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데카르트가 학문의 제1원리로서 ‘코기토’를 천명한 이래,
이후의 모든 서양 철학자를 고심하게 만든 문제입니다.
나의 마음은 내가 직접 경험할 수 있기에 확실한 반면,
타인의 마음은 그럴 수 없기에 의심이 된다는 점이
난관의 핵심입니다.
많은 철학자들은 이른바 ‘유비 추리’의 방법에 기대어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나의 신체와 타인의 신체에는 유사성이 있다’는 전제와
‘나의 신체와 나의 마음에는 상관성이 있다’는 전제로부터,
‘나의 신체와 유사한 타인의 신체에는 그것과 상관적인 타인의 마음이 존재한다’고
결론을 도출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위의 두 전제로부터 타인의 마음이 존재한다는 점이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이미 타인을 지각하고 있어야만,
근원적인 타인의 지각이 선행되어 있어야만
나의 신체와 타인의 신체가 유사성이 있다는 것도
신체와 마음 간에 상관성이 있다는 것도
비로소 확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을 따라 입을 벌리는 영아의 경우가 이 점을 잘 예시하여 줍니다.
“그는 자신의 의도를 자신의 신체에서 지각하고,
자신의 신체로 나의 신체를 지각하며,
이로써 나의 의도를 자신의 신체에서 지각한다.”
다시 말해서
나의 의식과 나의 신체 사이에, 나의 의식과 타인의 신체 사이에,
타인의 의식과 타인의 신체 사이에, 타인의 의식과 나의 신체 사이에,
내적인 또는 통일적인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타인’이란 이 네 가지 요인들 간의 근원적인 관계로부터
완성되어 나오는 하나의 체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타인’과 대비되는 ‘나’ 또한
그 일차적인 관계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또 다른 체계일 뿐입니다.
메를로-퐁티가 보여주는 이 같은 사고의 길을 따를 때,
‘타인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와 같은 종류의 문제는
애시당초 문제시할 필요가 없는 것을 문제시한
일종의 사이비 문제로서 자연스럽게 해소되어 버립니다.
이 거짓 문제와 항상 동행하는 ‘유아론’에 대해 운운하는 일도
더 이상 시간낭비입니다.
나의 의식과 나의 신체가, 타인의 의식과 타인의 신체가
이와 같이 한 곳에 직접적, 내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상태를
메를로-퐁티는 익명적 신체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익명성’을 갖는 것은,
이 근원적 신체 안에는 아직 ‘나’도 없고 아직 ‘너’도 없고
아직 ‘그’도 없고 아직 ‘그녀’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와 ‘너’와 ‘그’와 ‘그녀’는,
모든 ‘인격’과 ‘자기 동일성’은
그 신체로부터 나중에 발생하는 추상적인 존재입니다.
그것이 ‘신체성’을 갖는 것은,
사유의 층위(‘나는 생각한다’)에 선행하는
지각의 층위(‘나는 할 수 있다’)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 하나만 지적하고
강좌 후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저는 (그리고 아마도 메를로-퐁티도) 편의상
나의 의식과 나의 신체와 타인의 의식과 타인의 신체 간에 내적 관계가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이 관계에 앞서서, 이 익명적 신체에 선행하여
‘나의’ 의식, ‘나의’ 신체, ‘타인의’ 의식, ‘타인의’ 신체가
자체적으로 독립적으로 별도로 실존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차 언급한 바와 같이,
‘나’와 ‘타인’은 그 자체로 실존하는 일차적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익명적 신체로부터 추후에 파생되어 나오는
이차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잘 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신체' 개념에 대해 조금만 부연하겠습니다 ㅎ
메를로퐁티가 이야기하는 '신체'는 일반적인 의미의 신체가 아닙니다.
즉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에서의 '물질'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는 메를로퐁티가 현상에 주목하면서 저런 식의 이분법과 거리를 두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를로퐁티는 자신의 신체 개념을 '고유한 신체'라고 부릅니다.)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에는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물질'이라 생각하는 것들을 메를로퐁티라면 '지각된 것'이라고 말할 겁니다.
우리가 '정신'이라 생각하는 것들은 '지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반성)하는 것'이라고 말할 테구요.
즉 지각을 중심에 두었다고 하는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은
이렇게 일차적인 것으로서의 지각-이차적인 것으로서의 반성이라는 틀을 통해 세상을 설명합니다.
이때 '우리가 근본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존재라면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메를로퐁티가 답으로 내놓는 것이 '고유한 신체'이지요.
즉 지각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세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주체이기 때문이고,
나무를 볼 수 있다, 달릴 수 있다, 케익을 먹을 수 있다 라고 하는 이 실제적인 살아감의 차원의 근거로서
메를로퐁티가 제시하는 것이 바로 '고유한 신체'입니다.
즉 메를로퐁티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이분법을 거부하면서
오히려 우리 실존적 차원에서 그러한 이분법조차 가능하게 하는 층위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고
이 층위를 '고유한 신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신체는 물질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의 어떤 능력, 힘을 이야기하는 거겠죠.
그럼 통상적인 의미의 물질적인 신체와 헷갈리게 왜 그런 이름으로 부르냐.. 라고 물을 수는 있을 거 같고요^^
다만 이 '실제적인 살아감'의 차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정신, 의식, 사고가 아니라는 걸 강조하고 싶어서
굳이 '신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신체가 그 신체가 아니라고 하는데 그럼 대체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신체가 뭐냐'라는 질문에 대해 약간 대답을 해봤습니다.
한마디로 메를로퐁티에게 신체는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실제적인 살아감의 능력인데,
비판적으로 보자면 약간 모호한 감이 없지 않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