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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 강독 강좌] 4.11 후기

멜로디 2014.04.16 23:26 조회 수 : 1573

 

11 April 2014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하여

 

<유물론적 변증법>

 

-       맑스주의 변증법을 알튀세르가 지칭하는 말.

모순과 총체적이고 복합적인 사회적 구조가 핵심을 이루며,

 일반 이론이 가지고 있는 동력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현실적 연결이 잘 되지 않는 면이 있다.

 

<텍스트의 두 가지 주제>

 

1. 이론적 실천

2. 변증법 그 자체 헤겔의 변증법과 어떻게 달라지는가 / 심급들 사이의 관계의 문제들

 

 1. 이론적 실천


 

1)    실천을 생산, 노동과 등치시키는 관점

-       소여된 특정한 일차 재료를 특정한 생산물로 변형시키는 모든 과정”(197). 이는 매우 맑스적인 정의이다.

-        발리바르는 맑스의 포이어바흐 테제가 기존 철학의 이분법적으로 위계화된 관계를 허물었음을 밝힌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실천은 생산 우위의 개념이었다. ‘프락시스는 정치적, 윤리적인 것으로 시민들이 하는 것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자기 변혁적 성격의 것이었고, 반면에 포이에시스는 생산 및 제작으로 노예들에 의해 행해지는 것으로 자신이 아닌 외부의 것을 변화시키는 행위로 이해 되어왔다. 이런 위계는 역사적으로 계속 지속했는데 맑스는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에서 자기변혁과 환경의 변혁(세계 변혁), 이 두 가지가 일치되어야만 변혁이 일어난다고 언급했다는 것이다. 세계의 변혁하지 않으면 자기변혁도 없고, 자기변혁이 되지 않고서 세계의 변혁도 불가능하다는 이중의 목적론을 드러냈다. 자기가 변화하려면, 동시에 세계가 변화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혁명적 실천이라고 했다. (이 둘 사이의 위계 관계를 조정했고, 나중에 맑스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한나 아렌트의 경우는 생산과 실천을 전도시켜서 생산을 우위에 두고 실천을 그 아래에 뒀다고 오역하여 다시 그리스로 돌아가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나 아렌트 같은 경우 정치적 실천을 목표로 하는 사고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발리바르는 맑스가 이 둘의 관계를 전도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일치시키려고 했다고 말한다.

-       이론’ Theorie에 대한 알튀세르의 인식 :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경우 이론을 관조적으로 생각했다. 자기 안에서의 사유라고 본 것이다. 반면 알튀세르가 실천생산을 등치시키고 그에 따라 당연히 이론의 성격은 변하게 된다. 직접적으로 이러한 이론의 성격 변화를 알튀세르가 언급하진 않았지만, 지적 활동을 노동이라고 보고 있는 점, 이데올로기적 실천, 정치적 실천 또한 노동으로 보고 있는 점에세 이론적 실천도 노동과 변형, 생산의 관점에서 파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이론적 실천의 세 과정

·      일반성 1 – 일차적 재료

·      일반성 3 – 과학적 변형, 이론

·      일반성 2 – 생산 수단으로서 1에서 3으로의 변화 만듦.

-       이런 세 과정은 사유 내에서의 작업이자, 이미 이데올로기적인 실천을 통해서 만들어진 결과물들이다.  맑스에게 스미스의 이론, 리카도 이론과 같은 재료들(정치경제학적 담론/일반성 1)이 이미 있었고, 이 안에는 이데올로기적인 특성이 있었을 텐데, 그것을 과학적으로 변형한 것이 <자본>(일반성 3)이라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일반성1이 결과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헤겔의 관점과 다르다는 것이다. 헤겔이 생각하는 사고들을 보면 개념의 자기 전개, 최초의 통일적인 것들이 부정의 부정을 거쳐 복귀할 때, 처음 출발은 추상적인 것으로 출발한다는 것인데,( 정신현상학을 예로 들면, 언어의  출현을 설명하면서 사물을 ‘this’라고 가리키는 것으로 그 관념으로 출발하고 거기에서 부정이 일어나고 부정하는 식으로 발전하는 식으로 전개가 되는 과정) 헤겔의 경우 추상적인 것들을 먼저 생각하고 부정에 부정을 통과하여 구체적 보편성을 말한다.  만약 이러한 헤겔적 사고 방식을 것을 뒤집어서 전도시키면 관념론적이 아닌 유물론적인 것이 된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구체에서 출발해야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에 대한 입장이다. 포이어바흐는 감각적인 것으로 출발하자고 한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헤겔과 포이어바흐 모두 다 부정한다.

