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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혁명가들] 6월 20일 수업 후기!!

성현 2014.06.27 17:59 조회 수 : 571

어떻게 후기를 써야할 지 고민을 하다가.. 그냥 그날 들었던 것을 다 빼곡히 적는 것보다는 제가 감상 깊게 느꼈던 부분을 중점적으로 정리하는 게 보다 진정성이 느껴질 것 같아서, 세 가지 토픽을 중심으로 후기를 정리해봤어요.

 

1. 국가에 대한 그람시의 사유

맑스주의 사상가들의 국가에 대한 사유는 항상 변해왔습니다. 이는 사상사의 범주에서 뿐만 아니라 맑스 그 자신 안에서도 변화가 있죠.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는 국가를 도구적으로 바라봅니다. “국가란 부르주아지의 집행위원회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말하며, 국가를 순전히 도구로서만 생각하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필요한 도구말입니다. 하지만 <파리코뮌>에서 맑스의 생각은 바뀝니다. 그는 부르주아지의 국가를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에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부르주아지의 도구로서 국가를 일단 폐기하고 그 후에 그것 사회주의국가형태를 새롭게 건설해야한다고 말하죠. 그람시는 이러한 ‘폐기(파괴) -> 건설(긍정)’ 이라는 맑스의 국가관을 좀 더 확장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그람시는 부르주아지의 국가를 파괴하는 것을 긍정하되, 그렇다고 해서 무정부주의로 빠져드는 것을 극도로 혐오합니다. 왜냐하면 부르주아지의 쿠데타 등에 대처하는 등 치안유지를 위해서라도 ‘하나의 중심’은 분명히 필요하고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들에 규율과 방향성을 제공하는 역할을 그 무엇보다 국가가 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때의 국가는 PT정당에 의해 운영되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요.


그렇기 때문에 그람시에게 국가는 그 자체로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국가가 어떤 상황에 처하느냐에 따라 국가는 혁명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혁명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그람시의 국가에 대한 다양하고 폭넓은 입장은 기존의 맑스의 사상 안에서 거의 부재하던 국가관 및 정치관을 정립시켜주는 것 같았습니다.

 

 

2. 정치는 경제이면서 동시에 경제가 아니다

사실 저는 이 말이 굉장히 묘하게 끌렸습니다. 예전에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의 사상>을 보면서 굉장히 저를 흥분시켰던 문장이 있었습니다. 그 문장들을 잠시 옮겨보자면 “무릇 인간의 냄새가 짙은 정치에서 흔히 심하게 비인간적인 결과가 생겨나는 데에 정치적인 것의 가장 큰 패러독스가 잠재되어 있다. ........... 코뮤니즘 혹은 그 사상적 원류로서의 자코뱅 민주주의의 정치과정에서의 비인간적인 계기는, 흔히 그야말로 그 ‘이론’의 폐쇄성과 완벽주의가 실천 측면에서 번역된 형태로 나타난다. ......... (코뮤니즘 혹은 그 사상적 원류로서의 자코뱅 민주주의)는 특히 자기편의 정치를 너무나도 이론적=합법칙적인 것으로 환원시킴으로써 도리어 흔히 구체적으로는 비합리적인 기분을 그대로 날뛰게 하는 결과에 빠지는 것이다”


