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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드!!디!!어!! 마지막 차반 마지막 시간입니다. >>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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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과 차이로 시작하여, 차이와 반복으로 끝낼 거 같네요.

따라서 저희는 마지막 시간을 ‘6강 차이와 반복’으로 채웁니다.

 

 

모든 것은 돌고 돈다고 했다. 하지만 돌고 도는 것은 같지 않다. 나는 어제와 같은 나이지만, 똑같은 말을 하거나, 똑같은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

반복되는 것은 그래서 곧 차이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차이는 어쨌든 ‘나’에 속한 차이다.

이렇게 반복에서 차이로, 또 차이에서 반복으로 영원히 돌고 도는 것이 삶이고 세상이다.

‘영원회귀’라는 어려운 개념은 우선은 이렇게 이해될 수 있다.

 

 

저희가 읽어야 하는 텍스트의 범위는 553쪽부터 633쪽까지입니다.

덧붙여서 옮긴이의 해제도 대략 30쪽 가량(659~687쪽) 밖에 안 되니 읽어도 좋을 거 같아요.

수업을 듣는 우리는 과연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 대해 어떻게 결론을 매듭지을지 궁금합니다.

그러니 저희는 『차이와 반복』 결론을 꼭 읽어봐야겠지요?

행여나 『차이와 반복』을 읽어도 그것들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저희가 잠재적 차원으로 함축시키고 있을 뿐,

실행의 차원으로 현행화시키거나 혹은 그것을 아직은 펼치지 못하는 것일 텝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차이와 반복』을 읽자!> 마지막 수업을

『차이와 반복』이라는 책이 담지하고 있는 기호들과 조우하는 기회로 삼아봅시다!!

 

 

장소는 변함없이 수유너머N 4층, 소강의실입니다.

날짜는 2월 17일 수요일 그리고 시간은 늦은 7시 30분(즉 19시 30분)입니다.

그 날의 간식 담당은 저희 전부입니다.

-결석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아서, 제가 역할의 배분을 실수했네요.헤헤ㅠ- 

아무튼 기나긴 설 명절 동안 집에 남은 음식들을 바리바리 가져오셔서

서로 나눠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설마, 혹시나 음식이 넘칠까봐 걱정 안하셔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 마지막 강의가 끝나면 그것을 안주 삼아서 마무리 뒤풀이를 할 수 있니까요.

강의 시작 20분전에 혹은 더 일찍 미리 오셔서 연구실 카페에서 노닥거려보아요!!!

그 시간이 의외로 즐거워요!

그렇게 일찍 오시면 지각을 자연스럽게 안하지요.

결석은 금물인거 아시죠? 흐흐흣

 

 

이제 저의 후기도 마지막으로 몇 자 주섬주섬 정리해봅니다.

 

 

√ 표현; 함축과 펼침

 

  들뢰즈가 사용하는 표현의 개념에는 그의 스피노자주의가 담겨 있다. 그것은 감쌈envelopper(함축impliqer)과 펼침expliquer(전개développer)이 함께 하는 표현 관념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서론에 들뢰즈가 언급하듯, 그는 스피노자의 「지성교정론」과 『에티카』를 근거로 가져와 펼침expliquer과 함축impliqer의 상관어로 표현의 용법을 창안한다. 이러한 용법은 주름들이 함축되고 펼쳐지는 운동들을 말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하나의 지층들을 혹은 한 획의 주름을 형성한다.

 

 

주름이 함축되는 사태; 다시 잠재화 되어 가라앉는 것, 모나드라는 형태로 응축

주름이 펼쳐지는 사태; 사회의 진보, 세계의 발전, 생물의 진화, 설명되는 일

 

 

  그래서 개체화란 주름의 표현이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여기서의 표현은 수사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표현이다. 한편으로 표현은 거울을 매개로 그 모습 그대로 반향 된다는 말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표현되는가? 사태들을 끌고 올라간다. 표현한다는 것은 역량들을 함축하면서 드러낸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표현, 표현하는 것, 표현되는 것은 삼항 일조로서의 표현이다. -『차이와 반복』 어디서 봤는지 모르지만 이 말이 있다-

  주름들의 운동들은 강도를 발생시키고, 이러한 운동들은 영원회귀이며, 그러한 강도들로 하여금 영원회귀는 차이나는 반복이다. 때문에 언제나 발생하고 생성할 수 있다. [발생, 생성의 구도] 이에 대해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반복은 결코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라 언제나 본래적으로 ‘차이나는 것’의 반복이고, 또 차이 그 자체는 [차이의 차이라는 의미에서] 반복을 대상으로 한다. (543쪽)

 

 

판명-애매한 이념[시뮬라크르]들

명석-혼잡한 이념[시뮬라크르]들

힘의 덩어리들

-안-주름진 것들[응축]