알튀세르는 맑스의 유물론이 포이어바흐와 헤겔 둘 다와 다르다며, 관념 내에서 이데올로기적 실천으로서 만든 이론적 담론을 제시한다. 이것은 추상적인 것(일반성 1/ 이데올로기적 추상적 관념)으로 출발 하는데, 일반성 1은 노동으로서의 이론적 실천(일반성 2)을 통해 변형을 해야 하고, 그래서 그 이전의 것과 불연속적인 완전히 다른 것(일반성 3)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헤겔의 전도와는 전혀 다른 관점이다. 처음에 출발하려는 것은 통일적인 추상성(헤겔)이나 감각적인 것(포이어바흐), 둘 다 아니고 이데올로기적 추상적 관념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3)    사유 내 과정으로서 이론적 실천

-       알튀세르가 일반성1, 2, 3을 말하면서 일반성1이 사유 안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분명히 해야한다. 구체적인 데이터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여기서 알튀세르는 사유가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데이터를 일차적 재료로 해서 분류, 종합하면서 진리에 도달한다는 로크식 경험주의에 빠지는 것을 유의한다. 또 선험적 컨셉으로 경험적 데이터를 가지고 사고하는 칸트 등의 사유 방식을 비판하면서 알튀세르는 사유 내 과정을 중요시 여긴다.

-       일반성 3’구체인데, 이 또한 사유 내 구체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실재하는 현실과는 다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건, 헤겔은 사유 내 구체성이 생산되는 것이 현실적 구체성 생산과 같다고 말하는데(정신현상학, 정신 전개와 역사 전개가 같으며 역사적 순서와 논리적 순서가 같다고 보는 발생학적 관점) 그러나 알튀세르는 발생론적 관점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라고 볼 수 있다. 알튀세르는 논리적 사유와 현실의 역사적 발전은 별개의 것으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4) 일반성 1의 생성 과정과 주체비판

-       일반성1(재료)은 이데올로기적 실천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일반성 1이 이론적 작업을 통해 과학’(일반성 3)을 생산할 때,  일반성 1 도 단순한 추상화의 과정으로 생산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작업의 복합적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알튀세르는 일반성 1을 얻어내는 과정 자체를 포이어바흐적 의미의 추상화 혹은 플라톤적 이데아와 개별자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체로부터 출발한 관념론과 구분하면서, 일반성1이라는 재료를 생산하는 과정 자체가 복합적인 상이한 실천들의 결과로서 생산된다고 본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주체를 비판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인식을,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인 인식일지라도 주체의 행위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 저러한 상이한 실천들의 결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       포이어바흐의 관한 테제의 여섯 번째 테제에서 맑스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규정에 관해 언급하며 포이어바흐의 인간에 대한 관점을 비판한다. 포이어바흐에게는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이미 규정 및 전제하고 있는데, 맑스는 이를 거부하면서 인간을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 사회적 관계들의 집합 혹은 총체(totality가 아니라 상이한 것들이 모여있다는 의미에서)라고 보았다. 말하자면 사회적 관계들이 변하면 인간 본질도 변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헤겔과도 매우 다른 입장이다.) 뿐만 아니라 첫 번째 테제에서 실천은 관념론에 의해 발전되었다고 할 때 실천은 주체의 실천으로, 칸트와 헤겔을 염두해두고 말한 것이다. 관념론에서 실천은 항상 주체의 실천이었다. 그러나 사회적 관계로 실천을 보았던 맑스의 실천은 주체의 실천이 아니라 실천 그 자체로서, 물질적 방식으로 바라보며 실천을 규정한다. 실천을 주체로부터 떨어뜨리는 맑스포에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전개되는 내용이며, 이것이 이 텍스트에도 언급된다.(p228 마지막 둘째줄에~p229 셋째줄까지의 내용 )

 

