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4강] 토론주제 :: 4.30(금)
범위 : 1부 17.창조자의 길 ~ 22.베푸는 덕
물음 : [차라투스트라]를 읽는 동안 이런 물음을 제안합니다!
1-17. 창조자의 길
Q1. 창조자란 어떤 존재인가? 창조하는 자의 길은 어째서 자신에게 이르는 길인가?
Q2. 두 종류의 자유는 어떻게 다른가? ::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vs 무엇을 향한 자유
Q3. 창조자의 고독과 위험이란 어떤 것인가?
1. 자기입법자의 고독 / 2. 경멸하는 자의 시샘과 미움 / 3. 선하다는 자와 정의롭다는 자의 증오
4. 신성한 외골수의 마녀사냥 / 5. 고독한 자에게 다가오는 사람 / 6. 자신, 가장 고약한 적
Q4. 창조, 사랑과 경멸의 드라마!
창조하는 자는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경멸한다!?
사랑하는 자는 자신을 경멸하기 때문에, 창조하려 한다!?
1-18.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
Q1. “여인은 모든 것에 하나의 해결책이 있으니, 임신이 그것이다.”!?
Q2. 여인에게(*생산하는 자) 사내란 아이를 위한 수단이고,
사내에게(*놀이하는 자) 여인이란 창조를 위한 놀잇감이다!?
"사내는 전쟁(*가치창조를 위한 전투)을 위해 육성되어야 하고,
여인은 전사에게 위안이(*가치창조의 놀이감) 될 수 있도록 육성되어야 한다.
Q3. 사내의 행복은 ‘나는 원한다’는 데 있고, 여인의 행복은 ‘그는 원한다’는 데 있다.
Q4. 표면은 여인의 정서이며, 일종의 얕은 물 위에서 요동치는 격한 살갗이다.
Q5. 작은 진리는 무엇을 비유하나? (*소문자 진리 vs 대문자 진리)
Q6. 채찍은 무엇을 비유하나?
1-19. 살무사의 기습
Q1. 살무사와 차라투스트라의 에피소드는 무슨 의미인가?
Q2. 차라투스트라의 비도덕적 정의란 어떤 것인가?
1. 악을 선으로 되갚지 말라, 화를 내라.
2. 저주를 받을 때 축복하지 말라, 작게 복수를 하라.
3. 법을 어긴 사람을 징벌하지 말라.
4. 정의를 주장하는 것보다, 불의를 인정하라.
5. 냉혹한 정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무죄로 판결하는 정의
6. 바탕으로부터 정의로움.
7. 은자들에게 불의를 자행하지 말라.
1-20. 아이와 혼인
Q1.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혼인의 자격은 어떤 것인가?
Q2. 혼인은 위버멘쉬를 산출하려는 의지, 위버멘쉬를 향한 동경이다!?
1-21. 자유로운 죽음
Q1. 제때에 죽는 죽음 : 제때에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 축제가 되는 죽음 : 죽는 자_삶을 완성하는 죽음, 산자_맹세가 되는 죽음
- 자유로운 죽음 : 원해서 찾아오는 죽음, 목표를 이을 후계자를 가진 죽음
Q2. 죽음에 대해 자유로우며, 죽음을 맞이해서도 자유로운 죽음이란?
Q3. 제때에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1-22. 베푸는 덕
[주제1. 베푸는 이기심 vs 병든 이기심]
Q1. 통상적 의미의 '베푸는 덕'과 니체적 의미의 '베푸는 덕'은 어떻게 다른가?
(금은 어떻게 최고 덕의 상징이 되었나? 베푸는 덕이 최고의 덕이다!?)
Q2. 베푸는 이기심과 병든 이기심은 어떻게 다른가?
(베푸는 사랑은 온갖 가치를 강탈해내는 자가 되어야 한다!?)
Q3. 상승하는 힘에의 의지와 퇴화하는 힘에의 의지는 어떤 것인가?
Q4. 새로운 선악=새로운 덕이 힘, 힘에의 의지다!?
[주제2. 대지에 이바지하는 덕과 정신]
Q5. 대지를 등지는 덕과 정신 vs 대지에 이바지하는 덕과 정신?
