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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영원회귀 4주차 후기

싸미 2023.02.12 11:39 조회 수 : 88

들뢰즈와 영원회귀 4주차 후기
 
[우연된 경험이 반복되는 필연, 그것을 넘는 주사위 던짐]
 
 
 
이번 후기는 좀 다른 방식으로 써보려고 한다. 이제까지는 내가 이해하는 지점 그리고, 이 후기를 공통적으로 이해될 거 같은 지점된 교집합된 구성을 가지고 썼지만, 이번에는 그저 내가 들으면서 느꼈던 '개인적'인 이해만 포커스를 두고 분출하기 위한 방식으로 쓰려고 한다.
 
이제까지 한번도 내가 공유한 바가 없었지만, 최근 내가 철학을 대하는 자세에 변동이 있다는 사실과, 그리고 개인적으로 철학을 연구하시는 분들에 대한 감탄에 대한 부분. 그리고 나는 어떻게 철학을 받아들이고 싶어하는가에 대한 내 개인적인 욕망에 대해서도 포함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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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난 철학 단어를 있는 그대로 글로 쓸 수가 없다. 그러니까 강의안을 보면 감탄만 나온다. 내가 읽을 수는 있는지 덜컥 내 독해력에 대한 아쉬움이 들지만, (이 뿐만이 아니라 다른 철학책 또한 그렇다.) 그저 나는 내가 철학수업과 책을 마주하는데에 있어서 어떤 '영감'을 받는데에 더 즐기는 편에 속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전시회를 둘러보는 이는, 미술작품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 가지 않는다. 그림으로 무언가를 느끼는게 좋기 때문에 간다. 음악을 들을 때 나는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 듣지 않는다. 음악이 내 감정을 들끓게 하고, 잠잠하게 하는 기분이 좋기 때문에 듣는다. 나의 독서와, 철학수업을 듣는 것도 그런 감각에서 듣는 자세이기에, 나는 '철학자'로 듣지 않는다. 그저 철학을 들어서 느껴지는게 있기를 바라는 목표로 듣자, 철학서를 파고들고 쓰려는 경지와 감각도, 어느 한 사람의 욕망과 잘 맞아야만 생기는 영역이라는 사실도 발견하게 된다.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과 연주를 하는 것이 다르듯, 그림을 좋아한다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것이 다르듯 말이다. 어쩌면 이 얘기는 철학을 들으려는 분들에게는 너무나 평상적인 얘기일 수 있겠지만, 난 한 때 내가 머리가 좋아서 철학을 듣는 줄 알았다는, 언제 한번 우스개를 떠들어야지 벼르렀던 얘기를 지금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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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내게는 어떻게 들리는가에 대해서 좀 더 이어서 쓰는 것이, 수업후기에 맞물리기에 좀 더 쓰겠다. 철학수업을 들으면, 난 좀 편향되이 듣는다. 내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좋아하는 이유 중 분명한건, 그건 신체와 감정을 확장시켜, 세계관까지 다다르는 개념서기 때문이다. 언어는 삶을 사는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 어느 부족은, 상대적 위치를 지칭하는 (오른쪽, 왼쪽)이 없고 동서남북으로만 지칭되기에, 늘 그 부족인은 북쪽이 어디있는지를 알고 있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라고 상상해봤는데, 예를 들자면 자기가 자라온 환경에서 부모와 다른 사람들이, 추장집과 그 앞에 있는 장승과의 상대적 관계를 전지구적으로 봤을 때 북두칠성이 가리키는 방향과 늘 일치한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이제 그 아이는 모든 사물의 위치를 표현할 때, 하나의 기준을 인식해야 위치를 설명할 수 있는 한계때문에서라도, 늘 그 기준(북쪽)을 인식해야 한다는걸 달고 살아야 한다. 그 단어가 그 부족을 불편하게 만든 것도 물론 있겠지만, 그 제한덕에 덕을 보는 것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무튼, 난 에티카를 거친 이후로, 철학에서 '신체'라는 것을 빠질 수 없다는 것을 기준으로 사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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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제2부 정신의 본성 및 기원에 대하여
정의 3. 
 
관념이란 정신이 사유하는 것이므로 형성하는 정신의 개념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해명 : 나는 지각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개념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각이라는 말은 정신이 대상으로부터 작용을 받는 것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 반하여 개념은 정신의 능동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공리 2.
인간은 사유한다.
 