질문) 일반성 2에서의 이론과 대문자Theorie <이론>

-       일반성 1,2,3 설명하면서 일반성 2를 따옴표 친 이론’, ‘과학의 이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반성 2 3에 구분을 정확히 말하지 않고 있는데, 스피노자의 텍스트를 참고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듯하다. 스피노자의 지성향상론이란 텍스트를 보면, ‘방법론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방법론이 있고 뭔가를 사유하여 올바른 지식을 생산해낸다는 생각에 대하여 스피노자는 그렇다면 방법론은 어떻게 만들 것이냐?’는 물음에 대해 사유한다. 스피노자는 이에 대해 망치의 도구적 사용을 예로 들며 망치라는 개념과 도구가 없는 상태에서도 이미 돌이나 기타 다른 것을 망치로써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망치가 먼저 있고 조각품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망치와 조각품이 분할되지 않는 상태가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차츰 분화되어 방법론과 생산된 지식이 나타난다고 본 것이다. 일반성 2 3도 처음부터 명확하게 구분된 것이 아닐 수 있다. 이것이 점점 더 분화가 될텐데, 이 때 이러한 분화의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것이 Theorie 대문자 <이론>일 것이다.

 

   5) 유물론적 변증법으로서 <이론>

- 알튀세르는 철학이 소멸하며 효과를 만들어 낸다거 말한 바 있다. 이는 철학이 소멸하면서, 기각되지만 살아나는 철학의 역할과 효과가 있음을 의미하는데, 후반기 이론에서 이는 최종심급의 계급투쟁이다. 그래서 효과라는 것은 관념론과의 대결이고 유물론적 변증법이 해야할 일이 그 대결인데, 그 대결에서의 핵심이 일원론적인 것다원론적인 것에 둘 다에 대한 투쟁이다. 기원의 복수성, 복잡성과 불균등성, 과잉결정을 강조하는 것들이 유물론적 변증법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원론적인 것과 다원론적인 것은 이에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반성 2 3사이에 투쟁이 있다고 한다면, 그래서 과학적 사고에 대한 인식론적 장애가 있다면 그 사이에서 유물론적 변증법이 그것들과 싸워서 관념론적 사고를 정리했을 때, 인식이 과학적 사고로 나갈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렇게 놓고 보면 일반성2 3이 처음에는 잘 구별되지 않는 상태는 작동은 하고 있되, 실천적인 상태로만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레닌이 방법적으로 이미 유물론적 변증법을 실천하고 있지만 이론적으로는 명확히 말하지 않는 상태가 이에 해당한다.  맑스의 <자본>에서 이미 실천속에 존재하는 이론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성 2 3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상태는 명확히 이론적 상태로 존재하지 않고 실천적인 상태로만 있는 상태, 망치인지 돌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 아닐까. 중요한 것은 분명하게 실천과 이론이 구별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관념론과의 투쟁이 효과적이지 않고 인식이 봉쇄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과학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전면적으로 대면하기 위해서는 변증법에 대한 이론적인 인식이 필요하다는  텍스트 내의 언급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질문) 일반성 1에 관한 질문

-       이론적 실천의 일반적 과정에서도 일반성1이 무엇이냐라는 규정을 할 때, 이데올로기적 실천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일 수 있고 그것만이 아니라 과거의 과학적 생산물이 아직 이데올론적인 것을 가지므로 그것들이 일반성 1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식론적 단절이 일어나서 영원히 과학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비록 이전과는 다르더라도 이데올로기적인 사고들이 끼어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갈릴레이 뉴턴 아인슈타인의 예) 일반성 1이 한번 단절되면 전혀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 발리바르가 1990년 정도 쯤에 쓴 진리의 이름과 장소(?)’라는 텍스트를 보면,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 과학적 단절이 나올 때, 인식론적 단절은 항상 개념에 걸린다는 것이다.

 

질문) 레닌의 당면시점에 대한 정치적 실천은 이데올로기적인가?

