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자료 :: 강좌의 발제ㆍ후기 게시판입니다. 첨부파일보다 텍스트로 올려주세요!


[차라투스트라 강독] 영원회귀 발제

박찬유 2021.07.23 17:58 조회 수 : 234

((주의!! 이 발제문은 개인적 소견이 많이 들어가 읽는 이에게 많은 거북함과 불쾌함을 줄 수 있습니다. 

이점 미리 깊은 양해의 말씀 드리고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어느 날 낮, 혹은 어느 날 밤에 악령이 너의 가장 깊은 고독 속으로 살며시 찾아들어 이렇게 말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즐거운 학문> 중에서

 

 

여러분은 만약 다시 태어나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있으십니까?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시리아 난민으로 태어나거나 혹은 브라질 원시림 원주민으로 태어나거나 혹은 몽골의 늑대로 태어나거나 혹은 남태평양의 이름없는 물고기 플랑크톤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혹은 여러분은 과거에 이미 수 차례 수 천번 수 만번 태어났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과거 삼국시대 노비로 태어난 삶을 살았고, 1900년대에 1차 대전의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터를 누볐던 병사로 삶을 살았고, 그런 내가 지금 현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혹은 여러분은 수천번 혹은 수만번 죽어 끝도 없이 미래에도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미래의 모습은 환상적이고 경이롭고 상상을 초월하는 멋진 미래뿐만 아니라 끔찍한 미래도 옵니다. 복제된 인간이 인류를 지배하는 세상, 모든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나의 생각과 일상이 통제되고 마치 컴퓨터의 게임상의 한 모델이 되는 것.

그러나 이것은 가상이 아니다.

 

위 글 <즐거운 학문>에서 밝히고 있듯, 니체에게 영원회귀는 엄청나게 두렵고 역겹고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차라투스트라(이하 차라)에도 나오지만 실제 니체는 1881년 스위스 그 호수에서 그 영감적 계시를 얻은 후 1주일간 누워 있었다고 한다.

 

 

1. 니체의 영원회귀 구상

문헌학자로 니체. 천재 니체.

니체는 이미 19세때 영원회귀 철학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과학공부에 엄청난 시간을 투자하였으며 쇼펜하우어와 인도철학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또 더 젊어서는 그리스철학 특히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것을 공부하다보면 영원회귀 사상이 많이 접하게 되는데 이 영원회귀 세상은 이미 고대 이집트 사상으로부터 기원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기원전 8세기 전부터 이미 이 사상이 뿌리내리고 있었는데 특히 인도를 포함한 아시아(특히 티벳) 국가들에서는 이 영원회귀 사상이 윤회라는 형식으로 훨씬 더 폭넓게 광범위하게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 

니체가 엄청난 독서가이며 과학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던 만큼 그의 관심사는 자연스레 영원회귀로 흘러갔을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 기반은 당시 19세기 과학의 우주론에 바탕으로 둔 것으로 무한한 시간, 유한한 공간, 마이어의 에너지보존의 법칙에 기반을 둔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양자역학의 출현으로 이것이 붕괴됨. 시간도 공간도 무한한 것이 아니며 언젠가 팽창을 멈추고 사라진다는 것.

어쨌든 니체의 영원회귀 철학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혹은 천개의 고원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차라에서 영원회귀는 사실 구체적으로 묘사된 부분이 없다. 니체가 영원회귀를 발표하기를 되게 망설이는데 이 사상을 본인 스스로도 확실히 납득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니체가 아무리 과학공부에 관심을 가지고 열중하였더라도 영원회귀를 과학적으로 증명해낸다는 것은 역부족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가 사실 차라를 자신의 진정한 사상을 펼칠 현관으로 생각한다. 그가 지을 진짜 집은 <권력의지>와 <영원회귀>라는 책으로 나중에 다시 낼 구상이었다. 그러나 아다시피 그는 오랫동안의 지병이 있었고 끝내 이 지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져 생을 마감했다. 그의 책이 완성되었더라면 그의 철학과 사상이 미치는 임팩트는 어떠했을까 생각해 본다.


