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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리다는 후설의 철학체계 안에 존재하는 이항대립이라는 권력관계와, 그 관계 내에 존재하는 모순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표지와 표현부터, 매개적 수반현전과 직접적 자기현전, 현존과 현전, 실재성과 재현 등등. 데리다는 이러한 이항대립 내에서 대개 후자 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권력의 위계관계를 전복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 전복과정은 단순히 후자에 대한 전자의 우위성을 증명하는 과정은 아니었습니다. 그 과정은 이 두 항이 서로 침윤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데리다는 바로 이 침윤을 드러냄으로써, 후설의 철학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철학의 형이상학적 전통(로고스중심주의?)이라는 주류적 척도에 균열을 가하고자 합니다. 이 글은 발제가 아닌 후기이니, 데리다가 하는 이러한 해체과정 중 제게 감동을 준 몇 부분만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후설은 표현의 근원적 소명을 의사소통으로 인정합니다(60). 이전에 봤던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에 보면 나와 있듯이, 후설은 어떤 의미 충전된 표현을 1차적으로는 목소리로, 만약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목소리로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다면 2차적으로는 글로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명시적으로 말했듯이, 후설이 보기에 그 전달 과정을 그나마 순수하게 매개할 수 있는 것은 목소리뿐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타인과의 의사소통과정 내에서는 목소리를 통해서조차도 순수한 표현과 그 전달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기호’를 빌릴 수밖에 없고, 이 기호라는 매개를 빌림으로써 내가 이 기호를 사용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와, 상대방이 이해하는 그 기호의 의미 사이에 간극이 생기고, 그 간극으로 인해 '해석'의 여지가 생기며, 그 해석으로 인해 의도의 순수성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고로 타인과의 담화가 아닌 내면 담화만이 ‘나’의 순수한 ‘의도’를 보존할 수 있고, 이로 인해 후설은 의사소통의 근원적 소명에 부합하는 담화형식을 오직 내면담화 즉 묵독(고혼의 생)으로만 한정합니다.


   후설은 분명 표지와 표현의 관계를 기능적 관계라고 정의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표지와 기호는 결국 ‘나’의 바깥에 있는 것이기에, 종국에 이 둘은 지양해야할 것입니다. 후설은 기호와 표지를 부정해야하고 제거해야하는 이유 중 하나로 그것들에 내재되어 있는 목적성을 언급합니다. 후설이 보기에 기호나 표지는 어떤 지시대상을 언어로써 드러내기 위해(기호의 실재성) 사용하는 낱말입니다. 이 지시대상들은 ‘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나에게 ‘현전’할 수 없습니다. 후설이 보기에 나에게 현전한다 함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내 안에 존재하는 본질을 끄집어내는 과정인데, 그 과정 내에서 나 바깥의 매개들을 거치게 된다면 당연히 내 안에 존재하는 본질에 대한 해석의 여지가 생기므로, 이는 본질의 순수성을 담보할 수 없는 행위이겠죠. 후설은 이를 지양하기 위해 위에서 언급했던 묵독을 요구했던 것이며, 바로 그 묵독의 과정은 내면적 언어를 바탕으로 하는 ‘재현’입니다.


   이 재현과정 안에서 목적성을 사라지게 됩니다. 어떤 실제적 대상을 지시하기 위해서 표지 혹은 기호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을 재현할 뿐인 것이기에, 그 담화과정 안에는 순수한 나밖에 없는 것이기에, 나 외에 다른 이질성이나 타자성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내면담화는 나를 발견하기 위한 과정도 아닙니다. 이는 그저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나라는 본질을 다시 재현하는 것일 뿐입니다. 고로 후설에 따르면 이러한 재현의 과정에서는 한계에 봉착할 일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즉 항상-이미 존재하고 있는 100%의 나를 다시 드러내는 일일 뿐이니, 당연히 나 바깥의 다른 것에 내가 한계지어 질 수도 없는 것이고(후설은 목적을 ‘나를 한계 짓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아요), 고로 순수한 나는 이 고혼의 생 안에서만이 온전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데리다는 바로 이러한 후설의 논의를 바로 언어 일반의 문제를 가지고 비판합니다. 진석샘의 말마따나 우리는 혼자서 생각할 때조차도 기호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내가 아무리 남들과 다른 언어체계를 사용하려고 발악을 하더라도, 결국 그 언어체계는 기존에 존재하고 있던 언어체계로부터 파생된 것이기에 완전히 이질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내 안에 있는 본질을 ‘생각하는 나’로 정의하든 무엇으로 정의하든 간에, 그 정의는 ‘나’로 환원될 수 없는 언어체계(랑그)를 빌려서만이 사유하고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로 우리의 생각과 사고는 필연적으로 언어체계에 의해 한계 지어져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순수한 나’라는 관념 또한 이미 태생적으로 순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고를 규정하는 언어로 인하여.


   데리다는 그래서 나 스스로를 재현하는 언어와 나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지시하는 실제적 언어가 엄밀하게 구분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77-78). 데리다가 말하듯이 언어는 실재적 대상을 지시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내에서 나름의 체계를 갖고 있고, 그 체계는 차이들의 연쇄작용으로 인해 형성된 것이며, 그렇게 형성된 체계가 우리의 사고를 규정하고 있고, 그 규정된 사고에 의해 우리는 사물들과 서로를 판단하고 정의합니다. 예를 들어 존재와 무가 실제로 존재하는 지는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내에서는 존재와 무는 양극단적인 서로에 대한 구별이자, 이 단어들이 다른 단어와 맺고 있는 연관관계 내에서 파생된 서로 구별되는 개념일 뿐입니다.(그런 의미에서 실재와 개념은 구분된다고 많은 철학자들이 말한 것 같습니다) 이 개념적 차이와 구별은 서로 동반되어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 것에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일단 태생적으로는 사물과 유리된 채 형성된 체계가 바로 언어체계이기 때문에(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언어체계마다 똑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표현하는 방식에는 천차만별의 차이를 갖고 있겠지요), 그리고 그 개념의 형성은 존재와 무처럼 서로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는 ‘나는 현전한다’가 ‘나는 죽을 자로 존재한다’를 은폐하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내가 충만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과 내가 완전하게 소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러한 언어체계의 특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함께 갈 수밖에 업습니다).


   그런 한계에 대한 명확한 언급을 통해 데리다는 후설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표현의 순수성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그러한 것을 지향하기 위한 후설의 노력은 결국 초월적 주의주의이며 동시에 현전의 형이상학의 반복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순수한 의미를 향한 주체의 의지로 환원되지 않는 언어체계와 같은 기호의 독자성과 그것은 실재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기호의 비파생적 성격)을 복원하려는 것이 데리다가 후설을 해체하고자 하는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80). 


후기에 조금 욕심이 생겨서.. 책을 다시 읽고 쓰려고 하다 보니.. 너무 늦게 올리게 됐네요ㅠㅠ 

아무튼! 오늘 마지막 강독강좌도 알차게 들어서! 모두 다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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