-       레닌이 활동한 당시 시점에 문제가 된 것은 명확한 분석이고, 그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모순들이 위치를 바꾼다는 것이었다. 마치 부차적 모순이 주요 모순과 자리바꿈을 하는 현상. 마치 노사 간의 대립이 경제에서 일어나야 하는데 이것이 정치적 심급에서 활동하게되는 것과 같이 주요 모순과 부차적 모순 간의 역할 바꿈이 정세에서 일어나는데, 이러한 것들을 분석한 레닌의 작업은 이론적 작업이었다. 이 때 레닌은  유물론적 변증법을 이론적 도구로 갖진 않았으나, 실천적으로 그러한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언표되지는 않았으나 실천으로서 이루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학적)개념으로 언표되었을 때 확실한 이론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NOTION CONCEPT의 구분. 들뢰즈, 맑스 모드. 노션은 철학에, 컨셉트는 과학에. 들뢰즈는 노션이 더 중요, 알튀세르는 컨셉트(과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

그리고 CONCEPT를 과학적인 것과 연결시키는 것이 인식론적 단절의 핵심이다. 그러나 과학적 개념은 개념으로 끝나지 않고 그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담론이 형성된다. (담론 안에 개념이 있다.) 발리바르는 단절의 요체는 개념의 생산에 있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담론 안에 있으므로, 지속적인 단절을 만들 필요성에 대해 말한다. 예를 들면 뉴톤의 물리적인 법칙들에서 설명하지 못했던 지점들을 아인슈타인들이 밝혀낸 물리학의 발전들을 보면, 뉴턴의 이데올로기적인 면들을 깨버리고 새로운 인식으로 넘어간다. 알튀세르 또한 한 번의 단절로 과학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단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레닌의 이론적 작업이)“실천적인 상태로 존재한다는 말은 아직 과학적인 이론으로 정립되지 못한, 그러나 실천적으로 존재하는 그런 것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과학적 이론을 만들기 위한 단절은 한번으로 매끄럽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작업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2.변증법 그 자체

 

  1) 맑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의 고유성

 

a)      이미 주어진 구조화된 복잡한 전체

-       복잡성을 어떻게 사고 할 것인가?

이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순한 것에서 출발하여 점점 복잡한 것으로의 전개 과정을 생각한다. 그래서 기원적 단순성이 있고, 그것들이 마주침으로써 복잡화되는 과정을 사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과학 철학에서도 그런 식으로 인과성을 생각한다. 말하자면 선형적이고, 기계적인 운동들이 마주치면 복잡해진다는 식이다. 알튀세르는 그런 사고들이 말도 안되는 사고라고 비판하고 있다. 아무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도 단순한 것에 이르지 않는다. 항상 그 자체로 복잡한 전체를 사고 하는 것이 유물론적 변증법의 핵심적 사고라는 것이다. 지젝은 헤겔이 목적론을 말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헤겔을 매도한다며, 공산당 치하에서 유고슬라비아 경찰이 열두시 5분적에 시민을 미리 쏴 죽였던 일례를 든다. 그런데 알튀세르에 따르면, 그런 식의 헤겔 옹호가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도착이 문제가 아니라 출발 자체가 기원적 단순성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기원과 목적이 하나로 연결된 헤겔의 생각에서 위와 같은 지젝의 옹호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알튀세르의 주장은 기원적인, 아니 기원도 없이 항상 복잡한 상태를 생각해야한다는 것이다.)

 

b)  이미 복잡한 전체의 의미인과성

-       스피노자의 경우 내재적 인관성으로 실체양태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양태양태사이의 인과성을 이것과 구별하면서, 실체-양태의 관계는 내재적이고 양태-양태의 관계는 외재적이라고 해석했다. 이런 식의 이분법적 사고, 본질의 차원과 실존의 차원을 나누는 것, 본질의 차원에서는 모순과 갈등없이 일관되고, 실존의 차원에서만 모순이 있다고 보는 사고를 알튀세르는 비판한다. 그는 자기 비판에 관한 에세이에서 자신은 구조주의자가 아니나, 스피노자주의자였다고 말하는데 스피노자에게는 모순이 없다는 것이 결점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바슐라르(?)는 스피노자에게 실존의 차원에서 모순이 있다면서 알튀세르를 비판한다. 발리바르는 짧은 에세이에서 전체적으로 알튀세르를 옹호하나, 스피노자에게서 모순이 없지 않으며, 모순의 차원이 실존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양태와 양태 사이의 운동을 기계적인 것이라고 말하면서 에티카에서 한 개체가 다른 개체를 야기하고 그 전에 이 관계를 야기하여 무한히 지속된다는 것을 바슐라르는 이것을 외재적 인과관계로 해석했는데, 발리바르는 이것을 뒤집으면서, A->B->C->D…라면 타동적 인과성으로 스피노자를 해석할 수 있으나, E->F를 야기할 때D->(E->F)에서 D(E->F)의 양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므로, 그냥 변화가 아니라 변화에 대해 변화를 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미 변화, 운동이 있다는 것이다. D가 작용하는 것은 E가 아니라 이미 변화는 것을 변화시키는, 미분적인 방식으로 번화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선형적인 방식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게 이미 항상 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하나의 인과작용도 단순하지 않다는 것, 항상 복잡하게 일어난다는 것이 발리바르가 말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아무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도 단순한 인과성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선형적 방식의 인과성을 말할 때 거기서의 항들은 이벤트가 되며 이벤트1이 이벤트2를 만드는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스피노자는 이벤트 사이의 인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에서의 항을 개체로 설명한다. 개체가 개체의 작동의 modify를 말한 것이다. 이벤트가 아닌 개체의 중요성을 말한다. 항상-이미 무한히 많은 개체들이 존재하고 있고, 이것들이 활동하고 있고 이 속에서만 인과작용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질문) 스피노자의 개체는 항상 복합체인데, 이런 식의 설명이 어찌 가능한가?