구분되지만 잠재적인[엉켜있는] 것들

-막-주름진 것들

잠재적 장에서 강도적 장을 통과

강도적 장에서 현행화되는 과정

1. 존재는 판명한대, 구분이 애매한 것들

→ 미분비로 하여금 판명하게 알 수 있는 것

2. 가령 이드와 의식의 관계

분명하게 내용을 담고 있는데

[왜? 느낌과 기분으로 내게 들이닥치기 때문에]

잠재성 사태를 끌어올리기 때문에 혼잡한 것

감각되진 않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것

-파도 알갱이 혹은 형광등 알갱이-

감각, 감성과 같은 범주화되지 않고,

지성[혹은 이성]으로도 매개되지 않는

‘느낌적인 느낌’

 

 

명석-판명 이라는 데카르트 입장에 대한 명시적인 들뢰즈의 말

데카르트에 의해 모든 사유의 이미지는 오염됐다. 536쪽

명석-판명의 관념에는 명석-혼잡 그리고 판명-애매한 이념들을 함축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 우리는 이념에 어떻게 다가설 것인가?

 

 

들뢰즈에게 사유하는 자라면

사유 불가능한 것을 사유하고

지각 불가능한 것을 지각하고

감각 불가능한 것을 감각할 것.

 

 

  감각, 감성과 같은 느낌 아닌 느낌으로서 우리는 이념에 다가선다. 느낌 아닌 느낌으로서 이념에 다가서는 이유는 이념에는 명시적인 본질 따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제기적인 이념은 물음들을 생산하기 때문에 예술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이념을 다가선다는 말은 이념에 대해 안다는 말이다. 들뢰즈에게는 앎은 배워야 하고, 또 배운다는 것은 그것을 실행하는 일이다. 그래서 인식한다는 것은 대상과 주체를 나누는 일이기 때문에 이념에 대해 안다는 것은 인식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념을 느낌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원초적인 지각의 상태] 이는 배움apprentissage의 과정이다. 느낌이나 기분을 통해 감성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며, 그것들을 통해 기호[이미지]들을 받아드리고[해독하고], 감각이 충만해졌을 때 이념들은 지성에 폭력을 가하고 능력들 간에 불화를 일으킨다. 이러한 불화 속에서 지성은 언제나 나중에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념에 다가서는 것이 아니다. 이념과 우연하게 조우하는 일이며, 그것이 방사하는 기호에 언제나 예민하게 받아드릴 준비를 하는 일이 [아마도] 중요하다. 그래서 들뢰즈는 사유는 흡혈귀와 같다고 말했던가?

  그래도 느낌 아닌 느낌에 대해 더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겠다. 주지하다시피 진정으로 잠재적인 것들이 나타나는 것은 표면의 세계가 아니다. 사건들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배제되어 있는 것 소주적인 것들 미시적인 것 작은 모순적인 것들이다. 모순들의 응축되어 있는 점들, 특이한 것, 중요한 것 그리고 차이나는 것들을 우선 ‘느낄 것’ 그리고 나면 사유는 자동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그 느낌은 역설para-sens이라는 양면의 감각을 통해 드러난다. cf) 이것은 응시를 갖는 일과 맥락이 같다.

 

 

역설은 인식능력들의 공통적인 사용을 깨뜨리고, 또 그런 역설을 통해 각각의 능력은 자신의 고유한 한계, 자신의 비교 불가능자에 직면하게 된다.

사유는 오로지 자신만이 사유할 수 있으면서도 결국 사유할 수 없는 어떤 것에 직면한다. 기억은 자신의 태고이기도 한 망각에 직면하고,

감성은 자신의 강도와 구별되지 않는 감각 불가능자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역설은 이 깨진 인식능력들을 향해 양식들에 속하지 않는 관계를 전달한다. (487쪽)

 

 

시·공간의 문제는

공간 spatium 형식적 공간, 내재적 근거, 근거가 없는 것, 물체는 없고 힘만이 작용하는 공간 시공간이 의미 없는 것 깊이의 구도

이러한 깊이를

시/공간을 발생하는 공간 강도가 감소할수록 시 공간이 발생한다.

 

 

침묵 속에 소요 백색 소음

침묵이 존재의 소리가 된다

「묵념, 5분 27초」, 황지우

「4분 33초」, 존 케이지

아래에서 들끓는 힘들

 

 

 

√ 강도량들의 윤리학

 

   강도량들의 윤리학은 단지 두 가지 원리만을 지닌다. 하나 가장 낮은 것까지 긍정하기. 그리고 자기 자신을 (너무) 설명하지 않기, 다시 말해서 자신의 주름을 (너무) 바깥으로 펼치지 않기. (520쪽) 이는 영원회귀에 함축된 미묘한 질료를 위해 아무런 잔여를 남기는 일이다.