그람시는 말합니다. 정치는 경제라구요(물론 이때의 경제는 맑스주의적인 의미에서의 경제일 것입니다). 그람시에게 정치적인 판단은 단순한 자의에 의존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람시가 세력관계에 대해서 말할 때 나오듯이, 정치적인 판단에서 정말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은 “인간의 의지로부터 독립된 객관적인 구조에 긴밀히 연결된 사회세력들의 관계”입니다. 각각의 사회구성체의 물질적 생산력이나 한 사회 내에서 계급들이 현실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쉽사리 바뀌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구조입니다. 이러한 구조에 대한 정교한 분석이 뒷받침 되어야만 강력하게 결집된 인민의 힘으로서의 ‘실천’이 보다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분석이 뒷받침되어야지만 그 세력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 보다 영속적이면서 보편적으로 변모할 수 있겠지요. 이런 측면에서 정치적인 판단은 분명히 ‘과학’으로서의 경제의 힘을 빌려야만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정치는 경제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경제처럼 정치는 이미 주어진 개념 혹은 새롭게 만들어 낸 개념을 바탕으로 자료들에 하나의 서사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정치적인 상황들은 항상 긴급성을 요구하지요. 그 긴급성 아래에서 판단에 시간을 들인다는 것은 기회를 놓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긴박함 속에서 사유의 시간은 별로 없기 때문에, 만약 보다 올바른 정치적인 판단을 위해서 당시 국면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때를 놓치는 결과를 낳음으로써 그 무엇보다 나쁜 판단이 될 수도 있겠지요. 이렇게 신중할 수 없는 판단이 끊임없이 요구되는 공간이 바로 정치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판단에는 꽤나 자주 비합리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비합리적인 판단이 계속해서 요구된다면, 국면에 대한 분석이 제대로 동반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계급분할 및 타격의 대상에 대한 명확한 규명으로 이어지지 않음으로써 어떤 자의적인 판단에 의거하여 적을 규정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적에 대한 규정이 자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막기 위해서 이들은 자신들의 견해에 많은 정당성을 부여할 것이구요. 이러한 ‘신념의 정치’는 결국 세력싸움이 되어, 오직 자신들의 세력의 생존과 확장만을 목적으로 싸움은 변질되겠지요. 이러한 정치의 패러독스를 그람시는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람시는 이러한 패러독스에 흔들리기 보다는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군주처럼 자신의 신념을 바탕으로 철권통치로서의 계급독재를 강력하게 실현하라고 말하지요.


이러한 정치의 패러독스에 휘둘리기만 한다면 결국 결단은 사라지고, 혼란과 무정부주의적인 상태는 계속 가중되어, 결국 그 사회는 아노미사회로 전락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는 방법으로 결국 그람시는 강력한 힘과 규율을 주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너무나 포스트모던한 생각이지만, 왠지 저는 이에 쉽사리 동의가 안 되었습니다. 좀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3.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의 관계

그람시는 순전히 정치적인 국면을, 집단들이 자신들의 조합주의적인 국면을 넘어서 “다른 종속적 집단들의 이익이 될 수도 있고, 또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는 계기”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이 순전히 정치적인 국면인 이유는, 구조라는 물질적인 것을 바꾸기 위해 각각의 계급 혹은 계층들이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버리고, 대의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양보하면서까지 결집에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결집의 주체들은 지적으로 우월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양보는 자신들의 이익에만 함몰되어서는 절대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체 구조에 대한 유물론적인 이해가 선행해야지만 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이렇게 그람시에게는 지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하는 양보를 통해 헤게모니 장악이 중요한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헤게모니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알튀세르는 말합니다. 인간은 이데올로기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고요. ‘맑스주의적인 과학’을 바탕으로 이론적 노동을 통해 이론가가 이데올로기를 어느 정도 상대화시킬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이론가가 그 어떤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의 일상은 종교적인 이데올로기든 어떤 부분적인 자본주의적인 이데올로기든 무엇으로든 간에 침윤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는 고독한 이론적 노동 시간에 그가 노동의 대상으로 삼은 어떤 ‘부분’의 이데올로기적 면모를 밝힌 것이겠지요. 물론 ‘과학’을 통해서요. 물론 알튀세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합니다. 맑스가 과학을 통해 정초한 자본주의 비판을 바탕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하여, 이를 바탕으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대결해야 한다고 알튀세르는 말합니다. 고로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람시는 혁명 대중의 “결의”나 “열망”을 말합니다. 이를 정정훈 선생님은 노동자 대중의 ‘심성’이라고 말하는데요. 이것이야말로 그람시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트적 주체성이라고 정정훈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람시는 이러한 주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을 철저한 규율적 체계와 지식만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는 강제만이 아닌 동의도 내포되어 있지만 아무튼 이는 다 의식의 영역이지요. 물론 푸코의 말마따나 규율이 계속해서 진행되면 그것은 우리의 신체에 각인됨으로써(무의식이 됨으로써) 그것이 우리의 의식(정신) 또한 지배하겠지만, 그것은 결국 규율이기에 큰 반발을 동반하지요. 하지만 알튀세르는 큰 반발없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이데올로기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는 ‘상상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떤 의식적인 노력 혹은 인내 없이도 금방 습득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바탕으로요. 그것은 물 스며들듯 자연스러운 것이라, 반발에 따른 비용도 최소화됩니다. 어쩌면 규율보다 더 무서운 것이지요. 그람시는 주체성의 형성과정의 근본을 ‘이성’이자 ‘의식’의 작용으로 보았다면, 알튀세르는 주체성의 형성 과정의 근본을 ‘상상’이자 ‘무의식’으로 본 것 같았습니다. 이 둘의 차이 또한 흥미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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