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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주의 4강] 후기

조성주 2021.10.29 21:14 조회 수 : 91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1972년작 소설 『노변의 피크닉』은 외계생명체의 방문 이후의 지구를 다룬다. 통상 SF 작품에서 외계문명과의 접촉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방식과는 달리, 이 소설에서는 외계인과 인간 사이에 어떠한 대화도, 접근도 일어나지 않는다. 외계인들은 지구의 인간들과 그들이 이룩한 어떠한 문명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했고, 말 그대로 길가에서의 피크닉을 즐기기 위해 잠시 머물렀을 뿐이었다. 그들의 방문 이후, 그들이 머무른 장소들에서는 이상현상과 외계인들의 기계장치들, 점액질의 유기체 따위가 발견된다. 이 물체들에 접촉한 사람은 유전자 변형으로 인한 심각한 질환을 앓거나 위독한 상태에 이르는 한편, 반짝거리는 기계장치들은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재료가 되어 비싼 값에 거래되기도 한다. 주인공인 레드릭 슈하트는 바로 이 '구역'에 잠입해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채집하는 '스토커'인데, 구역이 내뿜는 유해한 생기적 에너지로 인해 예기치 못한 비극에 맞닥뜨리기도 한다. 그의 딸의 외형은 유인원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하고, 죽은 아버지가 괴상한 유령 같은 형태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외계인의 방문이라는 사건은 레드릭에게 실존적 위기를 안겨준다. 그러나 그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마지막까지 '구역'과 사투를 벌이며 그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잠재된 희망을 찾아내려 애쓴다. 

 이 작품은 대개의 경우 인간 실존의 부조리함에 대항하는 시지프스 신화의 SF적 알레고리로 해석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반-초월적 존재를 등장시키는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이미 우리 세계의 일부분이 된 외계의 흔적이 문제가 된다는 점, 게다가 그 흔적에 의해 주변 거주민들의 삶의 모습, 나아가 그 몸과 정신마저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구역'의 물체들('깡통','팔찌','검은 물방울','옷핀' 등)은 인간의 논리를 월등히 벗어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 과학기술 발전에 적극 이용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작중 한 인물이 이야기하듯, 인류는 이렇게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물체들을 가지고 '현미경으로 못을 박'거나 '왕의 인장으로 호두를 부수'는 정도의 탐구밖에는 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는 기술력이, 너무도 인간적인 방식의 목표에 이용될 뿐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한창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고 군비 경쟁에 집착하던 소련과 미 정부 사이의 신경전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 아닐까? 지난 세기의 수많은 사회과학 이론가들이 실증적 과학에의 무조건적 신뢰가 초래한 파멸을 비판하였고, 근대성의 기획에서 벗어나려 시도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소설 또한 독단적 이성에의 경계, 인간 대 비인간의 경계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근대적 이성을 비판하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기술과 물질의 무게를 강조하기 위한 시도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신유물론의 사상적 계기는 바로 이 지점에 있을 것이다. 68혁명과 후기구조주의의 근대적 이성 비판이라는 과업을 떠맡아, 갖가지 인간적 이분법과 경계들을 부수는 것. 캐런 버라드의 용어를 빌리자면 새로운 존재-인식론을 위한 이론을 창안하기 위한 시도들이 바로 신유물론(사변적 실재론, 객체-지향 존재론을 포함한)을 한 데 묶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인간이 정점에 서 있지 않은 세계를 상상하고, 기존의 사회학적 이론들에 의해 수직적인 방식으로 설명된 세계관에 사물들을 다시 가져오는 기획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이데올로기나 재생산, 상부구조-하부구조라는 구-유물론의 범주들이 아니라 행위자(actant)라는 이름으로 그 사건에 연루된 모든 물질적-문화적 요소이다. 내가 학교에 등교하는 과정을 설명할 때에도, 푸코주의자라면 물론 통치성과 규율의 내면화 등과 같이 인간 주체와 사회문화에 관한 개념들을 동원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에게도 행위자로서의 자격을 부여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설명에는 내가 집에서 나가기 위해 필요한 엘레베이터부터 경로를 찾기 위한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주로 타는 버스의 정차 버튼 따위가 더 중요해지게 된다. 인간의 활동을 구성하는 수많은 매체와 물질들을 포섭하려는 ANT(행위자네트워크 이론)와 같은 이론에 있어 중요한 것은, 사회의 보편 법칙으로부터 출발하는 설명이 아니라 국지적 우연성에 주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투르). 모든 상황은 우연적이고 조건들은 부분적이며 특수하다. 인간의 시점에서 세계 그 자체를 설명하기 위한 총체적 이론은 필연적으로 붕괴하기 마련이다. 인간은 더 이상, 아니 이미 한참 전부터 자연을 지배하고 사회를 구축하는 유일한 존재자가 아니라, 테크노사이언스의 수많은 기계장치에 예속되어 살아가는 하나의 노드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좌절하거나 실망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관계자보다 우선하는 관계들이 모든 주체를 성립시키는 존재론 덕분에 더 잘 살고 잘 죽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존재 그 자체는 더 이상 아리스토텔레스적 규정성에 구속된 정태적 대상이 아니라, 언제나 행위소들의 간-행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분적인 행위소들의 운동 그 자체가 된다. 물질과 비물질, 인간과 비인간까지 뻗치는 철저한 객체성의 이론들은 변혁과 창조를 위한 개입의 기회들을 더욱 선명히 펼쳐 보여준다.

