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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7(토) 시네마토그래프 : 영화는 글쓰기다  6강 후기

지난 토요일 오후 7시 조금 늦게 도착한 탓에 앞부분을 놓치고 말았다.
영화는 앞부분이 중요한데 그러고 보니 다시보게 되었고, 지루했던 영화가 왜 그렇게 느껴졌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수정감독님과  앙드레 바쟁의 글을 함께 읽게 되었다.  

“문학적인 것은 영화쪽이요, 이미지가 들끓고 있는 것은 오히려 소설이다”
<‘시골사제의 일기’와 로베르 브레송의 문체론>에서 앙드레 바쟁은 <시골사제의 일기>는 원작 베르나노스의 책을 영화화하였는데, 문학적인 것을 희생시켜 시각적인 연출을 명백히 촉구하지 않고 반대로 무미건조한 어조와 느리고 애매한 몸짓등의 절제된 이미지를 이용해 문학적인 것에 더 가깝다고 칭송하고 있다.
 바쟁은 소설과 영화는 모두 이야기의 예술, 따라서 시간의 예술이라고 말하며 <시골사제의 일기>는 양자의 공통점을 이야기하기보다 그 차이를 통해 소설의 존재를 영화속에 해소하기보다도 소설의 존재를 영화에 의해 부각시키는 편이 좀더 성과가 있으리라는 것을 알게 해준 영화라고 극찬한다.
 
그러고 보니 영화의 반복되는 장면하나가 제목 그대로 신부의 나레이션이 나오면서 일기장위에 쓰이는 활자가 전면에 드러난다. 그것은  텍스트자체가 화면에 옮겨지면서 그대로 영화적으로 활용된 것이다. 스스로가 텍스트에서 출발했음을 전면화하는 방식을 통해 텍스트라는 한계를 넘어선다.
결국, 이미지화 된 텍스트, 혹은 텍스트의 이미지화, 일기나레이션, 사제가 직접 일기를 쓰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소설과 영화의 관계에 대해 질문한다.
‘시네마토그래프란 움직이는 이미지들과 소리들을 가지고 하는 글쓰기’ 라던 브레송의 말이 떠오른다.

영상과 텍스트의 관계는 텍스트에 유리하도록 결말을 향해 나아가, 거역하지 못할 논리의 요구하에 아주 자연스럽게도 마지막 순간에는 영상이 스크린으로부터 몸을 빼고 마는것이다. 관객은 하얀 스크린 상의 빛을 가능한 유일한 표현으로 하는 저 의미의 밤으로 점점 더 이끌려져 갔다. 그런고로 이른바 이 무성영화와 그 고원한 리얼리즘의 지향한 것은 그것, 즉 영상을 기화시켜 소설의 텍스트에다가만 자리를 내준다고 하는 그것인 것이다. 말라르메의 백면이나 랭보의 침묵이 언어의 최고 상태인 듯이, 영상이 없는, 문학으로 환원된 스크린은 여기서 영화적 리얼리즘의 승리를 보여준다라고 바쟁을 덧붙여 말한다.
수정감독님은 말레비치의 ‘흰색위에 흰색’을 회화의 한 예시로 설명해 주셨다.

바쟁은  베르나노스-브레송의 세계의 초월성은 각자가 거부할 수 있는 은총의 초월성이라며 영화의 전개를 떠받들고 있는 진정한 구성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비극의 구성인 것이 아니라 중세의 ‘그리스도의 수난극’의 구성,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의 길’(그리스도 수난의 사적을 14장면으로 나타낸  성화 앞에서 성도가 신앙심을 표하는 일)의 구성인 것이다. 라고 말한다.

사제에게 처음부터 마을은 감옥이였을까.
이미지들의 구도를 보면 주로 문뒤(창살같은 느낌)의 사제의 모습, 와인에 적신 빵만 먹으며 연신 퀭한 눈과 유난히 하얀 얼굴이 두둥실 떠다니는 장면이 러닝타임 내내 불안하다. 짐작되는 결말, 보는 내내 언제 죽는 걸까 생각하며 봐서 지루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제는 성자이며 그의 마지막 해방이 죽음의 받아들임이라는 게 점점 명확해진다. 살아있는 동안 투쟁했던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가 결국은 자신과의 싸움이였다는 것.
“모든 것은 은총입니다.”라는 사제의 마지막말에서 죽음은 십자가로 승화된다.


질문

그동안 보았던 <아마도 악마가>의 샤를의 자살, <당나귀 발타자르>의  발타자르의 죽음, <시골사제의 일기>의 사제의 죽음.  이 세 주인공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구원 받은 걸까.

지난 시간 브레송 영화의 주인공들은 정답 없는 윤리를 추구하는 주체들이다. 라고 배웠다.
도덕과 선악의 의미에 대해 되묻게 되는 윤리적 선택이란 무엇일까?
윤리적 선택이라는 게 과연 무엇일까.

조금 다른 맥락일 수 있으나 윤리적 주체, 믿음에 관한 한국 영화 세편의 여주인공들이 떠올랐다.

- 이창동 <시>의 양미자의 죽음과 시.
성폭행을 당한 후 자살한 여중생을 둘러싼 중산층과 교육 담당자들이 보이는 은폐. 미자는 마지막으로 한편의 ‘시’를 남기고 자살한다.