정리1.
사유는 신의 속성이다. 또는 신은 사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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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때부터인지, 신체-정신-'개념'과 이어지는 방식으로 추론하고 사유하는 방식으로 철학을 듣는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철학을 진짜 잘하는 사람은 '개념'과 '개념'을 연결지어서, -정신-사물로 역순으로 내려오는 방식이라면, 나는 들었을 때, 내가 신체에서 그 '개념'을 어디서 느꼈는지에 대한 경험으로 환유하지 않으면, 잘 못 듣는 방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식을 선호하는 것은, 내게 있어서 '개념'과 '개념'만으로 연결지은 방식으로는 내 기억에서 쉬이 증발되어 버리기 때문에, 재빨리 내 손-신체를 통해, 내가 받은 느낌을, 크로기라도 남겨놔야 내 마음에 어느 '상'으로 저장된다라는 자각이 있어서다. 후기쓰기는 내가 어떤 '인상적'일만한 철학을 경험했고, 그래서 어떻게든 기억해야겠다는 욕망에서 비롯된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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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개의치않고 내 언어로 쓰려고 한다.. 사실 나는 좀 걱정스럽다. 예를 들자면, 내가 국사 숙제로, 삼국시대에 대해 써보라고 쌤에게 권유받았는데, 나는 내 집안에서 일어난 삼파전을 쓰겠다는 식으로 글을 풀 것이기 때문이다. 비약적인 글이니, 뭔 뚱딴지같은 얘기기도 하니까 참고바란다. 이렇게 양해를 구했으니, 읽은 뒤의 여러분에게 혹시나 생길 반감에 대해서는.. 쓰미마셍. but 아이 돈 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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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생명체. 허나 꿈꾸는 인간.
 
난 정신과 관계된 신체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 자체만으로도 경이롭다. 마치 우리가 숨쉬는게 지구에게 공기가 있고, 폐와 심장이 유기적으로 활동하는 힘 때문이란 것을 알면서도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잠깐 숨쉬기 어려운게 고통일 때에서야 '감사'가 터지는 것처럼. 그 경이로움 자체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서론에 나는 어느 부족은 위치를 지칭하는게 동서남북밖에 없어서 늘 북쪽이 어딘지를 아는 부족이 있다는것을 밝혔다. 그리고 나는 한 때 오랜 종교생활로 내 세계에서는 '신'의 윤곽이 꽤나 선명한 채로 살았고, 나는 어느 계기로 '신'에 대한 실망으로 '신'을 내 의식속에서 지우기 위해, 내게 주어진 언어와 또다른 언어를 덧대야한다는 판단을 내렸다.(그래서 만난 '에티카'였음) 하지만, '자연'에서 나타난 것만 이해되어지고, '불완전한' 추측은 소거시킨 채, 보이는 것과 경험한 과거만으로만 해석되는 방식에서, 절망만이 느껴지는 필연에 멈춰버린 것이라면. 나는 다시 인간이란 존재는 '현재'너머로, '믿음'으로 사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욕망 또한 올라왔다. 그리고 그것을 수긍하게 하는 배움 또한 발견하게 되었다. (윌리엄 제임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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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종교가 기쁘게 거하고자 하는 곳은 이러한 풍부한 정령숭배적이고, 극적인 모습 속이다. 종교적 마음이 끊임없이 큰 감명을 받는 것은 자연현상들의 공포와 아름다움, 새벽과 무지개의 '약속', 천둥의 '소리', 여름비의 '온화함', 별들의 '숭고함'이지 이런 현상들이 따르는 물리적 법칙이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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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진리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신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때로는 육류 공급자로, 때로는 도덕 지원자로,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사랑의 대상으로 사용된다. 그가 유용하다고 증명되면 종교적 의식은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신은 정말 존재할까? 어떤 식으로 존재할까? 그의 본질은 무엇일까?' 등과 같은 물음은 수많은 부적절한 질문들이다. 신이 아니라 삶, 즉 더욱 풍요롭고 거대하며 만족스러운 삶이 궁극적으로 종교의 목적이다. 모든 그리고 단계마다의 발전에서 삶에 대한 사랑은 종교의 추진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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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윌리엄 제임스'
 
