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 4강 후기 - 김혜영
'위버멘쉬 개념에는 여성이 포함되어 있는가?’ 라는 아주 초초 무식한 질문을 수업시간에 해버린 그 사람이 바로 접니다. 출연자 인터뷰시 이런 질문을 했다면 예의 없다 항의를 받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실제로 그래서 혼난 적도 많습니다). 강의 후기를 빌어 혹시 제 질문이 니체 철학에 깊이 감화된 분들에게 무례하게 들렸다면 먼저 사과드리며, 철학 쪼랩인 제 감상의 변을 써보겠습니다.
저는 차라투스트라가 가까이 가지 말라 충고한 시장 중 에서도 현대 자본주의의 꽃인 ‘매스미디어 - 상업방송’ 시장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현재 그 시장에서 연기자나 바람잡이 정도의 역할 노릇을 하고 있기에 저자거리 감성 그대로 속되게 표현하는 점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차라투스트라의 여성에 대한 글들은 처음 읽으면 시쳇말로 바로 ‘졸라 빻았네’ 라고 생각이 되어 버립니다. 최근 몇년간 ‘젠더 감수성’ 이란 단어를 모르면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세태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준에서 니체의 말들을 1차원적으로만 보면 여자들에게 고백하자마자 차이기만 한 문과생 너드의 혐오발언 수준 입니다.
하지만 니체는 100년도 훨씬 더 전에 살았던 남성입니다. 그가 쓴 글을 1차원 적으로 해석한다 해도 사실 별로 이상하지 않을 근대시대 입니다.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사상가나 예술가라도 결국 그가 살아낸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 시대의 감수성까지도 글과 예술의 한 부분일테니까요. 100년전 초식남의 시를 현대적 감성으로 재단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아마 강독수업 수강생이 아니었다면, ‘김풍이 그린 찌질의 역사 같은 이 병신은 뭐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이 강의를 듣기로 결심한 사람으로서 열심히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은 의무감(?) 이 들었습니다. 평생을 우등생 지향주의자로 살아온 서글픈 본능 일수도 있고, 자료조사가 몸에 배인 직업병 일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사'가 아닌 '사유'를 할 수 있는 날도 뭐 오겠지요.)
‘니체는 연애고자에 찌질한 여성혐오주의 찐따인가?’ 라는 의문과 더불어 '다들 위대하다 하니 뭐가 있겠지' 라는 기대감을 품고 그의 생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일단 찌질한 감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의 역사에는 변변찮은 연애나 사랑 이야기는 보이지 않았고 평생 싱글이었는데, 저의 흥미를 끄는 부분은 채찍을 들고 있는 살로메와의 썸이 아니라 레와의 동성애 의혹 이었습니다. 그가 이성애자가 아니라 동성애자 였다면, 여성성을 동경하면서도 정작 여성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제 첫 인상이 더욱 그럴싸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니체가 여성에 대해 잘 아느냐 잘 모르느냐, 헤테로냐 호모섹슈얼이냐, 쑥맥이냐 선수냐의 여부는 어쩌면 그의 글과는 상관이 없을수 있기에(김민수 선생님의 의견처럼), 수업전 부터 니체의 여성관에 대한 여러 의견들을 좀 찾아 보았습니다.
저의 의문에 가장 직접적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여성 또한 위버멘쉬라는 실족존적 과제를 수행하는 존재>라 설명한 백승영의 논문( https://s-space.snu.ac.kr/bitstream/10371/94288/1/9_%EB%B0%B1%EC%8A%B9%EC%98%81.pdf )과 <니체, 데리다, 이리가레의 여성 / 신경원> (절판되어 주요 구문을 발췌한 블로그를 참조 / https://m.blog.naver.com/hopeforplace/221984095437) 의 내용들 이었습니다.
난해한 은유적 표현으로 니체의 여성관은 꽤나 오랫동안 여성혐오주의자 라는 공격을 받았지만, 백승영의 논문 이전부터 데리다와 이리가레, 주디스버틀러같은 학자들에 의해 현대에 와서 그 오명을 확실히 벗은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학자들은 니체의 사상을 모방하거나 비판하며 페미니즘 제3의 운동을 열었다고 합니다.