- 홍상수 <그 후>의 아름
아름(김민희/출판사신입사원, 등단을 못했지만 6년째 글을 쓰고 있음)과 봉완(권해효/출판사 사장, 문학평론가, 불륜남, 비겁한 남자로 묘사) 의 대화

아름: 왜 사시는 지 모르세요?

봉완: 사랑? 그렇게 말하면 되나. 그럼 다 아는 거야?

아름: 모르시는거네요.

봉완: 알 수가 있어야지 말이지. 말로 하나 지어내가지고 열심히 믿는다고 그게 진짜랑 상관없는거거든. 말로 말을 지어내는 것 뿐이지 그런건 진짜랑 상관 없어요. 진짜는 따로 움직이는거라  고.

아름: 믿지않고 사는게 좋으세요? 진짜. 그렇게 사는게 가능해요?

봉완: 아니 믿고 싶어. 믿을 수 있는게 있어야 믿지. 나 편리하자고 아무거나 믿을수는 없잖아.

아름: 아무거나가 아니라, 믿는 걸 찾으면 믿는 거죠.

봉완: 정말 믿는다는 게 진짜 실체랑 무슨 상관 있는데?

아름: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해보는 거죠. 믿는다는 걸 맞는 다는 거 아니까. 그냥 해보는 거죠.

봉완: 그니까 실체가 말로 잡히는 거냐고. 이게. 그런생각해본적 있어?

아름: 실체가 뭔데요? 정말로 실체가 우리가 알수 없는 거라면, 사실은 없는 거 아닌가요.
        그 없는 걸, 안다고 아는 냥 전제 하는 게 그게 거짓말 아닌가요. 오히려.

봉완: 없는 거 아니지. 그니까 말로 정리가 안되는 거지. 느낄 수는 있는 거야.

아름: 느끼세요.? 실체를? 그 느낌이 실체라는 걸 어떻게 아세요?
        아니, 그것도 마음이 지어낸 허상인지 그걸로 어떻게 아세요?

봉완: 말로 정리된 다는 게 실체하고는 상관이 없는거야. 그건 일단 조악해.

아름: 그렇게 말하는건 사실 게으르거나 비겁한 거 같아요.

봉완: 비겁해? 그게 비겁한거야?

아름: 믿는 걸 찾아내서, 그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살기 싫은 거죠. 힘드니까.
        믿는 걸 찾아내야 되는 거죠. 그 믿음이 자신을 건강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하면 되는 거지.
        아니 무슨, 그 알지도 모르는 실체라는 허상 때문에 우리가 당장 필요한 그 믿음을 거부하는 건 엉뚱한 짓 아닌가요.

이 땅에서 믿는 걸 찾아내서 열심히 살려고 하는 주인공 아름.

 

- 이창동 <밀양>의 신애

유괴범에게 아들을 잃고 신앙에 기대어 살다가 유괴범을 용서하려고 면회를 간다.

신애: 주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용서하기 위해 왔습니다.

범인: 저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

결국 신애는 범인의 말에 충격으로 인해 교도소 앞에서 쓰러지고, 기독교에 대한 저항을 하며 자살 시도까지 한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두려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영화가 시작될 때 하늘에서 빛을 보여주기 시작해서 마지막 무렵엔 땅쪽으로 빛 한줄기를  비춰준다. 이 땅, 오늘, 이 현실,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처참하고 허약한 인간의 모습이 현실적으로 와닿았다.

브레송 영화에서의 주인공들의 죽음이 하늘로 가는 성자의 모습과는 또 다른 주인공들의 모습. 또 다른 질문들로 다가온다.

 

1/ 29 (월) 7강 마지막 수업시간 후기

마지막 시간. 각자의 질문들을 가지고 와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각자의 개인의 역사, 경험, 생각들을 글이나 영상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에그톡님 -베란다에서의 사색(방충망 매미, 허약한 실 위의 나팔꽃, 새벽 어스름 빛, 눈이 내리는 날)
헥터님 -‘나는 내 뒤통수를 볼 수 있을까’에 대한 사진들과 1인칭, 3인칭 단상들, 질문들.
유수님 -자신의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싶은 내면의 질문(시골사제의 일기 속 사제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 금 바깥으로 발을 내딛어야 한다. 그곳이 어디든. 이부분이 인상적이였습니다)
두지님 -자신의 주말 일상을 담은 짧은 단편영상(클로즈업이 많았던 궁금증유발 영상)
브레송의 세계를 통해 한달동안 수업에서 만난 분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각자의 고민과 질문을 보고 들으며 자신의 언어로 말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지만 무엇이되기보다는 지금 이순간 무언가 하고 있는 행위자체가 중요할 것이라고 믿고 있기에 이 수업에 만날수 있었지 않았을까. 혼자 생각해본다.

마지막으로 수정감독님은 예술과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그것을 분리하지 말고,

일상생활에 온 감각을 열고 우연성에 내 몸을 맡기되 매의 눈으로 포착할 수 있는 낚시꾼의 자세에 대해, 그리고 그 가능성과 잠재성의 차이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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