-       모든 것들에 대해 작용하는 상태. 이것만 보게 되면 균질적, 수평적 차원에서 보는 운동이다. 이것이 일차적 복잡성이라고 부른다. 스피노자에게는 2차적 복잡성이 있는데, 여기서는 개체들이 갈등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물고기가 물고기를 잡아먹듯이, 이런 갈등적인 관계에서 한 개체가 다른 개체에게 잡아 먹히지 않으려면 다른 개체와 연대하여 복합체를 형성해야한다는 논리이다. 이는 결국 복합체와 복합체의 대결로 발전하는 양상이 된다. 어쨌든 2차적 복잡성에서 갈등의 문제가 들어오면서 복합체개념이 나온다. 스피노자에게서 죽음잠재적죽음과 현행적죽음이 있는데, ‘잠재적죽음은 진짜 죽는 게 아니라 바깥에 있는 다른 것들과 교류하는(자기 자신의 계속적인 분해를 해나감으로써만 가능한 교류) 것이고 스스로 고립이 되면 현행적죽음이 된다. 결국 살기 위해서는, 능동적이기 위해서라도 일시적인 수동의 차원이 있다. 살기 위해서 복합체에 종속되는 수동을 동반하는 능동이 있다는 것이다. 복합체를 형성하는 것은 2차적 복합성의 차원인데, 1차적 복합성과 2차적 복합성 죽 근본적인 것은 2차적 복합성이라고 발리바르는 말한다. 2차적 복잡성이 근본적 조건이라는 것, 1차적 복잡성에서 2차적 복잡성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2차적 복잡성이 있다는 것. 이것은 알튀세르가 단순에서 복잡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복잡에서 출발하고 말한 것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스피노자를 언급한 이유는 이미 주어진, 구조화 된 복합적 전체가 헤겔하고 대립되는 지점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 사실상의 원형은 스피노자에게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스피노자의 이러한 논의로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심급들간의 관계( 148. ‘삽입이라는 용어와 관련하여)

-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은 형식 결정이다. 최종심급이 작동하는 것이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라는 것. 형식 속으로 내용이 삽입되었을 때 역사적 사건이 된다.

-       형식 결정의 두 형상, ‘전위응축

: ‘형식 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위응축이다. 자리바꿈으로서의 전위’, 이질적 모순들의 융합인 응축이 형식 결정의 두 가지 형상이다. 이를 생각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프로이드와의 유비이다. (각주에서 말하듯) 이 개념은 언어학과 정신분석학에서 가져온 것이다. ‘전위응축은 언어학에서는 환유은유이고 프로이트나 라캉도 그리 말하고 있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알튀세르가 프로이트적인 생각을 못한 것에 대해 비판했는데, 여기서 이미 알튀세르는 전위와 응축을 말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 2판에 붙인 꿈 작업에 관한 각주에서, 사람들이 꿈의 해석을 읽고 명백한 꿈 내용으로 꿈을 분석하는 것을 비판한다. manifest dream contentlatent dream thought (잠재적 꿈 사고)을 나누어 manifest dream content가 의식이고 잠재적 꿈사고를 무의식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며, 잠재적 꿈 사고(내용)가 무의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의식은 무엇일까? 꿈 사고의 요소들이 서로 결합함에 있어서 왜곡을 하는 것들이 있는데, 왜곡을 하는 제3심급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Dream Work라고 부르며 그것을 무의식이라고 말하고 그것이 성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잠재적 사고의 요소들은 성적인 것이 아니나 무의식적인 것은 성적인 것이고 그것이 개입해 오는데 왜곡의 대표적 양상이 전위응축의 대표적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를 정확히 알튀세르가 생각한 경제에 의한 최종심급과 같은 것으로 활용하고 있다.  프로이트에게 성적인 것이 알튀세르에게 경제(혹은 계급 적대)가 된다. 