니체의 여성관은 그의 철학처럼 페미니즘 - 안티페미니즘의 이분법적 논리로 설명할 수 없다는 백승영의 해석에 어느정도 공감은 가지만, 저는 여전히 니체가 '신은 죽었다' 선언한 순간 그를 제외한 모든 타자도 함께 죽었고, 여성은 위버멘쉬 진리를 위한 기호로 사용되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여성혐오주의 찐따라는 첫인상은 조금 지울수 있었지만 니체가 보여준 여성관들이 그가 주장한 궁극의 가치전복에 어울리는 말들 이었는지와 더불어 아직도 개인적으로 궁금한 질문들은 많이 남았습니다. 후대 철학자들의 해석 논리로 위버멘쉬에 여성이 포함되었다 아니다에 대한 여러 주장에 대해 제가 '아 딱 이거다' 하고 편을 들고 싶은 의견은 못찾았지만, 최소한 니체가 그의 덕을 여성과 남성을 구분해 베푸려 한 것 같지는 않다 생각합니다. (그게 니체에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도 아닌 것 같고요.) 여전히 존재하는 다른 몇몇 글들에 대한 단편적 거부감들(니체는 혼전순결주의자 인가?, 연애결혼 반대자인가? 당대의 페미니즘은 전복시킬 정도의 주류 가치였는가?)은 앞으로 시간을 가지고 고민해야 할 주제 입니다.
저는 현재로선 이리가레의 아래 주장에 가장 많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남성 주체가 취하는 ‘여성적 작업’과 여성이 취하는 ‘남성적 작업’은 전혀 다른 접근과 결과를 낳는다. 니체와 데리다의 여성적 작업은 굳건한 주체의 위치를 확보하고 타자의 목소리까지 모방하는 지적, 언어적 유희이다. 반면에 여성이 남성 중심의 담론을 모방하는 것은 선택의 여지없이 남성적 언어 질서에 순응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니체와 데리다는 페미니스트들의 ‘남성적 작업’에는 가혹할 정도로 비판적인 반면, 남성들의 ‘여성적 작업’에는 지극히 관대하다.>
철학은 사실 지적 유희가 맞으니 니체의 글을 시대를 앞서 가려 한 자의 위대한 시 정도로 가볍게 받아들여도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또 계속해서 강독수업을 들어야 합니다. 무식이 너무 탄로난 지라 줌으로 수업을 대체해 볼까 고민하다 결국 페미니즘 책을 구입 했습니다. 이것은 이 강의를 신청 했을 때의 최초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전개 입니다. 너무 피곤해 졌습니다.
사실 젠더 감수성이나 페미니즘 담론은 이미 중년인 저에겐 한국 조직 생활에서의 급변한 예의범절과 팔아야 할 물건에 대한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인식해야만 하는 매뉴얼이고, 최근 너무 빠르게 변하는 속도도 그렇고 개개인의 주관에 따른 해석까지 달라 매우 피곤한 분야 입니다.
앞서 젠더감수성을 모르면 일을 할수 없는 시대라고 말 했으나, 제가 일하는 시장에서 ‘젠더란 무엇인가?’, ‘왜 젠더감수성이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사실 실제로는 아무도 관심은 없다는게 진짜 현실임을 고백합니다. 감수성은 단지 소비자들의 선플과 별점 지표로 주입되기 때문에 더 높은 시청률과 광고판매를 위한 즉각적이고 휘발적인 개념일 뿐입니다. ‘프로불편러들의 악플을 피할 기계적 피씨함’ 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메뉴얼처럼 학습하고 있다는 게 좀 더 정확합니다.
페미니즘 또한 이 프레임 안에서 하나의 니치마켓을 형성하고 있고 여성들을 타겟팅 한 상품의 마케팅 수단으로 사용할뿐 누구도 그 본질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한국의 현실 사회나 조직에서 ‘차별’에 대한 누군가의 문제제기는 결국 힘의 논리로 해결되기 마련 입니다. 강자가 ‘그것은 차별이 아니다’ 라고 무시하면 문제가 없지만, 더 큰 강자(가령 매스컴 보도나 시민 단체의 항의)가 ‘그것은 문제다’라고 평가하면 또 ‘차별’이 됩니다. 이 힘을 주도 하는 것은 대부분 남성들이고, 저는 그 시장의 수레바퀴 안에서 매일 백가지의 평가에 휘둘리는 약자 입니다.
그래서 아직은 버틀러 이전의 ‘여성은 만들어 진다’ 같은 보부아르의 글에 더 밑줄을 긋고 있습니다
학문을 탐구하고자 하는 여성에 대한 니체의 평가적 문구가 결국 당대 학문의 부조리를 비판하고자 한 것이라는 해석을 읽기 전, 1차적으로적 짜증이 날 수 밖에 없는 것은 초인의 경지에 이르거나 밧줄을 건너려 시도하는 사람(혹은 남성)을 이 시장에서는 만나본 적이 없는 미천한 저의 경험 때문이고, 신은 죽었다 단언한 니체 처럼 저에겐 아직 초인도 신이나 다름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지금도 여전히 니체의 여성관에 대한 대단한 분들의 옹호와 변명이 그럴듯한 글에 대한 또 다른 글로의 포장이 아닐까 라는 철학 자체에 대한 의심도 조금 남아 있습니다.
