, 그것 자체가 의지를 강화하는 것이 아닐까요?


넷째, 감각의 고귀함은 무엇일까요?
역사적 감각(한 민족, 한 사회, 한 개인의 삶의 기준이 되는 가치 판단의 등급을 재빨리 간파하는 능력 혹은 이러한 가치 판단들의 상호관계와 더불어 여러 가치의 권위와 현실적인 힘들의 현실적인 관계를 통찰할 수 있는 본능‘)을 이야기하며(224절) 빨리 포착하는 능력을 역사적 감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선생은 나폴리의 키야에서 그 근처 빈민 지구의 하수구에서 풍겨 나오는 온갖 악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감각을 열어놓은 채 즐거이 황홀한 기분으로 길을 걷는 것과 유사하다며 셰익스피어 예술과 취향도 비판했습니다(224절). 그러나 이렇게 섞인 것이 천민적이라면 순수한 것이 고귀한가? 동의되지 않습니다. 선생께서 전형으로 삼은 호메로스는 19세기 그리스 환상을 그대로 보여줄 뿐입니다. 역사적 감각을 지닌 호메로스는 고귀한 것에 대한 취향이 있으면서 섞이지 않는 문화이기 때문에 그를 맛보는 법은 최대의 축복이라고 했지만 오히려 우리들은 하수구가 오염되었지만 즐길 수 있는 감각, 이런 것이 역사적 감각을 지녔다고 보고 있으며 호메로스의 지루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고귀한 감각은 다른 종류의 가치체계들을 많이 접촉해봐야 생깁니다. 교류가 많아야하고 이질적인 요소가 섞여있어야 가능한 것이지요. 그리고 내가 모르는 가치 판단이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하며 그것은 편협해지기 쉬운 오류를 줄여줄 것입니다. 
최근에 개봉한 드니 빌뇌브 (Denis Villeneuve) 감독의 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에서 보여준 것처럼 외계인의 등장을 놓고 지구에서 그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 "What is your purpose on Earth?"를 파악하지 못해 지구인들은 공포에 떨고 헤매고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인공 언어학자 루이스는 영어의 표음문자와 다른 햅타포드의 생소한 표음문자를 개인적, 집단적 의미를 내포한 언어소통방식으로 배워나가기 시작합니다. 결국 서로 새로운 언어의 중의적 의미까지 이해하며 양방향 소통이 가능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류와는 다른 비선형적 시간감각을 언어를 통해서 습득하게 된 것, 역사적 감각의 예가 아닐까요?

다섯째, 우리는 고통 속에서 어떤 힘을 볼 것인가?란 질문을 풀어갔습니다.
선생께서는 일반적으로 고통을 근절시키려 하지만, 실상 오히려 그 고통의 강도를 더 높이고 더 악화시키기를 바랄 뿐이다라(225절)고 고통에 대한 자세를 지적하였습니다. 고통의 훈련, 위대한 고통의 훈련, 오로지 이러한 훈련만이 이제까지 모든 면에서 인간의 향상을 이룩하게 한 원동력이었다는 것을 그대들은 알고 있는가?(225절)라고 하였지요. ‘큰 고통이 강한 자를 만든다. 고통 속에서 훈련만이 강한 인간을 갖는다. 동정 안에는 피조물에 속한 것과 창조자에 속한 것이 섞여있다. 그래서 창조적 힘에 sympathize(동정) 할 것인지. 피조물에 sympathize 할 것인지를 물어야한다고 진경 선생님께서 해석해주십니다.