 
난 저자에게 감탄을 한다. 언어는 삶에 길을 낸다. 그리고 독자는 그렇게 '믿음'을 얻고, 그렇게 살 것이다. 그래서 난 독서로 만난 감명깊었던 문구는 필사해둔다. 그건 내 '믿음'이자, 세계를 해석하게 하는, 내 영혼에 깃든 어휘다. 나의 '동서남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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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에 문제에 대한 데이비드 흄이나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면, 행위가 한 사람의 케릭터로부터 흘러간다면 그 행위는 자유롭다. ... '원인'은 이미 원인과 그 효과, 행위와 캐릭터를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반면, 운명론은 결정론과 달리 끝, 즉 '결과'에서 시작한다. 그 결과를 한 사람의 캐릭터의 본성에서 주어지는 필연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그렇기에 솔로몬에 따르면 운명은 단순히(단순한)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 혹은 한 국민을 둘러싼 운명은 한 사람이 타고난 캐릭터, 그가 가진 능력, 그를 둘러싼 환경 등이 복합된 필연적인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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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솔로몬의 해석 : 결정론과 구별되는 운명론' 중에서
 
 
나는 '영원회귀'를 떠올릴 때, 자유로워보이지만, 자유롭지 않은, '고통받는 예술가'를 떠올린다. 최근에 본거라서 떠올리는 것이지만, '드렉아티스트'를 예시로 들 수 있다. 드렉아티스트는 고통받는다. 일반적이지 않은, 소수의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성애가 다수라면, 동성애는 소수이다. 그리고 동성애도 소수지만, 자신이 남성의 몸에서 여성의 본성을 따라가고 싶은 것 또한 느낀다. 신체를 거부할 수는 없다. 거부한다면, 죽음 뿐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나에게 환유시켜보자면. 나는 한동안 내성적이었고, 종교에 집착했었다. 종교는 부모의 세계였고, 나는 외동이었기에 쉬이 그 세계에 들어가고 싶어했다. 그리고 나는 문자로 통한 세계를 보는 것에 쉽게 젖어들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면서 내 세계가, 글을 읽고, 글을 쓰므로 피어나는 그 확장이 뭔가 모를 '발화'라는 기쁨, 연결되는 기쁨이 이렇게 즐거운 것이구나 이해했다.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웠다. 너무 어렸을 때 '성경'을 이해한 아이는, 친구와 대화하는게 못내 교리앞에서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못난 고지식함 또한 떠안게 되었으니까. 잦은 전학도 한몫했다. 그렇지만, 난 내 습성을 한 때는 저주하면서도 끝끝내 긍정하는 여정을 밟았다. 그게 내가 '살 수 있는' 길이니까.
 
더 확장해보자면, 철학자들도 화가만큼, 음악가만큼 예술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어느 빚을 지고 있다. 언어는 곧 세계고, 세계를 파괴하는 것도, 생성하는 것도 언어라는 것을, 그들의 펜은 그래서 강해진 것이기도 하지만, 못내 꽤나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에티카를 쓴 스피노자나,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나, 진화론을 주장한 다윈이나, 운명을 걸게 만드는, 역량은 그렇다. 자유이면서 반면 고통이다. 동성애도, 예술감각도, 철학감각도. 그들은 탁월하니, 초월하니, '자유'하다며 우러를지 몰라도, 정작 그들은 가지 않으면 안될거같은 본성에 쫓긴다. (운동선수들도 배우들도, 그들의 탁월한 본성과 역량이, 되려 성패에 좌지우지 될만한 조건에 휩싸이기 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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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어떤 이상한 놀이가 있다.
... 1) 미리 존재하는 규칙들이란 없다. 각각의 던져지는 수들이 자신의 규칙을 발명한다. 2) 우연을 일부만 긍정하고 필연적 귀결로 승패를 가르지 않는다. 3) 그래서 수들은 실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승패라는 필연적 귀결이 사라지는 순간, 우연은 필연에 종속될 처지에서 해방되는 점이다. 그것은 필연적인 승패를 가르는 셈 속에서 조각나지 않는다. 승패에 연연해지지 않는 노는 인간은 어떤 수가 나와도 그 수를 긍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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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영원과 순간. 우연과 필연 중에서-
 
 
드렉아티스트는 승패에 조각나지 않으려고 표현한다. 그게 그들의 주사위놀이다. 그들의 옷은 '가리려고' 쓰이는게 아니라 '드러내려고' 쓰인다. 물론 그건 드러내는게 아니라, '튀는거야!'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은 옷을 재해석한, 자신들이 발명한 규칙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승패가 있을까. 기성복을 입는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해서 쓰이는게 아니다. 바로 자신. 여성성을 가진 남자가 있다는. 동성애를 가진 남자가 있다는 등등의 소수성이 설 수 있는 영토를 만들기 위한 예술이다. 난 그 소수성이 일반 사람들에게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후기쓰기'도 나한테 남겨진 '소수성'의 하나라는걸 인정한다. 한 때는 감동받았던 것을 소상히 쓸 때. 누군가는 뭘 그렇게 깊게 파고드냐. 그냥 너만 알면 되지. 라는 핀잔을 들었던 때도 있다. 독서도 그랬다. 그냥 몸으로 체험하면서 알아갈 앎이 있는데, 굳이 책으로 세계를 보려는건 뭐지? 아는척하려는거야? 
 