2. 영원회귀의 내용과 오류

①시간의 영원회귀. 시간의 영원성. 끝이 없음. 언제나 출발이며 상대적이며 종결은 없다. 시간의 좌표는 가장 오래된 것이 없으며 가장 나이 먹은 것이 없으며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이 새로운 출발이다. 항상 언제나 이 새로운 출발만이 있을 뿐이며 반복된 과거의 시간이다.(일부 학자들의 계절성 순환, 공전을 얘기하는데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음. 그것과 비슷하지만 그런 류의 영원회귀가 아님. 그런 류의 시간 개념은 종말이 있을 수 있으나 내가 생각하는 시간은 종말이 없으며 항상 새로운 출발이며 같은 시간만이 반복되어 이어질 뿐이다.)


②존재의 영원회귀(만물의 순환)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한 오류?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니체는 당시까지 발전된 물리학적 이론의 힘을 빌려, 이 세계는 공간상으로는 유한하고, 시간상으로는 무한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그렇다면 우주 공간의 모든 사물은 무한한 시간 동안 무한히 변화를 거듭하다 보면, 결국 과거의 어느 상태와 동일한 상태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우주가 탄생해서 소멸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다 보면 오늘의 나와 똑같은 내가 다시 출현해 오늘 내가 사는 삶을 그대로 살게 될 것이다. 내가 사는 삶이 반복된다면, 시간이 무한하므로 결국 동일한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현대과학이 입증하듯 그렇게 될 가능성은 없으며 설령 비슷한 경우가 있다하더라도 아주 사소한 차이도 차이이며 완전한 동일자의 반복은 없다. 그의 사유는 모호하기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영원회귀의 대상을 인간에게만 한정시켰다는 사실이다. 영원회귀의 대상은 같은 것이 아닌 비슷한 상태의 차이나는 것의 반복이다. 그러므로 다시 돌아오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만물로(인간을 포함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3. 영원회귀의 극복
용기를 냄, 춤, 웃음, 디오니소스적 긍정, 힘에의 의지에 의한 생성의 기, 아모르파티(운명애)


용기는, 공격적인 용기는 더없이 뛰어난 살해자다.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함으로써 용기는 죽음을 죽이기까지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3부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

“그는 이제 더는 양치기나 여느 사람이 아닌, 변화한 자, 빛으로 감싸인 자가 되어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 지상에 그와 같이 웃어본 자는 없었으리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3부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

“오, 내 어찌 영원을, 반지 가운데서 결혼반지인 회귀의 반지를 열망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 나,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오, 영원이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3부 ‘일곱 개의 봉인’,

영원회귀는 시련의 대상이자 의욕의 대상이라는 것, 이것이 니체—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 체험을 통해 얻은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대들은 언젠가 쾌락을 향해 ‘좋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오, 나의 벗들이여, 그랬다면, 그대들은 그로써 온갖 고통에 대해서도 ‘좋다’고 말한 것이 된다. 모든 사물은 사슬로 연결돼 있고 실로 묶여 있으니. 그대들이 일찍이 어떤 한순간이 다시 오기를 소망한 일이 있다면, “너, 내 마음에 든다. 행복이여! 찰나여! 순간이여!”라고 말한 일이 있다면, 그대들은 그로써 모든 것이 되돌아오기를 소망한 것이 된다!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영원한, 모든 것이 사슬로 연결되고, 실로 묶여 있고 사랑으로 이어져 있는, 오, 그대들은 이런 세계를 사랑한 것이 된다. 그대 영원한 존재들이여 이러한 세계를 영원히, 그리고 항상 사랑하라. 그리고 고통을 향해 “사라져라, 하지만 때가 되면 되돌아오라!”고 말하라. 모든 쾌락은 영원을 소망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4부 ‘몽중 보행자의 노래’,