결국, 작동하는 방식에서 전위와 응축을 통해 왜곡을 가한다는 것은 형식 결정이지, 내용 결정이 아니다. 만약에 최종심급에서의 내용결정을 생각하면 최종심급 이외의 심급들은 최종심급의 반영에 불과하게 다양한 심급들의 내용적 고유성이 파괴된다. 그러니까 반드시 관계에 대한 형식적 결정으로 이해됐을 때만, 내용들이 단순 반영 혹은 표현으로만 파악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3)  최종심급과 지배적 심급

-       알튀세르는 최종심급을 요소들 중 하나로 파악하면 내용 결정을 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지배적 심급과 최종심급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경제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보며, 이를 비판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최종심급과 지배적 심급을 분리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최종심급은 그 때 어떤 국면에서 지배적 심급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다른 심급들과 자리를 바꾸고 혹은 여러 심급이 응축하는지를, 즉 형식적인 결정을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지배적 심급과 최종심급을 나누는 것이 매우 중요!

-       그런데 후기에는 최종심급을 폐기하고 지배적 심급만 남긴다. 둘이 같다고 말하며 최종심급을 폐기한다. ? 초기에는 경제주의를 피하려고 했지만, 나중에 가서는 무엇이든 최종심급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곧 지배적 심급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경제만이 지배적 심급이 될 수 있다고 말한 것 아님다. 경제주의를 피하기는 하지만  최종심급과 지배적 심급을 구별할 필요성을 못 느낀 것으로 보인다. 최종심급이 결정할 때 형식적인 왜곡을 통해 일을 하게 된다는 생각을 한 것임.


      4) 라캉의 '환유', '은유'와 알튀세르의 '전위', '응축'

       라캉도 환유와 은유를 말하는데, 여기서 ‘환유는 어떤 지연의 의미를 갖고 있다

       환유의 예를 들면 노사간의 계급 모순이 유태인들에 대한 증오로 변형되며 지연되는 현상 등을 들 수 있다.(혁명X)

       은유는 의미가 형성되면서 더 이상 적대적이지 않은 상황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아버지의 이름이 수립되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알튀세르에게 응축은 혁명적 상황이다. 여기서 라캉과 알튀세르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 프로이트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

프로이트주의는 사회학적 주의이다. 사회가 sociable한 공동체, 사교적 공동체, 적대없는 조화로운 공동체이다. 푸코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의 말한 '사회'로서의 사회학 주의, 적대를 부인한다는 차원에서 사회학적 주의, 그런 사회학적 주의를 프로이트주의가 가지고 있다. 라캉의 은유처럼, 적대가 억압되가 사라지고 조화로운 사회가 형성될 수 있다는 사고. 그래서 발리바르의 경우 대중들의 공포를 쓸 때만 하더라도 프로이트를 홉스와 비슷하게 보았다. 홉스는 사회계약으로 리바이어던 하의 적대 종식과 일치단결을 말했다. 프로이트도 문명적인 것이 수립되면, 적어도 문명 내에선 적대가 없다고 보았다. 적대는 문명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 외의 것과의 적대를 말하며, 적대를 사적인 것으로 말하고, 공적인 영역은 적대 혹은 욕망이 승화된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런 면이 홉스적이라고 본 것이고 발리바르는 스피노자가 이와는 반대로 홉스를 비판하며 시민 사회 내에서도 적대가 존재한다고 말했음을 밝힌다. 프로이트의 언어를 빌리긴 했으나, 알튀세르가 라캉이나 프로이트의 부수적인 차원까지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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