[주제3. 위버멘쉬, 몰락과 생성의 의지]
Q6. 너희는 너희 자신을 찾아나서지 않고 있다. 나를 버리고 너희 자신을 찾도록 하라. (1-22.베푸는 덕)
cf. 창조하는 자의 길은 어째서 자신에게 이르는 길인가? (1-17.창조자의 길)
Q7. 몰락하고 있는 자는 그 자신이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임을 깨닫고 자신을 축복할 것이다.
Q8.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위버멘쉬가 등장하기를 우리는 바란다.”
이것이 언젠가 우리가 위대한 정오를 맞이하여 갖게 될 최후의 의지가 되기를!?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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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
'p125, 이처럼 베푸는 사랑은 온갖 가치를 강탈해내는 자가 되어야한다'는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온갖 가치'란 무엇인가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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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가족모임이 있어서 불가피 결석계를 제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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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주
야근으로 인해 결석계를 제출합니다. 다음주에는 꼭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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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
급하게 야근을 할 일이 생겨서 불가피하게 결석계를 제출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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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처 하지 못한 질문이 있어요.
「살무사의 기습」에서 은자에게는 불의를 저지르면 안 되는 이유가 뭘까요?
은자는 자신이 당한 불의를 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되갚을 수도 없다고 나와 있긴 하네요.
은자는 사람들을 피해 숨어 있는 사람, 고독한 자이죠.
그럼 차라투스트라도 원래는 은자였던 셈인가요? 속세에 지치면 다시
은자가 되는 건가요? 이런 순환이 계속 반복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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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둔자는 고독자, 창조자, 그리고 시대와 거리 속에서 자기가치를 창조하려는 자
Einsiedler(hermits)를 정동호는 '은자'로, 이진우는 ‘은둔자’로 번역했네요. ㅎㅎ 직역하면 숨어사는 자를 의미하며, 비유하면 시대(대중과 명성, 시대적 가치)로부터 떨어져있는 자를 말합니다. 이런 은자는 세상이 싫어 단지 숨어지내는 자도 있을 것이고, 적극적으로 시대와의 거리 속에서 자기고유의 덕(가치와 스타일)을 창조하려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에서 언급하고 있는 은자는 이들의 스펙트럼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들 은자 가운데, 신을 믿는 성자(서문2, 4-6.실직)와 차라투스트라가 있습니다. 성자와 차라투스트라를 제외하고,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은자는 맥락에 따라 해석하면 될 거 같습니다. 이들 은자들도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고독자ㆍ창조자의 고독과 위험을 가지고 있겠지요.
[2] 숨어지내는 은둔자의 특성이 잘 드러난 에피소드가 [1-14.벗], [1-19.살무사의 기습]입니다.
[1-14.벗: 은자에게 벗은 제3의 인물] “내 주변에는 언제나 한 사람이 더 있다.” 은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언제나 하나에 하나를 곱하는 것이지만,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 둘이 되고 마는구나!” 늘 그렇지만 나와 또다른 나(*Ich and Mich, I and me)를 상대로 대화에 너무 열성적이다. 만약 한 사람의 벗도 없다면 나는 그것을(*또 다른 나)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은자에게 벗은 언제나 제3의 인물이다. 이 제3의 인물은 두 사람(*나와 또다른 나)의 대화가 심연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막아주는 코르크다. 아, 은자들에게는 너무나 많은 심연이 존재한다. 그 까닭에 그들은 벗과 그 벗의 높은 경지를 동경하는 것이다.
[1-19.살무사의 기습: 은자에게 불의를 자행하지 말라!] “너희에게 적이 있다면, 악을 선으로 되갚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 대신에 그가 너희에게 어떤 좋은 일을 했음을 입증하여 보여주어라. (*적이 저지른 악을 나에게 유용하게 만들어라. "나는 우연한 나쁜 경우를 자기에게 유용하게 만들어낼 줄 안다." [이 사람]) [...] 너희에게 커다란 불의 하나가 자행되면, 서둘러서 작은 불의 다섯개를 저질러 응수하라! 혼자서 불의에 눌려 괴로워하는 자는 보기에도 끔찍하다. 그리고 불의를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그 불의를 받아들여야 한다. 작게나마 앙갚음을 하는 것이 앙갚음을 전혀 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래도 인간적이다. [...] 형제들이여, 은자들에게 불의를 자행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 은자가 어떻게 잊을 것인가! 은자가 어떻게 그것을 되갚을 것인가! 은자는 깊은 우물과도 같다. 그 속에 돌을 던지기는 쉽다. 그러나 말하라. 그것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다음에는, 그 누가 나서서 그것을 다시 끌어올리려 할 것인가? 은자를 모독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 이미 모독을 했다면, 차라리 그를 죽여버려라!”
