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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min

숨 가쁘게 읽었습니다. 바바 선생님의 사유의 속도는 채찍만큼이나 빠른 것 같습니다. 이따금 사유가 날카로와 아프기도 하네요. 치열한 사고의 흔적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영화, 사진, 사회, 영화감독, 행위예술, 음악 등등 어떠한 이미지가 바바 선생님의 내부를 찢어놓고 있는 것 같네요(선생님의 ‘발산’이라고 할까요). 지금 선생님의 어떤 시기가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저는 이 글에서 느끼는 것 같습니다.

여럿 문단들이 있었지만, 워낙 넓은 주제의식을 담고 있기에 ‘덕의 미궁에 빠졌다’ 정도만 코멘트를 달아봅니다. ㅎㅎ...

→‘니체의 너머는 내부의 심연 속에서 무한으로 발산한다. 니체의 덕의 게임은 인간에서 시작한다’는 말이 좋았습니다. 저 너머에 있는 덕이 아니라 인간의 심연 그 너머에 있는 것이란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아마 이는 인간의 자기 극복을 염두에 두시고 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정말로 니체도 마찬가지로 저 너머의 세계를 신봉하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는 하는 것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그들’의 덕들은 이러한 성격을 가지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나 인용하신 문장에서도 드러나 듯,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이 한 인간의 내부에서도 덕의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나는 사랑하노라. 많은 덕을 바라지 않는자를. ↔ 너는 여러 덕을 사랑해야한다) 하나의 덕 ↔ 여러 덕들이 대치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 말이죠.

그러나 ‘하나의 덕은 두 개의 덕 이상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운명이 드리워져 있는 그 이상의 매듭이기 때문이다.’ 하나 덕은 복수의 덕들이 매듭지어져 있는 것들로 설명되어 있는 지점에서 하나는 여럿이고 여럿은 하나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즉 ‘발산’이 중요한 만큼 그것을 하나로 묶어 하나로 만드는 ‘수렴’(꼭 정반합의 불변의 하나의 보편이 아니라 통시적 복수의 보편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 무한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의 순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무한히 계속되는 것은 그 수렴과 발산의 긴장상태가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창백한 범죄자의 ‘광기’와 예술가의 ‘광기’ 그것은 수렴의 힘의 정도의 차이, 강자적으로 덕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도 이 맥락에 배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바 선생님의 덕의 미궁 속에서, 혹은 심연 속에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혹은 의미를 매듭 지을 수 있길 바랍니다. :)

다른 주제들에 대해서는 다음에 바바 선생님과 더 이야기해야겠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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