수업시간에 드린 질문은 100년전 살았던 유별난 남자의 여성관 마저도 멋진 글을 썼다는 이유로 근대성을 벗어난 위대함으로 격상시켜 생각해 줘야 하나 라는, 시장에 사는 제 삐딱함의 발로 였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니체의 글에서 내 삶으로 빌어올 수 있는 확실한 하나는 나에 대한 가치평가는 내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성과 남성을 동일시한 당대의 페미니즘을 공격한 그의 의도가 결국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지배룰에 편입되지 말라는 충고 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여성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나의 평가 기준을 무엇으로 선택하느냐 또한 오롯이 여성인 내 결정의 문제 입니다.
시장의 룰에 길들여진 주류 세대 여성인 저에겐 니체와 그의 후예들이 남긴 여러 충고는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에게 주어진 빨간약 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글들이 막연한 감정적 프로불편러를 더 짜증나는 불만충으로 만들지 진정한 여성성이 무엇인지 깨달은 해방자로 만들지는 알약을 삼켜봐야 알게 될 일이겠지요. (늘 이런 선택 앞에 자본주의의 파란약을 100번 쯤 미리 삼켜온 내성으로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어쨌든 150년전 유럽의 어떤 찌질남 덕분에 직업병으로 댓글 울렁증이 심한 제가 오픈된 게시판에 이런 긴 글을 써 보고, TV를 끄고 책을 펼쳐 보고자 노력 중입니다.
니체가 위대하긴 하네요.
p.s : 류재숙 선생님의 국힙 TV쇼를 니체로 해석한 글을 재미있게 읽어 곡 하나를 덧붙입니다.
철학책을 읽는다 하니 중2병이라 놀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 그냥 딱 중2병 스럽게 멋있는 이 곡을 요즘 자주 듣고 있습니다.
피타입의 '네안데르탈' 중 저스디스 피처링 부분 입니다.
https://youtu.be/Zxc6hUnzq2c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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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글입니다. 이미 사유의 경지에 들어선 듯한 조사(?)입니다. 선생님의 지적은 굉장히 건강한 지적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딜 가면 이러한 주장을 더 볼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이었습니다. 이전의 청인지에서 도덕의 계보, 선악의 저편을 접한 상태에서 아직 제 안에서 껄끄럽게 남겨져 있던 부분이기도 해서요. 언급하신 블로그와 책, 논문들이 정말로 도움이 될 듯합니다. 당장 도서관에 가서 빌려야겠어요. :)乃
몇몇 인상적인 구절들을 정리해봅니다.
* ‘위버멘쉬 개념에는 여성이 포함되어 있는가?’
“내면의 타자가 여성의 모습을 띠는 것은 니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남성 사상가들이 자신의 정신을 여성성으로 정의내리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또한 자신을 삶과 투쟁하는 전사로 규정하고 자신의 내면에 죽어 있는 ‘더 나은 자아’를 여성성으로 규정한다. 이는 여성을 타자화 하는 남성 중심적 사고의 한계로 볼 수 있다.” (105)
“(거리를 지킴으로써) 남성의 욕망은 그것이 예술적이든 민주적이든 유지되지만, 그렇게 형성된 성‘차이’는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즉 거리, 대립적 ‘차이’가 유지되는 것은 여성보다는 남성의 이해에 맞춰진 것이다. …… 먼 거리에서 행동한다는 것은 철학적으로는 … 한 몸이 중간에 다른 기계적 연결 없이도 다른 몸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먼 거리에서 행동하기는 여성을 타자로부터 먼 곳에 떨어져 있게끔 하지도 않고, 여성 자신에 있어서도 자기 극복을 위해 필요한 거라고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은 결코 니체의 ‘위버멘쉬’가 누리는 종류의 자아의 미학을 구현할 수 없다.” (122)
“여성은 진리의 부재를 알기 때문에 진리를 아예 추구하지 않으며, 평등이 인간 본성에 불가능함을 알기에 평등을 애초에 요구하지 않게 된다. 그 결과 여성은 사회적 열등 존재, 가장의 귀재, 모순덩어리가 된다. 또한 출산 외에는 존재 의미가 없는 위치로 전락하는 것을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 아마도 이런 점이 니체철학이 페미니즘에서 관용적 이해, 오해, 반감 등 정반대되고도 다양한 반응과 감정을 야기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이리가레는 니체가 절대타자인 신을 죽인 순간, 다른 모든 타자를 함께 제거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모든 인간은 자신과 타자의 관계에서 생성과 변화를 겪는다. 니체는 절대타자를 제거함으로써 타자 여성의 존재도 지운다. 그 결과 그가 설정하는 타자는 사실은 자신의 모습을 비춰주기만 하는 자신과 동일한 존재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자는 아니다.” 139
‘저는 여전히 니체가 '신은 죽었다' 선언한 순간 그를 제외한 모든 타자도 함께 죽었고, 여성은 위버멘쉬 진리를 위한 기호로 사용되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본문에서)
아마 선생님의 질문과 문제의식과 감응은 위에서 인용한 글들의 맥락에서 조금더 뚜렷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 개인으로서도 문제시하고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여성을 진리의 기호로 삼는 순간, 여성은 기호화되고 상징화되어 꼼짝할 수 없이 첨점, 낭떠러지로 밀려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세상의 온갖 문제는 남성들이 짊어지고 세상의 고뇌란 고뇌는 모두 다하며, 여성들 그녀들만이 살아있다며 찬양하는. 이것은 전형적인 매너-남(근대 남성)의 오만이며, ‘찌질함’일 것입니다. 폼 잡고 고뇌하는 남자들의 얼굴, 음? 이 생각은 니체의 근엄한 초상을 보고 가속이 붙습니다. 니체를 읽은 남성들이 얼마나 위험한 지는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경험으로 알고 있지요. 여성을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잃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그렇게 취급하는 것에서 흔히 동네에서 나이먹은 카사노바가 ‘여성의 마음’을 논하는 그런 구역질 나는 이미지가 겹치는 것도 그 때문일까요.
