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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기계들] 3강 후기

밤하늘의별소리 2015.07.27 02:53 조회 수 : 761


 안녕하세요. [욕망하는 기계들] 수업 마감 직전에 등록한 김서현입니다 :)


지난 시간에 후기를 부탁해주셨는데 제가 강좌 후기를 처음 써보는 것이라 어떻게 써야할 지 모르겠더라구요. 게다가 제가 필기를 안하는 편은 아니지만, 노트 관리를 못해서 필기해놓은 노트는 매번 잊어버리고, 노트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시 보면서는 뭐라고 써놓은지 스스로도 못알아보는 멍청이라... 이전에 멋진 후기를 써주신 분들과 같은 양식으로 후기를 쓰지는 못할 것 같아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따라서, 아래의 후기는 기존의 허접한 지식을 토대로 삼아 서책을 읽고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제 나름대로 이해한 내용입니다. 틀린 부분이 많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ㅠㅠ). 읽어보시고 이상하고 틀린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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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뢰즈는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을 통해서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을 발견한 것을 “욕망적 생산을 발견한 탐험적, 개척적, 혁명적 요소”(210)를 발견했다고 인정한다. 즉, 무의식적 욕망의 발견은 인간이 스스로 이성을 사용하여 자신의 사고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합리적인 인간상을 무너뜨린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욕망의 운동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욕망을 통제하고 자아를 결핍된 존재로 만드는 점을 비판한다. 프로이트는 모든 정신적 문제를 오이디푸스 신화에 근거하여 유아의 성장 과정에서 발생한 가족 문제로 회귀시킬 뿐만 아니라, 무의식을 완벽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치료를 제도화하고 끝없이 연장시킴으로써 사람들을 치료에 종속시킨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하는 자아와 주체의 개념을 살펴보자: 프로이트는 ‘자아’(ego)가 자유롭다기보다는 ‘무의식의 본능/욕망’(id)과 ‘사회적 초자아’(super-ego) 사이의 긴장 상태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또한, 인간의 성장발달단계에서 아이가 어머니와의 애착관계(성적 욕망)를 느끼지만, 결국 아버지의 금지 앞에서 그 욕망이 좌절된다고 말한다. 결국, 오이디푸스화를 겪은 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아버지의 금지-법을 내면화하는 ‘결핍’된 존재가 된다. 


 라캉 역시 욕망을 통해서 주체(sujet)를 한계있는 결핍된 존재로 규정하는데, 이는 그의 실재계-상징계-상상계(the Real-the Symbolic-the Imaginary, RSI) 이론을 살펴보면 확인할 수 있다. 라캉의 자아는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은 어린 아이는 자신의 몸을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 느끼지 못하기에 세상과 자신을 완전하게 분리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이는 거울단계를 거치면서 상상계에 진입하게된다. 즉, 거울 속에서 자신의 완전한 몸-이미지를 보고, 거울에 비친 이상적 자아로서의 타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오인(misrecognition)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상상계 속에서 아이는 이상적 자아를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이 완벽한 유기적인 존재라는 ‘나르시시즘’을 가지게 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신체적 감각과 멀어지는 소외된 존재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라캉은 아이가 사회화 과정을 위해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존재했던 ‘언어’로만 자신의 존재를 파악할 수 밖에 없는 결핍된 존재가 된다고 설명한다. 한 마디로 말해, 세상과의 일체감을 느꼈던 아이는 거울단계 그리고 언어습득을 거치면서 점점 자기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결핍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장과정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이전의 충만함을 욕망한다고 해도, 불완전한 상징계에서는 소타자(objet petit a)를 욕망하는 것이기에 자아의 욕망은 완전히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오이디푸스화 관점에서 설명해보자면, 상상계에서는 아이가 어릴 때에는 아이가 필요할 때마다 엄마가 자신을 돌보아주는 것을 통해 엄마의 결핍을 자신이 완전히 충족해줄 수 있다는 완전한 자아라는 상상과 모성과의 일체감을 느끼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또한 아이가 상징계로 진입하는 것은 어머니와 일체된 감정을 느꼈던 상상계에서, 아버지의 ‘금지’(No!)와 마주하면서 자신이 어머니의 결핍을 충족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법이 더 상위에 있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자리/권위를 라캉은 ‘phallus’(남근)이라고 하고, 상징계에 들어간 존재는 남근을 선망하게 된다고 말한다. 들뢰즈가 정신분석학이 모든 현상을 오이디푸스 신화로 환원시킨다고 비판하는 것은, 상징계의 억압을 모두 성장단계의 아버지의 자리 혹은 역할과 동일시시킴으로써 그 억압을 벗어나서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다는 데에 있다. 이는 2-7장 <탄압과 억압>(Social Repression and Psychic Repression)에 자세히 나와있다. 들뢰즈는 라이히의 작업을 참고하여서, 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가족의 억압이 사회의 억압으로 확산된다고 보기 어려우며, 사회가 “유순한 주체들을 형서하기 위해, 또 탄압적 구조들 속에 포함되는 사회 구성체의 재생산을 확포하기 위해, 탄압(social)은 억압(psychic)이 필요하여”(211) 오이디푸스 환상을 강화하고 그 메타포를 사회 전체로 확산시킨다는 것이이다. 


