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것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건들’이다. 하지만 언어가 사건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가 ‘출발하는 것’은 말하는 자(현시작용), 말의 대상(지시작용), 말하는 것들(기호작용)에서 의해서이다(즉, ‘파롤의 질서’에 의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은 이 모든 것(=세 가지 의미작용)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건은 언어에 속한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속하는가?) 사건은 명제로 ‘표현’되고, 결국 명제 안에 ‘내속’(pré-insiste)한다. 그러므로 사건은 ‘표현에 기초와 조건을 부여한다.’ 결국 표현된 사건을 내속시키지 못한 언어/명제는 ‘단지 소음[...]에 불과할 뿐이다.’
언어의 조직화: (들뢰즈의) 요약
그렇다면 ‘사건은 어떻게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가?’ 이것은 사건이 지닌 ‘이중 지시’(référence)적인 특성에 기인한다. 이 이중 지시의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선 1)사건은 ‘물체적인 사태에 부대’(s’attribue)하여 사태의 ‘노에마적인, 비물제적인 하나의 빈위’가 된다. 결국, 사건은 사태의 노에마적 부대물로서 사태를 지시하게 됨(=지시1). 또한 2)사건은 언어/명제 안에 내속하면서 ‘의미’가 된다. 이때 사건은 의미로서 자신을 표현한 명제를 지시하게 됨(=지시2).
그런데 사건은 이 두 지시 항들, 즉 사태와 명제를 ‘표면으로 올리고’, ‘분리해 두 계열들로서 조직’한다. 이 분리에 의해 사태와 명제 사이에 경계선(ligne-frontière)이 생기는데, 이 경계선은 사태와 명제 양측에게 있어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비물체적 잠재력으로 작동’하게 된다.
이 경계선의 역할은 ‘발산하는 계열들을 수렴하게 만드’는 데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계선이 ‘발산하는 계열들을 그들 스스로 수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계열들을 수렴하게 하는 것은 하나의 ‘역설적인 요소’, 즉 그 경계선을 ‘주파하거나 계열들을 가로질러 순환하는 점’이다.
결국 언어가 가능하게 되려면, 즉 언어의 조직화가 가능하려면 1)형이상학적 표면(=표면 효과들과 사건들), 2)추상적인 비물체적 선분(=표면에 있어 사건에 내재적인 의미의 선분), 3)탈중심화된 점(=선분에 있어 무의미의 점)이 동시에 제시되어야 한다.
동사와 부정법
‘사물들 안에서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것’에 있어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접근 방식은 사뭇 달랐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언어의 가능성을 명사와 형용사 중심의 모델로 설명한 방면, 스토아 학파는 동사들과 이들의 결합/변화로 설명하려 하였다.
스토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언어의 가능성은 1)동사를 ‘최초의 행위’가 아닌 ‘사건의 표현’으로 보는 것에 있다. 또한 스토아적 언어 가능성은 2)어근을 언어의 ‘최초의 상태’로 상정하는 것이 아닌, 언어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형성적(formeteurs) 요소들의 작용과 반작용, 즉 물리적 작용(=소리를 내는 행위)과 의미론적 반작용(=내재적 시간의 형성)에 두는 데에 있다.
결국 사건의 표현으로서 동사는 (마치 사건이 사태와 명제를 ‘이중 지시’한 것과 같이) 1)물리적 시간(=현재) 속 ‘사태와의 관계를 표식’하고, 동시에 2)내포적 시간(=부정법) 속 ‘의미와의 관계를 표식’하는 두 극을 지닌다.
즉, 동사는 인칭도 현재도 목소리의 다양성도 없는, 아직 규정되지 않은 부정법의 형식에 있어 언어의 일의성이다.
[질문들]308쪽의 7-8줄 이하에서 등장하는
(1)‘표면’이 형성되는 지점을 어디이고, 그리고 형성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이중적 지시 항들’이 표면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3)그리고 빈위(사건)들이 이 두 지시 항을 ‘분리’한다는 것을 어떤 의미이며, 그 분리가 의도하는 바는 무엇인지요?
(4)그 분리로 ‘경계선’과 이후 309쪽에서 등장하는 역설적 요소로서의 ‘점’의 의미 또는 역할에 있어 차이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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