   가장 낮은 것은 시뮬라크르들이다. 인식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고, 위계에 구도마저도 빠져나가는 시뮬라르크들이 들뢰즈가 말하는 가장 낮은 것이다. 시뮬라크르를 긍정하기.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을 긍정할 수 있을까? 하나의 사건들에는 잠재적 사건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옷들을 갈아입기 때문에 그 속에는 잠재성으로서의 시뮬라크르들이 함축[응축] 혹은 안-주름 져있다. 그러니까 하나의 사건에는 잠재적 사건들의 주름들이 접혀져 있다고 하겠다. 그것들은 선별, 배제되고 소수화되어 있는 시뮬라크르들이다. 잠재되어 있는 것들을 모두 긍정 할 수 있을 때, 자신의 삶에 N승의 역량을 가져오는 일이며, 그것은 스스로의 삶 속에서의 활력[기쁨]에 대해 더 많은 강도들을 함축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현행화된 사건들보다 더 많은 잠재태로서의 사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잠재적 사건들은 현행화된 사건들 안에 미분화되어 있다 의미다. 비동등성 혹은 불균등성이라는 관계 속에서 잠재적 장으로 은폐되는 특이점들의 쌍들이 있다. 그것들은 없어지거나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은폐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뮬라크들을 긍정하라고 했을 때에는 숨어버린 것들, 활력을 가지고 있는 숨어있는 그것들을 감각해내는 일이겠다.

   강도량의 두 번째 원리 ‘자기 자신을 (너무) 설명하지 않기.’ 이는 가능 세계로서의 타인과의 관계에서 주름을 만드는 일이며, 공명의 조건들을 만들기다. 다시 말하면 타인이란 내가 함축하는 세계며 그리고 타인은 내가 함축하고 있지 않을 잠재된 세계를 함축하고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타인은 내게 있어 가능세계인 것이다. ‘즉 표현되는 것이 그것을 표현하는 것의 바깥에서는 아직 (우리에 대해) 실존하지 않을 때, 타인은 어떤 가능한 세계의 표현에 해당한다.’(551쪽) 서로가 함축하고 있는 가능 세계를 통해 나라는 주체는 존재할 수 있고, 그 세계들은 직조되고 각기 다른 세계들이 공명하여, 나라는 주체는 그제야 타자를 만날 수 있다. 간단한 예로 애인을 얼굴을 통해 세계를 보는 경우, 그리고 애인에게 질투를 느낀다는 것은 사랑의 가능 조건들이 불화를 일으키는 일이다.

   사건들이나 사람들과 조우하면서 좋은 만나기 위해서는 강도들이 필요한데, 그러한 강도는 자신이 함축한 값이 0에 수렴하도록 전부 다 소진하지 않았을 때 생성할 수 있다. 이러한 표상과 재현의 지점을 그리고 공통감과 양식의 세계를 들뢰즈는 강도차의 소멸이라 부른다. 그래서 표상과 재현의 지점을 공통감과 양식의 세계를 강도차의 소멸이다. 이는 선별 배재해야 하는 것이다. 재현의 4중 굴레(부정성, 동일성, 유사성, 대립)로 하여금 사유를 병들게 만들고 삶의 역량을 감소시키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사태들을 멈춰있거나 고립되어 있는 것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들이다. 단 하나로 수렴되는 정부, 국가, 학문 자아 동일성, 중심선들을 선별 배제하라. 단 그것들을 소멸시키라는 것이 아니라 즉 사유의 체계 속에서 멀리 두고 그 거리를 가늠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자신을 지나치게 설명하지 말라.’는 규칙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보다 타인과 더불어 자신을 지나치게 설명하지 말라는 것, 타인을 지나치게 설명하지 말라는 것, 자신의 함축적 가치들을 유지하라는 것, 표현들 바깥에서는 실존하지 않는 이 표현되는 것들이 모두 우리의 세계에 서식하도록 만들면서 이 세계를 증식시키라는 것 등을 의미한다. (551쪽)

 

 

 

항상 자신의 주름을 전부 펼치지 말 것. 그리고 주름을 항상 만들어 함축 시키는 일이 강도량의 윤리학이다. 그러니까 삶을 다른 가지들로 펼치면서 함축되는 부분들을 생성시키는 주름들을 만들어야한다. 이는 아마도 이미지 없는 사유를 분만하는 일일 것이다. 이미지 없는 사유는 탈주를 긍정한다.

 

 

함축할 것. 그래서 작가 이상李箱은 『실화失花』라는 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나 보다.