세계는 곧 시작도 끝도 없는 거대한 힘이며,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으며, 소모되지도 않고 오히려 전체로서는 그 크기가 변하지 않지만, 변화하는 하나의 확고한 청동 같은 양의 힘이며, ······ 자기 안에서 휘몰아치며 밀려드는 힘들의 바다며, 영원히 변화하며, 영원히 되돌아오고, ······ 여전히 자기 자신을 긍정하면서, 영원히 반복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스스로를 축복하면서, 어떠한 포만이나 권태나 피로도 모르는 생성이다. 영원한 자기 창조와 영원한 자기 파괴라고 하는 이러한 나의 디오니소스적인 세계, 이중적 관능이라는 이러한 비밀의 세계, 이러한 나의 선악의 저편의 세계, 이는 순환의 행복 속에 목적이 없다면 목적이 없으며, 원환 고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선한 의지를 갖지 않는다면, 의지가 없다. 그대들은 이러한 세계를 부르는 이름을 원하는가? 그 모든 수수께끼에 대한 하나의 해결을? ······ “이러한 세계가 권력의지다. 그리고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들 자신 역시 권력의지다. 그리고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니체 전집 18 유고(1884년 가을~1885년 가을)》, 435~436쪽

니체는 고통에 짓눌리는 자기 존재가 “갈기갈기 찢긴 디오니소스”와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삶은 결코 고통에 지지 않는다. “그는 다시 태어나고 피괴로부터 다시 돌아온다.”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마음속 깊이 간직한 영원회귀일 것이다. 언제나 파괴당하면서 다시 부활하고 되돌아오는 삶에서 니체는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를 보았다.



“괴테는 자신의 삶을 운명적인 것으로 보면서도 그것을 기쁘게 긍정한다. 괴테는 자신의 삶의 모든 순간순간들, 심지어 고통스런 순간들마저도 무의미한 우연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고양을 위해서 필연적인 것으로 긍정한다.” “니체의 운명애는 피할 수 없는 숙명에 단순히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이 내던져진 우연한 상황들을 자신의 고양을 위해서 필연적인 상황으로 승화시키라는 명령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운명애란 수동적인 체념의 표현이 아니라 최고의 능동성의 표현이며, 우연을 자신을 위한 내적인 필연성으로 형성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박찬국은 이 운명애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의 토대를 이룬다고 말한다. “진정하게 운명을 사랑할 수 있는 자, 맹목적으로 순환하는 것 같은 삶의 과정을 자기 고양의 필연적인 계기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만이 영원회귀를 원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영원회귀와 운명애는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운명애는 영원히 회귀하는 삶에 대한 주체적 대응 방식이며, 영원회귀는 운명애가 감당해야 할 삶의 도전이다.

 

 

4. 니체 영원회귀 극복에 관한 비판(개인적 의견)

주사위놀이. 주사위는 우리가 그것을 객관적으로 대할 때 하나의 놀이로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영원회귀라는 것은 우리는 피동적 입장으로서 내던져지는 존재이며 때로는 가혹한 환경에 처해지는 것도 수반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난민으로 태어나거나 전쟁터에 처해지거나 혹은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에 태어나거나 할 경우 이것은 단순히 주사위 놀이로 이해해도 될까? 혹은 평생을 우리안에 갇혀 숨막히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육동물의 삶을 단순히 주사위 놀이로 이해할 수 있을까? 혹은 미래에 블레이드러너 영화와 같은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처참한 모습이 과연 단순히 예측이며 우연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영원회귀는 정말로 끔찍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세상과 세계는 긍정과 부정에 상관없이 흘러가며 용기와도 전혀 무관하다. 그리고 또한 춤과 웃음과도 무관하다. 단지 세상은 과거에 존재했듯 존재할 뿐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이성과 도덕을 벗어난 세계가 “단지 존재”할 뿐이며 그것이 영원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차라리 이름없는 들꽃이나 몽골 혹은 아프리카 외진 곳 어디에 사는 이름없는 들짐승으로 사는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해보았다