 독일의 문학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카프카에 대한 에세이에서 오드라데크를 언급한다.

"카프카에게서 전세(前世)가 죄와 결합하여 만들어낸 가장 기이한 잡종이 오드라데크이다. ... 오드라데크는 "다락방, 층계, 복도, 현관 등에 번갈아가며 머문다." 즉 그것은 죄를 추적하는 법정이 선호하는 장소들과 똑같은 장소들을 선호한다. 다락방은 폐기되고 망각된 가재도구들이 쌓여 있는 장소이다. 법정에 출두해야 한다는 강압은 어쩌면 수년 간 버려져 있던 다락방 속의 궤에 다가가야 한다는 강압과 비슷한 느낌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 오드라데크는 사물들이 망각된 상태에서 갖게 되는 형태이다. 그 사물들은 일그러져 있다."

 평생에 걸친 이론적 도정에서 언제나 유대신학적 기반을 충실히 유지한 벤야민에게, 카프카의 오드라데크는 원죄의 상징, 그것도 '망각된' 원죄로써 주체에게 그의 비틀린 상태를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세계의 견고성에 대해 의심하게 만드는 기형의 장치로서 파악된다. 요제프 K는 당연히 알고 있었어야 할 죄를 잊고 있었고, 잊혀진 영혼과 동물들은 다락방에 머물다 불시에 나타난다. 가장이 근심하는 이유, 오드라데크가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음에도 그것이 죽지 않음으로써 가장을 불안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그 자체의 존재로 인간적 목적을 구현하지 않음이 원인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죽지 않는데, 왜냐하면 죽는다는 것은 어떠한 '마모'를, 즉 죽기 전의 목표와 행위에의 연관을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드라데크에게서는 그것이 일절 발견되지 않는다. 레드릭 슈하트가 가져오는 수많은 기계장치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적 논리와 인과관계에서 그것은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근대화와 독점자본주의의 맹렬한 발전 앞에서, 변증법적 혁명의 메시아를 희구한 벤야민은 이 에세이에서 '다만 세계를 바로잡을 그 메시아가 오면' 카프카의 모든 기형奇形들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공지능과 컴퓨터네트워크, 지구화된 자본주의 생태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초월성을 사유할 어떠한 근거도 언제나 이미 상실되어 있다. 네그리와 하트가 지적하듯이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에서 모든 존재론의 축은 초월성에서 내재성으로 전환되었고, 우리는 단순히 오드라데크가 사라지기를 바랄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주체 위주의 사고를 벗어나야 하며, 우리를 언제나 형성하고 변화시키며 사이보그-화 하는 수많은 알고리듬과 기계들을 포함한 지도를 그려야 한다. 그때 비로소 오드라데크는 더 이상 고통스러운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아니게 될 것이며, 우리의 생태적 기반을 구성하는 관계자로서 인식될 것이다. 도나 해러웨이라면, 전 지구적 생태계의 이반적인 반려종 가족에 오드라덱을 기꺼이 맞아들일 지도 모르겠다. 전지구적 네트워크에 연계된 인공지능과 메타버스가 대두되는 동시에, 기후위기가 가속화하고 온라인 플랫폼과 유연노동에 의한 착취가 어느 때보다 극대화하는 지금, 우리에게 가능한 사유의 틀은 시시각각 새로이 변화하고 있다. 근원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더 나은 장소를 찾아내려는 시도라면, 기계와 물질에 대한 더 철저한 관찰이 요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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