사람이

秘密(비밀)이 없다는것은 財産재산없는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아 모르게따~~~~~~~~~~

 

 

가능성

1. 미래의 확률적인 사태 ~이렇게 될 것이다.

2. 미래를 예견하는 것.

3. 경우의 수 (예측). 예측되는 사실들.

4. 미래로 다가가는 것.

5. 짐을 싸들고 나르는 도피.

 

 

잠재성

1. 늘 실재하는 사태 실재성은 가지고 있는 것 잠재성이 현행화 된 것이다.

2. 주사위 던지기의 운동들 주사위의 박혀 있는 수들의 전체 주사위에 실재하는 수들.

3. 선형적 인과성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 실재하는 조건들.

4. 미래가 도래하는 것.

5. 배치를 바뀌는 탈주.

5. 감성적인 것의 비대칭적 종합

 

 

1절

1항 차이와 잡다

세계는 언제나 어떤 ‘잔여’와 같고, 세계 안의 실재는 오로지 가분수나 심지어 무리수들을 통해서만 사유될 수 있다.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그것을 조건 짓는 어떤 비동등이 자리한다. 모든 잡다성, 모든 변화의 배후에는 그 충족이유로서 어떤 차이가 자리한다. (475~476쪽)

2항 차이와 강도

 

 

2절

1항 차이의 소멸

2항 양식과 공통감

3항 차이와 역설

철학은 양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역설을 통해 드러난다. (중략) 사유는 오로지 자신만이 사유할 수 있으면서도 결국 사유할 수 없는 어떤 것에 직면한다. 기억은 자신의 태고이기도 한 망각에 직명하고, 감성은 자신의 강도와 구별되지 않는 감각 불가능자에 직면하게 된다. .……. 그러나 이와 동시에 역설은 이 깨진 인식능력들을 향해 양식에는 속하지 않는 관계를 전달한다. (487쪽)

 

 

3절

1항 강도, 질, 외연: 소멸의 가상

2항 깊이 혹은 공-간

깊이는 본질적으로 연장의 지각 안에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즉 깊이에 대한 판단, 또 거리들에 대한 판단은 대상들이 겉으로 드러내는 크기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깊이는 자기 자신 안에 거리들을 봉인하고 있으며, 이 거리들은 다시 겉으로 드러난 크기들 안에서 자신의 주름을 펼치고 연장 안에서 자신을 개봉해간다. 게다가 또한 이런 함축의 상태에서 깊이와 거리들은 근본적으로 감각의 강도와 연계되어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493쪽)

깊이는 존재의 강도이고, 거꾸로 강도의 존재의 깊이다. (494쪽)

 

 

4절

1항 강도의 첫 번째 특성: 즉자적 비동등

2항 수에서 비동등한 것이 떠맡는 역할

3항 강도의 두 번째 특성: 차이를 긍정하기

4항 부정적인 것의 가상성

5항 감성적인 것의 존재

6항 강도의 세 번째 특성: 함축 혹은 안-주름운동

7항 본성상의 차이와 정도상의 차이

8항 에너지와 영원회귀

9항 영원회귀 안의 반복은 질적이거나 외연적이지 않고 다만 강도적이다

강도량들의 윤리학은 단지 두가지 원리만을 지닌다. 가장 낮은 것까지 긍정하기, 자기 자신을 (너무) 설명하지 않기, 다시 말해서 자신의 주름을 (너무) 바깥으로 펼치지 않기가 그것이다. (520쪽) 영원회귀에 함축된 미묘한 질료를 위해 아무런 잔여라도 남기는 일

 

 

5절

1항 강도와 미분

2항 이념의 현실화에서 개체화가 떠맡는 역할

3항 개체화와 분화

4항 개체화는 강도적이다

5항 개체적 차이와 개체화하는 차이

6항 막-주름운동, 밖-주름운동, 안-주름운동

이념은 판명한 한에서 애매하다(535쪽)

바로 이런 사유자는 명석한 것과 혼잡한 것, 명석-혼잡한 것의 모든 역량을 이용하여 이념을 사유하되, 그 이념이 판명-애매한 것으로 지니는 모든 역량 안에서 사유한다. 또한 여기서 계속 상기해야하는 것은 개체성이 지닌 다양체적이고 변동적이며 소통적인 특성, 즉 함축되는 특성이다. (539쪽)

 

 

6절

1항 체계의 진화

2항 봉인의 중심들

말하자면 반복은 결코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라 언제나 본래적으로 ‘차이나는 것’의 반복이고, 또 차이 그 자체는 [차이의 차이라는 의미에서] 반복을 대상으로 한다. (543쪽)

3항 개체화 요인들, 나, 자아

4항 심리적 체계들 안에서 타인이 지닌 본성과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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