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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수유너머104 봄강좌[니체 필로비오스] 2강 후기 및 3강 공지
 
‘영원한 어린아이(57)’
 

열일곱니체.jpg

-열일곱살의 니체의 모습이랍니다.

“나는 그때 근본적인 원칙도, 희망도, 단 하나의 즐거운 기억도 없이 고통스러운 경험이나 실망스러운 일만을 겪으면서 절망하여 갈팡질팡하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쇼펜하우어의 대표작이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상상해 보라. 어느 날 나는 그의 책을 발견했다. 헌책방에서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그 책을 집어 몇 쪽을 넘겨 보았다. 도대체 어떤 악령이 내게 ‘이 책을 집으로 가지고 가라’고 속삭였는지 모르겠다. 이런 행동은 평소 책을 살 때 망설이던 버릇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집에 있던 나는 새로 획득한 보물을 가지고 소파에 몸을 묻은 채 그 정력적이고 우울한 천재가 뿜어내는 마력에 나를 맡겨 보았다. …… 여기에서 나는 세계와 인생, 그리고 나 자신의 본성이 소름 끼치도록 웅장하게 비치고 있는 하나의 거울을 보았다. …… 여기에서 나는 병과 건강, 유배와 피난처, 지옥과 천국을 보았다.”(니체, <라이프치히에서 보낸 2년에 대한 회고> 중에서)


지난 2강에서는 1강의 뒷부분과 [선악의 저편] 5장, 6장까지 수업을 했습니다.
7장과 8장 발제 및 강의가 3강의 내용에 앞서 진행될 예정이오니
챙겨가진 발제문들을 미리 읽어 보시고 잘 챙겨 오시기를 부탁드립니다.
 
5장에서는 [선악의 저편]의 핵심적인 주제라 할 수 있는 ‘도덕’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니체에 따르면, 모든 도덕에서 본질적이고 귀중한 것은 그것이 오랫동안에 걸친 강제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언어가 스토아주의, 포르 루아얄이나 청교도주의에 힘과 자유를 가져다준 강제를 상기시킵니다.
즉 운율에 강제, 각운과 리듬의 억압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사유 그 자체에서나 통치에서나 언론과 설득에서나 예술이나 윤리에서 ‘자의적 법칙의 억압’ 덕분에
비로소 자유롭고 정교하고 대담하며 춤같이 경쾌하고 장인적인 확실성으로 존재할 수 있었고,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도덕은 방임과는 반대의 것이며, ‘자연’에 대한 폭압이고,
‘이성’에 대해서도 폭압이라는 것입니다. 방임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자연’이며, ‘자연적’이라는 사실이 적지 않게 있을 법한 일이라고 합니다.

특히 예술가의 경우, 모두 자신의 ‘가장 자연적인’ 상태, 즉 ‘영감’의 순간에 나타나는
자유로운 정돈, 설정, 처리, 형성이 방임의 감정과 매우 거리가 멀고,
바로 이 엄격함과 확실성 때문에 개념에 의해 만들어지는 모든 형식화를 비웃는 수천가지 법칙에
그 스스로 엄격하고 미묘하게 종속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오랫동안 지상에서의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덕, 예술, 음악, 무용, 이성, 정신성이 정화되고 세련되며 아름답고 신성한 것이 항상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지속된 정신의 부자유, 사상을 전달하는 데 불신에 가득 찬 강제와 사상가 스스로에게 부과했던
훈육, 또 발생하는 모든 사건을 그리스도교적인 도식에 따른 오랫동안 지속된 정신적 의지 등,
이러한 모든 폭력적인 것, 자의적인 것, 가혹한 것, 전율할 만한 것, 부조리한 것이 강함과
무자비한 호기심과 미묘한 활동성을 갖춘 유럽 정신을 육성시킨 수단임을 니체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때 힘과 정신도 많이 억압당하고 부패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도덕 속에 있는 ‘자연’은 방임을, 즉 너무나도 큰 자유를 미워하도록 가르치며 제한된 지평에 대한 욕구,
가장 시급한 과제를 해결하려는 욕구를 심어준다는 것입니다.
이는 시야를 좁힐 것을 가르치며,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삶의 조건과 성장의 조건으로 어리석음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오랫동안 복종해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파멸하게 되며 자신에 대한
마지막 존경심처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니체에게는 자연의 도덕적 명법처럼 보이며, 민족, 인종, 시대, 신분,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이라는 동물 전체, 인류를 향한 것(188)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자신을 거는 종교적 인간형이 학문적 인간형보다도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3장에서는 종교적인 것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학자는 용기, 현명함, 예민함이 필요한
새롭고 위험한 ‘큰 사냥’터에서 쓸모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예민한 눈과 코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jpg

(-쇼펜하우어 1788 ~ 1860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등을 지음.)