[3] 은자에게 불의를 저지르지 말라!
시체님의 요약처럼, [살무사의 기습]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은자는 자신이 당한 불의를 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되갚을 수도 없기 때문에, 은자에게 불의를 저지르면 안된다"고 합니다.
불의란 어떤 것일까요?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비방이나 공격들 같은 것이고, 은자에게는 그를 모독하는 것이지요. 이것에 앞서 차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불의가 자행되면, 1. 불의를 유용하게 만들고, 2. 불의를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불의를 받아들이고, 3. (불의를 견뎌낼 수 없는 사람은) 작게나마 응수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불의를 견뎌낼 수 없는데도 응수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불의에 눌려 괴로워하게 되는데, 이러한 괴로움에서 타인을 원망하는 '원한의 감정'과 나를 탓하는 '자책의 감정'이 생기지요. 니체는 우리의 힘에의 의지를 퇴화시키는 가장 나쁜 감정으로 이 2가지를 지적합니다.
이처럼 니체는 신체의 강도에 따라 불의에 대한 다른 퍼스펙티브를 제안합니다! 니체는 ‘불의에 응수하라’고 말함으로써 가장 낮은 단계에 있는 퍼스펙티브조차 긍정합니다. 물론 불의에 응수하는 것보다, < 불의를 견뎌내는 것이, < 불의를 유용하게 만드는 것이 높은 위계에 있습니다! 불의에 응수하는 것은 반동적 힘이며, 우리가 불의를 견뎌낼 수 있거나, 불의를 유용하게 만들 수 있다면 불의는 더이상 불의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은자는 사람들과 떨어져있고, 가치창조의 보다 높은 정신성을 추구하는 자이며, 자기고독과 많은 심연을 가진 자이지요. 그러므로, 그가 불의를 견뎌낼 수 없는 경우, 1.높은 정신성을 추구하는 그는 잊을 수도 없고, 2.사람들과 떨어져있으므로 응수할 수 없도 없습니다. 여기에 3.많은 심연을 가진 그는 "혼자서 불의에 눌려 괴로워하는, 보기에도 끔찍한" 위험에 처하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은자를 모독했다면, 차라리 죽여버리라고 까지 말합니다!!
[4] "차라투스트라도 원래는 은자였던 셈인가요? 속세에 지치면 다시 은자가 되는 건가요? 이런 순환이 계속 반복되는 건가요?"
차라투스트라도 시대(대중, 명성, 시대적 가치)와 거리를 통해 고독 속에서 자기가치를 창조하려는 은자이지요. 다음 에피소드에서 지칭되는 은자는 모두 차라투스트라입니다. (4-1.꿀을 제물로 바치다, 4-2.절박한 부르짖음, 4-3.왕들과의 대화, 4-9.그림자, 4-12.최후의 만찬, 4-19.몽중보행자의 노래)
차라투스트라의 몰락(하강)과 상승은 차라투스트라 4부까지 계속되며, 상승과 하강이 반복될 때마다 차라투스트라의 신체는 보다 강해지고 위버멘쉬를 향해 갑니다. 이 가운데 대중에게 지치고 배신당하기도 하는 것은 모두, 차라투스트라의 위버멘쉬-되기를 위한 시련으로 저는 해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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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님이 텍스트를 열심히 읽으시니 기쁩니다.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특히 차라투스트라가 보여주는 '신체강도에 따른 불의에 대한 퍼스펙티브'에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시체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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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스러운 답변 감사합니다. 은자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는 힌트가 되었어요.
니체의 글에서 특히 '은자'와 '디오니소스'에 흥미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저 자신을 대입하게 되어서요.
앞으로도 말씀을 깊이 새기며 텍스트를 읽어 나가겠습니다 :)
참, '심연' 하니까 갑자기 이런 구절이 생각 났어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
어디 나오는 구절인가 찾아보니 '선악의 저편' 146절이네요.
심연이라는 단어가 왠지 매혹적으로 느껴집니다.
함께 토론하고 싶은 주제나 해석이 필요한 내용은 댓글을 달아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