혹은 오늘날 나는 지금의 20대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그러나 그것이 천만다행이 아니란 것은 명약관화하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니까

니체와 질병, 니체를 이해할 때 질병과 고통을 배제하고 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질병과 고통이 그의 사상을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니체는 죽을 때까지 여러 질병에 시달렸으며 생사고비를 넘나드는 큰 고통도 수차례 겪었다. 발작도 숱하게 겪었을 테지만 그는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내가 그를 높이 평가하고 그의 영원회귀의 허무를 극복한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나도 과거 크게 아픈 적 있었던 사람으로(한 때 너무 아파서 누군가 날 죽여 주었으면 하는 질병이 나에게도 있었다) 니체가 글을 씀은 단순히 머리로 쓰지 않았음을 몸으로 느낀다. 그 최후의 허무적 공허함과 고통을 이겨내고 끝끝내 긍정으로 승화하려는 그였기에 나는 그의 삶의 긍정을 수용하고 받아 들인다. 단순히 말로서 머리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 잡설 **

차라투스트라를 처음 접했을 때.

2번의 큰 전율을 느꼈다.

첫 번째는 가치창조=가치파괴=자기파괴

 

두 번째가 영원회귀.

 

순환과 어울림(내 블로그 글)

순환과 어울림 | 내 멋대로 굴린 글

진영우(眞永友) 2015. 6. 19. 17:14

수정|삭제|비공개

 

"이 세계의 큰 진리는 바로 이것이다.

영겁의 시간을 두고보면 순환이며

현재를 들여다보면 어울림이다.

순환이란 모든 물질은 결국 다 돌고 돈다는 것이다. 나의 몸은 수억년 전 저기 멀리 아프리카의 공룡이나 맘모스의 일부였던 것이 지금 나의 몸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 될 수 있고, 나 또한 결국 언젠가 분해되어 다른 어떤 물질속에 여러곳에 흩어져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것은 없으되 늘 순환되며 반복되는 것이다.

어울림이란 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가 어울러짐을 이를 수 있으나 이는 공간적으로도 해당되는 개념이다. 늘 주변의 모든 것들과 상호작용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그저 좋은 표현으로 어울림이라 하였으나 이는 약육강식의 적자생존도 있을 수 있으며 혹은 인간사에서 관용과 베품도 해당된다. 어울림이란 표현을 쓴 것은 일체의 모든 현상의 상호작용이 물리적이든 화학적이든 모든 것이 제자리에 맞게 어울려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모든 것은 옳고 그름도 없어 그저 어울릴뿐이다."

 

이것은 니체가 그러했듯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바보 멍청이 생각은 아닌지, 소심하게 가슴 답답하게 지냈던 것이 니체라는 위대한 철학가에 의해 검증이 됐고 이점이 나의 오래 묵은 체증을 시원하게 가라 앉혀 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나에게 오래된 숙원과도 같은 난제 윤회의 벽을 단번에 부수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다면

나는 불교에서 윤회는 없다고 말하겠다.”

 

 

** 기타의 잡생각들 **

자살하면 고통이 사라지고 끝이 날까?

 

우리는 감옥에 살고 있다. 늘 감옥에 사는 사람은 자신이 감옥에 있는지 모른다.

우물안 개구리는 한번도 우물을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자신이 우물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감옥에 사는 것이나, 절에 사는 것이나, 매일 바쁜 일상에 쫒겨 자신을 망각한 채 살아가는 삶이나 다를 게 뭐가 있나

 

 

시간의 상대성

 

오로지 영원한 지금만이 있을 뿐,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하루살이에게 시간은 단지 하루만 있지만 그에게 시간은 수십만년이 될지, 수억년이 될지 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우리 인간에게 150억년의 우주, 40억년의 지구, 100살의 인간이 있지만 이것은 그 어떤 외부의 세계에서는 1초가 될지 1분이 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우주는 성주괴공한다. 스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유에서 무를 창조한다.(이것은 현대물리학이 밝혀낸 사실)

 

--영원회귀 극복?에 관한 나의 입장을 잘 대변해 주는 글 ^^

“어떤 사람이 묻더라구요.