 이렇듯 프로이트와 라캉은 오이디푸스화를 통하여 자아/주체를 억압되고 결핍된 존재로 정의내린다. 반면 들뢰즈는 이 결핍을 지닌 자아/주체상을 비판하며, 주체란 “욕망 기계들 곁에서 여분(residuum)으로 생성”(47)되며 “유일한 주체는 <자아>(ego)가 아니라 충동(drive)”(115)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비록 들뢰즈가 한 존재를 ‘인간’에 한정시키지 않고 ‘탈인간화’(dehumanization)을 통해서 욕망-기계로 이해하기는 하였지만, 그가 ‘주체’ 개념을 완전히 져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들뢰즈가 탈인간화를 통해 주체 개념을 생각하는 것은 그가 협소한 의미에서 벗어나서 더 넓고 자유로운 확장된 주체를 생각한 것이다. 들뢰즈는 맑스의 말을 빌려 프로이트가 무신론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신의 자리에 인간을 놓음으로써 인간을 특권화시키는 우를 범했다고 주장한다: “신을 부정하는 자는 <2차적인 것>밖에 하고 있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 실존을 내세우기 위해, 인간을 신의 자리에 놓기 위해(변형을 인정함) 신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11). 들뢰즈는 더 나아가 이러한 인간의 특권화가 “인간의 자리가 전혀 전혀 딴 곳에, 즉 인간과 자연의 공통-외연성에 있다”(111)고 말하며, 인간이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신화를 지어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결국, 인간이 자연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때, “인간은 만물의 왕이 아니”(27)라, “인간은 온갖 형태 또는 온갖 종류의 깊은 삶과 접촉해”(27)서 “모든 것은 재현이 아니”(49)라 “삶이고 체험”(49)으로서 경험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도 다양한 욕망-기계로 구성된 존재로써, 자신의 외부의 기계들과 절단하고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체는 이 욕망이 흐르는 과정에서 발생한 ‘강도’(intensity)를 통해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들뢰즈의 주체-니체의 주체를 조금 더 명확히 해야할 필요가 있음!!) 