우리 주변에 피해자 고통 받는 자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피해자들에 대한 연민으로 바라보는 것이 정당한가?라고 물어봅니다. 문학작품이나 영화, 드라마는 고전적인 비극 형식을 취해 쉽게 이 길을 답습합니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대의를 쫓다 죽는 영웅상, 영웅은 죽지만 그의 교훈은 살아남는다?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비극?,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특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정부군에 의해 민주화를 수호하려는 광주 시민이 학살당하는 사건보다는 맨손의 시민들이 무장한 공수부들을 쫓은 위대한 혁명적 사건으로 접근해봤습니다. 그 속에 “계엄군 아저씨,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까?”, “광주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편안하게 집에서 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 우리 동생,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라고 절박하고 애절한 목소리로 가두방송을 한 전옥주씨와 차명숙씨.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에 대항해 스스로 마이크를 잡은 이들 같은 분들의 창조적 힘에 연민을 품어봅니다.
강의 중 숙연한 분위기는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할때였습니다. 그들은 약자기만할까? 삶을 견디어 내는 힘, 그들이야말로 진정 강자이다. 언제 폐망할지 모르는 일본의 가해를 견디어 내는 그들. 죽음보다 더 힘든 삶을 견디어내는 것. 진짜 강한 것은 진실을 견딘다는 것. 이름이 들어나는 순간.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 후 주변 사람들이 떠나가고 가족들은 난감해하였습니다. 공식 피해자가 20만명에서 7만으로 널뛰기하는 상황에서도 실제로 증언하는 분들은 280여분 정도. 어떤 분은 올 3월에 개봉한 이나정 감독 영화 ‘눈길’에서처럼 평생 '종분'(김향기 분)이는 '영애'(김새론 분)로 살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진실을 견딘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2달도 어려운데, 25년 동안 한결같이 매주 수요 집회를 열고 시위한다는 것,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만이 아니라 어떤 영혼보다 강한자라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울컥하는 가슴과 맺히는 눈물로 동의를 했습니다. 반면, 엄청난 돈과 권력으로 사태를 미봉해보려는 일본 정부들은 드러난 진실을 숨기는 데에만 급급할 뿐, 소녀상 하나가지고도 쩔쩔매는 모습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얼마나 강한 자 선생께서 칭송하는 고귀한 자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위안부는 일본의 성노예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본 우익들, 그들이야말로 천민들입니다. 동정과 피해자 중심으로 바라본 위안부에 대한 시선을 거두어야 합니다. 피해자나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안에서 강한자를 찾아내는 것, 그들 안에서 어떤 힘을 볼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사태를 다르게 보게 할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다음으로 이야기 할 의무의 인간도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명령하고 자기 삶을 책임지는 자가 ‘의무의 인간(226절)’입니다. 법을 어겼을 때 그 결과가 무서워서 혹은 위반했을 때 댓가를 치루기 싫어 지켜내는 것은 약자들이죠? 그리고 의무와 관련해서 선생에게는 정직, 혹은 성실은 좋은 뜻은 아닌 것 같습니다. 스스로 정하는 성실과 복종하는 성실은 반대겠지요?
 