종교적 인간의 영혼 속에서 지와 양심의 문제가 어떤 역사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추측하고 확인하려는 사람은
스스로 그만큼 깊고 상처받고 거대해야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위험하고 고통에 찬 체험의 혼란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정리하고 형식화할 수 있게 하는,
밝고 악의에 찬 정신성의 저 드넓게 펼쳐진 하늘이 여전히 필요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몇 가지를 알기 위해서 스스로 모든 것을 해야만 한다(45)는 것입니다.
니체는 에르네스트 르낭의 문장(48)에 대하여, 자기 자신에게 대척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
실로 정중하고 훌륭한 일이라고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르낭.jpg

(-에네르스트 르낭, 1823 ~ 1892년 <예수의 생애(1863)>를 지음.
 그는 예수를 자신의 종족과 똑같은 용모, 특징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묘사함으로써, 당대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고, 콜레즈 드 프랑스의 교수직도 잃었다고 합니다.)


니체는 염세주의와 염세주의가 해방되도록 오랫동안 노력하는 사람,
한번은 초아시아적인 눈으로 세계를 가장 부정하는 사유방식으로 꿰뚫고 들어가 바닥을 본 적이 있는
이러한 사람은 그것을 의도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이로 말미암아 반대되는 이상에 눈을 뜨게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가장 대담하고 생명력 넘치며 세계를 긍정하는 인간의 이상에 눈을 뜨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니체는 이러한 과거에 그렇게 존재했고, 현재도 그렇게 존재하는 방식대로, 인생이라는 전체 작품과 연극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바로 이러한 연극이 필요한 사람에 대해 영원을 넘어 지치지 않고
다시 한번(da capo)를 외치면서 그것을 다시 갖고자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에게는 항상 다시 자신이 필요하며, 그리고 필요하게끔 만들기 때문인데,
니체는 이것을 악순환인 신(circulus vitiosus deus)(56)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을 둘러싼 거리와 말하자면 공간은 인간의 정신적인 시선과 통찰의 힘과 함께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세계는 더욱 깊어지고 언제나 새로운 별들이, 새로운 수수께끼와 형상들이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모든 억압과 통찰, 사유의 과정들이 결국 정신의 눈을 예리함과 통찰력으로 단련시켜 왔으며,
이 모든 것은 아마도 자신을 훈련시키기 위한 계기에 불과할 것이며,
하나의 놀이, 어린이나 어린아이 같은 자들을 위한 그 무엇에 불과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니체기독교.jpg

 

(- 위의 삽화는 니체가 [선악의 저편] 3장에서 많은 이들이 종교를 삶으로 받아들이고
강제와 훈육, 고통을 통하여 넘어서는 과정을 지나치게 편협화시키는 위험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진경 선생님께서 늘 주의하여 말씀하시듯이, 종교와 다양한 도덕적 개념들에 관한 
니체의 사상을 제대로, 잘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특히, 니체 강독강좌는 수업시간 무조건 출석주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니체는 그것 때문에 싸워왔고 고통받아왔던 장엄한 개념들,
즉 ‘신’이나 ‘죄’ 같은 개념들이 언젠가는 우리 자신에게도 중요치 않은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아마 ‘노인’에게는 다시 놀이 도구와는 다른
새로운 고통, 과제들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변함없이 여전히 어린아이이며, 영원한 어린아이(57)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자신을 훈련시키고 단련시키기 위한 계기로서
스스로에게 새로운 고통과 질문을 생산해내며 자신을 위한 연극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다시 필요로 하며, 지치지 않고 다시 한번을 외치면서
니체 8강까지 즐거운 놀이를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3강 4월 14일 발제해주실 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발제 - 이준형님
[선악의 저편]
제9장 고귀함이란 무엇인가?
높은 산에서 - 후곡
 
2) 발제 - 강성찬님
[도덕의 계보 - 하나의 논박서]
서문
제1논문 : '선'과 '악', '좋음'과 '나쁨'
 
*3강 4월 14일 간식을 담당해주실 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3강 간식 - 송0림님, 고0인님, 한0호님, 한0원님, 권0오님, 정0희님.
 
*4강 후에는 니체 강독강좌팀 전체의 공식 뒷풀이가 있을 예정이오니
가능하면 모두 참석해주시면 즐거운 만남의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참석비는 기본 5,000원이고, 강의실에서 대형을 변경하여 까페와 주방에서 공급되는
안주로 뒷풀이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혹시, 집에서 친구를 못 만나 잠자고 있는 함께 나누시고 싶은 술이나 안주가 있으시면
챙겨 오시면 더욱 좋습니다.
 
그럼, 금요일 저녁 7시 30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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