 중요한 것은, 욕망-기계들이 결합하는 과정에서 이미 상징계 혹은 사회 체제 속에 기입되어있는 방향으로의 결합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의 결합을 모색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는 들뢰즈가 기관없는 몸이 “비생산적”(nonproductive), “반생산적”(anti-productive)이지만 “여전히 연결 종합 내지 생산적 종합의 한 특성”이라고 말하는 것과도 연결된다(33). 또한, 그가 세 가지 종합중 ‘분리종합/이접적 종합’(dysjunctive synthesis)를 중요하게 여긴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고 보인다(145). 다시 라캉의 실재계-상징계-상상계로 돌아와서 생각해보자. 라캉은 언어/사회적 기호로 구성된 ‘상징계’가 불완전함을 인정했고, 사람들이 그 불완전함을 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다(그렇기에 라캉에게 ‘정신분석학의 윤리’란 자신이 분열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라캉의 ‘실재계’ 중요성을 강조한 지젝에 따르면, 상징계의 모순이 환상을 통해 봉합되어있지만 그 봉합이 터지면서 ‘실재계’의 빛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젝-라캉의 실재계는 그 자체로 현존하고 있다기보다는 상징계가 설정된 이후에 그 모순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들뢰즈는 실재계는 잠재적인 힘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욕망-기계와 기관없는 신체들의 흐름과 연결을 통해서 기존 상징계 너머의 생산을 현실화(actualization) 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들뢰즈는 기존의 상상계/상징계적 질서와 절단하고 새로운 흐름으로 나아갈 때, 즉 반생산에서 확인할 수 있듯 아방가르드(avant-garde)와 같이 기존의 것을 파괴(destroy)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생산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욕망의 “전의식”(의식)(187)적 투자는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해진다는 주장을 넘어서서, 욕망이 ‘반동적’(reactionary)으로 작용할 때 오이디푸스화가 마련해놓은 “분리차별적 사용”(189)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에 이는 대중의 욕망을 활용하는 파시스트에 영합될 위험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무의식 역시 기존의 상징계에서 찾을 수 없는 새로운 길을 생산하는 “혁명적”(revolutionary) 형태, 즉 유목적, 다의적(nomadic and poly-vocal) 성격,을 띄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과정 속에서만 주체는 하나의 중심에 고정되는 것을 지속적으로 탈피하고, 소수자들이 “되는”(becoming) 경험을 통해 끊임없이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서 ) 들뢰즈는 연결종합의 두 가지 사용을 예시로 든다: “하나는 온전하고 특유한 사용이요, 다른 하나는 부분적이고 비-특유한 사용이다. 첫쨰 사용에 있어 욕망은 하나의 고정된 주체, 즉 어느 특정한 성으로 명시된 자아와 온전한 인물들로 규정된 완전한 대상들을 동시에 받아들인다”고 이야기하며 오이디푸스를 예시로 듭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는 한국어-프랑스어 용어대조표에 보면 ‘global’이라는 단어라고 되어있고 영어판에서도 ‘global’을 사용합니다. 반면, 제 3장에서는 “보편적인 것, 즉 기관없는 몸과 욕망적 생산”이라고 말하는데요, 여기서 ‘보편적인 것’은 ‘universal’을 번역한 것으로 확인되어집니다. 물론 global 이 전체적이고 포괄적이라는 용어로 쓰이기도하지만, 특별히 ‘오이디푸스화’를 global이라는 단어로 설명한 것은 들뢰즈가 자본주의 확산을 통한 세계화를 비판한 것과 연결될 수 있지 않나(라고 망상에 빠져보았습니다.) 앞으로 책을 읽어나가면서 오이디푸스화가 자본주의비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물론, 제 2장에서도 부분부분 진행되고 있기는 하지만요!) 더 세밀하게 읽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 수정 : 오늘 수업할 부분을 읽다 보니, 보편적 오이디푸스가 모든 사회에 출몰한다(a univeral Oedipus haunts societies)라는 부분이 있네요.. 그렇다면 이전 부분은 제가 과잉해석한 것으로..ㅎㅎ


그리고 질문 ) '자아'(ego)와 '주체'(subject)가 일반적으로 어떻게 구분되어서 쓰이나요? 프로이트는 분명 '자아'(ego)를 이야기한 것 같고, 라캉은 'sujet(subject)' 단어를 쓰며 '주체'를 이야기하고, 들뢰즈는 '자아'가 아닌 충동/잔여로서의 '주체'를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혹시 가능하다면 설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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