‘우리의 미덕’을 넘어가면서 한가지 아쉬운 점을 토로할까하오. 휴머니스트 니체 선생을 좋아하고 선생의 소리에 즐겁게 귀를 기울이고자함에도 니체 선생 안의 여성성과 끝내 화해하지 못한 것은 여전히 안타깝소. 배움은 우리를 변화시킨다(231절). 왜 선생은 여성에 대한 배움을 더 하지 못해소? 결국 찌질남, 니체 선생, 언짢더라도 솔직한 제 심정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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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가 사랑한 여인 루살로메,                                                                                          ▼ Lou Andreas-Salomé Film
                                                                                                                                              https://vimeo.com/166948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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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조국 - 미래 유럽 민주주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19세기 유럽은 민족주의의 광풍에 사로잡혀있었던 19세기 유럽, 왜 선생은 이런 글을 썼을까 거꾸로 의문을 갖고 읽어보고자 합니다. 독일인, 프랑스인, 영국인을 부르짖는 상황에서 선한 유럽인은 어떻게 가능할까? 결국, 유럽 민주주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의도를 찾았습니다.
유럽인들은 서로서로 닮아가고 있다. (...) 본질적으로 초민족적이며 유목민적인 인간형 즉 생리학적으로 말해 그 전형적인 특징으로서 최대한의 적응력과 적응 기술을 지니고 있는 인간형이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 그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같은 요구를 반복함으로써 그 민족의 육체와 정신의 양면에 그 민족 고유의 특성을 새겨주는 특수한 환경으로부터 점차로 독립해가고 있다. (...) 그런데 대체로 인간의 평준화와 열등화-유용하고 부지런하고 다루기 쉬우며 여러 가지로 써먹을 수 잇는 가축떼와 같은 인간-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그 새로운 조건들이 동시에 가장 위험하고 가장 매력적인 특성을 지닌 예외적인 인간을 출현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조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242절).
선생은 그동안 민주화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천민한 체제라고 악평을 해왔었던 것과 달리 다른 평을 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가장 예외적인 인간을 출현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조건이기도하다하면서. 초국가적이고 유목적인 민족이 나타나고 있다고 미래의 유럽인들에 대한 기대와 전망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민족적인, 국가적인 기질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미래의 유럽이 출현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민족을 넘어서 ‘유럽국가’라고 칭할 수 있는 통합체가 만들어져야 할 것이라는 바램을 가지고 있고, 기본적인 프로세스가 진행되고 있다고 진경선생님께서 가이드해주네요. 그럼에도 유럽이 하나 되는 것을 원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가장 명백한 조짐들이 간과되고 잇거나 제멋대로 왜곡되고 있다(256절)고 지적하고 있군요.
그렇다면 유럽을 다스릴 새로운 계급은 어떻게 육성될 수 있을까?라는 제안을 드려볼까합니다. 니체 선생의 저의를 먼저 궁리해봤습니다. 각 민족의 기질과 고유한 기질들을 지도해서 요소를 찾으려고 하는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니체적이 아닙니다. 비슷한 기질들이 형성되는 요인을 성명할 수는 있겠으나, 이것 역시 비속함에 속하는 것이지 고귀함은 아니다. 예외적인 자들을 고립시키는 것들일뿐이다. 민족적 기질을 아무리 조합을 잘 한다 해도 고귀한 유럽이 나타날 것은 만무할 것입니다. 근데 왜 니체선생은 썼을까요?
잘 섞어서 유럽기질을 만들자는 얘기는 아닐 것이라고 읽었습니다. 오해를 많이 나을 수 있는 예일텐데 나폴레옹, 쇼펜하우어, 바그너 등을 들었더군요. 이런 종류의 인간들이 미래의 유럽인이 되어야 하고 지도하는 계층이 되어야한다? 그러나, 이들 또한 19세기 민족주의 시류에 빠져 애국자로서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휴식을 찾고 있었을 것입니다. 조국에서 벗어난 자들,민족적 기질에서 벗어난 자들만이 미래의 유럽인들이라고 얘기하고자 함에도 진경선생님은 애처롭다고 하셨습니다. 기이한 침묵. 마르크스같은 국제주의자도 있는데. 당대를 살았던 마르크스에 대한 언급은 왜 없는가? 국제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민족주의는 언제 시작했는가? 난감한 위기에 몰렸거나 큰 폐배를 경험했을 때라고 하십니다. 대한민국은 1907년, 일본이 식민지 지배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밑작업을 한창 하던 시기에. 유럽은 나폴레옹 전쟁시에. 그런데, 민족주의자는 높이 올라가는 자의 멀리 봄이 아니라 편협함을 한계로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남들과 대립 속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주장할 뿐이기 때문에 가까이 있는 것만 봅니다. 그래서 강자의 반대입니다.
이들은 위험을 넘어서기보다 위험을 야기하는 자와 겨룰려고 합니다. 그리고 위험을 야기한 자를 비난하고 그들과 같은 크기의 힘을 가지기 위해 애쓸뿐입니다. 자신의 부정하는 힘을 부정하는 것 때문에 자신의 기원을 발명하려는 측면에서 천민적으로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다고 우리는 이해해했습니다.
민족을 넘어서는 스케일을 국가가 감당해낼 수 있을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토를 확장하는 것에만 매달려있기 때문에 약자들이 지배권을 확장하는 것밖에 안될 것입니다. 힘의 질은 달라지지 않고 민족적 기질도 달라지지 않음. 이들은 수직으로 넘어서는 자가 아니라 옆으로 영토를 넘어가는 자일 분입니다. 넘어가는 자와 넘어서는 자는 반대편에 있다고 우리는 바라봤습니다.
8장의 글은 급하게 쓰셨습니까? 잘 다듬어지지 않은 글 때문에 가독이 쉽지 않아 정리또한 어렵게 마쳐지는 것 같소.
 