스님 만족하시냐구..

대만족이라고 했더니

뭐가 만족이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나 태어날 때

아무것도 안가지고 왔는데

세상에 태어나니까

살악산도 있고 백담계곡도 있고

태양도 떠 있고

별도 떠 있고

다 있더라구요.”

<EBS 한국기행, 가을산 표류기 2부 설악에 가을이 불타오르면> 중에서

 

 

나는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한 마리 참새로 태어나고 싶다.

다시는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록 어느날 매가 하늘에서 날아와

나를 낚아채 가더라도

나는 진정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어제도 모르고

내일도 모른채

순간만을 영원히 사는

참새로 태어나고 싶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꾸벅~

 

 

 

-----------------------------------------------------------------------------

참고 서적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인생에 한번은 차라투스트라. 이진우

3. 니체, 실험적 사유와 극단의 사상. 이진우

4. 니체 극장. 고명섭

5. 니체. 정동호

6.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해제). 백승영

7. 니체 유고(해제). 백승영

8.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고병권

9.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메타포로 읽기. 최상욱

그 외 해외번역서적으로 니체에 관한 3대고전이라 하는

하이데거의 니체,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코플로프스키의 니체의 악순환 등이 있음.

(위 책을 다 읽은 건 아니고 영원회귀에 관한 부분만 간략히 읽었습니다. ㅡ,.ㅡ 그리고 해외서적은 그런게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고 읽을려니 당췌 뭔 소린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ㅠ)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06 [문학, 새로운 감응들의 발명] 4강 후기-투르니에 『마왕』 이시스 2022.11.03 41
605 [문학, 새로운 감응들의 발명] 3강 후기 노랭이 2022.10.28 46
604 [나는 누구인가] 제2강 간단후기 오나의고양이 2022.10.19 95
603 문학, 새로운 감응들의 발명. 제 2강 후기 안영갑 2022.10.16 72
602 [문학, 새로운 감응들의 발명] 1강 후기 가온누리 2022.10.11 72
601 [위기의 지리학, 미래의 인류학] 1강 후기 hongmin 2022.10.11 59
600 [문학, 새로운 감응들의 발명] 제1강 올랜도 후기 [1] 라우승 2022.10.08 61
599 [화엄의 철학, 연기성의 존재론] 마지막 후기(6강) [4] 유택 2022.08.17 237
598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제 6강 후기 달타냥 2022.08.15 93
597 아무튼 짧은 영상 만들기 5강 후기 [1] 최승현 2022.08.12 105
596 [아무튼 짦은 영상 5강-강의 후기] [1] 옥뻥 2022.08.09 77
595 [화엄의 철학, 연기성의 존재론]5강 후기 [1] 고키 2022.08.05 126
594 [아무튼 짧은 영상만들기]4강 후기 [1] 이승희 2022.08.04 85
593 천개의 밤 뜻밖의 읽기 2강 후기 안호원 2022.08.02 58
592 여성의 목소리는...... 4강 후기 에이허브 2022.07.31 125
591 [천 개의 밤, 뜻밖의 읽기] 3강 후기 [1] Jae 2022.07.29 85
590 [천 개의 밤, 뜻밖의 읽기] 3강 후기 [1] file 생강 2022.07.29 68
589 [여성의 목소리는 어떻게 정치적 목소리를 갖게 되는가?] 4강 후기 바람돌이 2022.07.27 100
588 [영상워크숍] 아무튼 짧은 영상 만들기 :: 3강 후기 [1] 진선 2022.07.22 49
587 [영상워크숍] 아무튼 짧은 영상 만들기 :: 3강 후기 [1] 순두부 2022.07.22 71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