하지만 난 안다. 
 
너무 자세히 쓰려는건 내 필력이 딸리고, 후기를 쓰려는것도 남들이 느끼는 것에 비해서는 조악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내가 어느 시간과, 그 공간에서, 내가 겪었서 보고 느낀 것을 관통해서 느껴오는 직관은, 포착한 것을 남기고 싶어하는 그 감동으로, 끝내 글을 쓰고 나서야 마무리된다는 것을 안다. 내 마음과 사고에서만 일어나는 순간이지만, 그런 기쁨을 표현하는 쪽이, 사람에게 주어지는 기쁨들이 다양성을 풍요롭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욕망이다.
 
그래서 난 나대로 일부러 평범의 글로 쓰려고, 일상속의 무난한 단어들로 짜맞춰서 글을 쓰려는 고집도 있다. 그렇게 쓰고 싶은게 '나'니까.
 
나는 그 어느 중간에서 자라온 나만의 '소수'가 있으니까.
어느 누구라도 그 지점을 관철하는게 기쁘다면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의 시답잖은 '소수성'의 발견으로, 너의 '소수성' 또한 기뻐지게 된다. 너뿐만 아니라, 내 욕망도 어느 지점에서 '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자신에게 들어온 우연이 거기서부터 긍정하게 된다면, 그렇게 기뻐질 수 있다고 난 믿는다. 반면, 사람의 어느 이면은 기존 체제와 집단으로 보호받으며 협력하고 싶어하는, 보수라는 가치를 지니고 싶어하는 욕망도 있다는 것을 안다. (지자체에서 이슬람사원을 짓는것을 허가해준 것에 대해, 그 근방의 사람들이 그 공사현장 근처에서 고기를 구워먹는등 항의를 하고 있었다. 혐오, 반감을 통한 그들의 결속도.. 그들의 기억을 통한 '영원회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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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회귀'. 나는 한 사람의 기억은, 이미 그 자체로도,  과거를 유추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조차 상상하게 만드는, 무의식의 굴레로 또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상상을 통한 '경험'의 무한반복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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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이미 의식에서 사라진 어떤 정신 상태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혹은 우리가 당분간 생각하고 있지 않던 어떤 사건 혹은 사실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이때는 우리가 그것을 예전에 생각하거나 경험했다는 의식이 작용하게 된다. ... 기억은 또 하나의 사건이다. 첫 번째 사건과는 그저 닮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기억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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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원형은 밖에서 와야 한다. 공상 혹은 상상은 한 번 느껴진 원본을 복제해내는 능력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 복제가 그야말로 원형을 복사하는 것일 때, 그 상상은 '재생적'이라 불린다. 이와 달리 다양한 원형들에서 끄집어낸 요소들을 다시 결합시켜 전혀 새로운 완성품을 만들어낼 때, 그 상상은 '창작적'이라 여겨진다.
['상상'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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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원리', 윌리엄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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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봤을 때, 인간은 사실에 근거하기보다, 해석되어져서 감정에 남은 것을 떠오르는 것에 더 기민하다. 그러니까 늘 '상상'되고 '상상'을 누적시키고, 다시 '상상'을 생성한다. 그래서 '영원회귀'로의 탈출로의 유희적 주사위놀이는, 유의미하다. 드랙아티스트의 결정은 그러하다. 그는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고, 앞으로도 좋아할 것이며, 그것을 표현하기를 선택해서, 받는 모욕과 반감이 있어도 견뎌낼 것이다. 숨어지내는 고통보다 드러내는 고통을 택했다. 인간에 주어진 혐오와 반감의 굴레와 맞부딪히는 운명을 긍정해버린 것이다.
 
나도 내가 겪은 표현의 본성 때문에 한 때 오해받고는해서 이럴바에 안쓰고 말지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나도 생각해봤는데, 그냥 쓰고 말지라고 생각해버렸다.
 
...
 
좀 딴길로 샌거 같은 후기였고,
새기를 작정한 후기였다.
이조차도 나의 주사위놀이였으니 된거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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