▼ 독일 라이프찌히 근처 뢰켄(Röcken)  여행 중 들러볼 수 있는 교회 입구에 있는 조각상
니체의 아버지가 시무하던 교회이면서 그가 잠들어 있다. 가족의 묘, 그리고 니체의 묘 그 가운데 그의 누이 에리자베스 묘가 있다.
꿈에서 보았다는 자기 모습, 발가벗고 모자로 아래를 가린 동상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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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함이란 무엇인가?’- 어떤 것이 고귀한 자의 도덕이라고 해야 할까?

 
세 번째 강의의 하이라이트 선악의 저편 9장 얘기를 시작해볼까 하오. 9장은 명강사 진경 선생님께서 ‘니체에 대한 니체적 해석’ 글을 올려주셔서 간단하게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고귀한 자의 도덕, 즉 자유인의 도덕은 선생이 말하는 귀족의 도덕과 크게 다를 것입니다. 고귀함을 정의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19세기 민족주의라는 시대적 니체의 악조건을 고려하면서 니체적인 것에 비추어서 니체를 크릭틱하게 읽어보려고 노력했답니다. 우리의 호의가 기특하지 않소?
그리고 니체의 악조건을 친절하게 19세기의 유럽과 유럽주의, 19세기의 ‘생명’ 개념 내지 생물학 관점에서, 대결하는 적 자체 등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설명을 들었습니다. 19세기적 지식과 사유의 지반이라는 조건 안에 갇혀 있는 상황속에서 문제의식을 제대로 다루려면 개체들의 가시적 특징이나 19세기의 지적 상황, 그리고 개체주의적 사고를 넘어서 다시 이해해야 한다고 하시네요.
오늘 강의의 하이라이트라고 꼽는 이유는 존재를 공생체로 바라보면서 선생께서 매여있던 시선을 넘어서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의 세포조차도 공생체다. 하나의 유기체도 공생체다. 어느스케일로 보는가?가에 따라, 투쟁이냐 협조체냐가 갈리게 될 것입니다. 니체 선생을 만날때마다 여혐과 더불어 묘하게 심기가 불편했던 게 관계중심이 아닌 개체중심 속에서 사건을 이해하고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이 답답함이 명쾌하게 해소되었던 시간이라고할까요? 생명운동을 개체들간의 생존경쟁으로 파악한 19세기 생물학을 넘어 개체조차 사실은 수많은 하위개체들의 공생체라는 점, 유기적 개체의 생존은 투쟁 이상으로 협력과 공생에 기대고 있다는 점,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이 생태계 차원에서보면 역설적인 공생적 순환계의 한 형태라는 점 등을 들어보시니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 연장선상에서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대립도 새롭게 조명되었습니다. 선생은 대립을 약화하고 협력을 강조하는 것을 비판하며 이기주의를 강조했습니다만(262, 265절) 공생은 이기적이며 또한 이타적.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것의 대립개념 자체가 죽음과 대비되는 생명 개념 하에서 개체의 생존만으로 생명을 이해했던 19세기 서양인들의 사고의 산물이라시네요.
끝으로, 힘의 의지와 힘에의 의지의 차이에 대한 감동적인 배움을 들어보시오.
선생은 둘을 구별하지는 않았지만, ‘힘의 작용’이 관성적인 것이라면(힘=관성=의지), ‘힘에의 의지’는 관성에서 이탈하는 것(클리나멘)이랍니다. ‘힘의 의지’는 쇳가루에 가해지는 힘의 작용처럼 힘이 발동시키는 의지다. 반면, ‘힘에의 의지’는 힘들의 ‘종합원리’다. 상이하게 분포된 힘들의 작용, 그에 따른 사건들의 발생이나 진행, 그 힘들의 분포를 바꾸려는 새로운 의지 등이 모두 힘들의 종합을 뜻하는 힘에의 의지의 작용이다.

원한이나 금욕주의적 이상, 허무주의 같은 것은 힘에의 의지가 반동적 생성을 향해 투여되는 경우다. 자기 힘의 증가가 아니라 대상이나 상대방의 힘의 감소로 치환되어 진행될 때, 상대방의 힘을 감소시키려는 부정적 의지가 작동하며, 이 의지에 따라 능동적 힘 또한 부정적으로 투여된다. 원한이나 앙심 또한 그렇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본능에 대한 적대감이 본능을 감소시키는 훈육을 통해 본능을 감소시키게 되는 것을 지향하는 투여방식이다.
그러나 모든 금욕이 그런 것은 아니다. 참으며 넘는 것을 통해 자신의 능력의 고양을 추구하는 금욕은 이와 다르다. 허무주의는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큰 힘과 대면했을 때, 그것과 대면하거나 충돌하려는 의지를 부정하여 그것을 추동하던 힘을 감소시키게 되는 경우다.
 
선생도 70여편이 넘는 음악작곡을 했다고하는데 철학자 니체와 더불어 작곡가 니체를 만났을 때 엄청 반가웠지요. 니체선생에 대한 관심이 여기까지라면 예외적인간의 후예라 하기 부족할까하여 니체선생께서 직접 작곡한 앨범을 같이 들어 볼까하오. 어떻소, 이만하면. 수유너머가 니체를 넘어 청출어람 가능성이 보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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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fcF23HsFpug


앨범은 1996년 발매된 가곡과 피아노곡 음반 『프리드리히 니체』, 가곡은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가 아리베르트 라이만(베를린 예술대 작곡 교수)의 반주로 불렀고, 이 음반의 해설을 쓴 음악학자 엘마 부데와 디스카우가 피아노 듀오를 연주했답니다.

다음 주부터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만납시다. ‘주인도덕, 노예도덕’ 그 진실 탐색을 기대하면서 어느 시인의 시구를 빌어 ‘손가락의 삶-쓰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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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9 [김진완의 시 세미나] 5강 후기 [1] 윤춘근 2022.05.06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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