이러한 점에서 이리가레의 말도, 선생님의 말도 정말로 적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는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니체가 죽인 신, 그것을 이리가레는 절대타자라고 일컫습니다. 그러나 니체가 죽인 신은 절대타자와 같은 것이었을까요? 저는 오히려 절대동일자를 죽인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또한 만약 신의 죽음으로 인해 휩쓸려가는 여성이 있다면, 그게 바로 ‘여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정의되는 여성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떠오르네요.
p.s. 써놓고 보니깐 너무 길고 장황하게 쓰는 바람에 선생님의 댓글 울렁증을 배려하지 못한 것 같아 죄송스럽네요...
정말로 다같이 생각해볼만한 지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의 힙합에세이를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그리고 피타입의 저스디스 피처링부분도 좋았습니다. ^.^ 니체의 위버멘쉬나 영원회귀에 대해 TV나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이, 니체를 읽기 시작하던 처음에는 좀 우스워보였지요.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그렇게 니체를 가지고 노는 것들이 좋습니다. 저스디스의 '위버멘쉬' 언급도 귀여웠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니체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서가 아니라, 나의 변화지요. 니체적 긍정을 이해하게 된!
니체를 좋아해서 니체가 공격받으면 쉴드를 하기도 하지만, 사실 저는 철학자 니체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니체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의 철학이 내 삶을 가볍게 만들어주었고, 더 많이 웃게 해주었던 때문입니다. 니체의 말대로, 니체를 생리학적으로 읽는 것, 자기 신체를 진단하고 건강한 삶을 위해 읽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한 대로, 니체로부터 가치를 강탈하여 자기 삶의 기술로 사용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강좌에서 집중하는 것도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니체적 기획 속에 있습니다.
강의의 첫시간에 보여드린 니체의 이 신체처럼, 니체의 여성관에 대해서도 찬/반, 좋고/나쁨을 포함하여 수많은 기호들이 기입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니체철학이 갖는 특이하고도 넘치는 생명력 자체입니다! 니체의 신체에 새겨진 이 기호들은 더이상 니체의 것이 아니라, 기호들을 새기는 그가 누구인지를 말합니다. '벗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누설자'인것처럼요.
니체는 자기철학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편함을 유발하는 '불편유발자'이지요. 차라투스트라처럼 여기저기 불지르고 다니는 자 말이지요. 그래서 니체철학을 이해했다는 사람보다 불편하다는 사람을, 니체는 더 신뢰했습니다. 자기철학을 진지하게 읽고 제대로 이해하려는 신체적 증거라고 말이지요. 니체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것은 자신의 퍼스펙티브이고, 저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니체를 자기 삶에 유용하게 활용하는 방식으로 읽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니까요.
그리고 1부 마지막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에게 '나를 부인하고 너희를 찾으라'고 하지요. 니체 역시 “어떻게 사람은 자기의 모습이 되는가?”라는 물음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다양한 길과 방법을 통해 나의 진리에 이르렀다. ······ 나는 길을 물어가며 길을 찾으려 시도했다.시도와 물음, 그것이 나의 모든 행로였다.... "이것이 이제는 나의 길이다. 너희들의 길은 어디 있는가?" 나는 내게 ‘길’을 묻는 자들에게 이렇게 답했다. 이를테면 모두가 가야 할 단 하나의 길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그러니 니체에 동의하는 일이나 니체를 부인하는 일에 있어서, 좀더 가볍고 좀더 즐거워지면 어떨까요?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