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존재들이 덩어리를 이루어 살아가는데 어떤 관계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실천 방안이 제시되어 있는 논어.
세속적인 생존을 위해서는 나 아닌 누군가 또는 어떤 것을 해칠 수 밖에 없는 숙명으로 이뤄진 공동체의 삶에서 특이한 존재인 내가 또 다른 특이한 존재인 타인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갈 것인가는 내 생존을 위해서도 타인의 생존을 위해서도 절체절명의 중요한 문제이다.
나와 타인과의 끊임없는 상호관계를 규정짓는 상황에서 인간다움의 최종심급인 인(仁)의 중요성은 논어에서 여러 번 강조되어 있다. 태생적으로 달성하기가 불가능한 인(仁)을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하면 어렵다. 그러나 달성이 불가능하다고 애초부터 시도조차 하지 않아야 할 것이 아니라, 인(仁)을 추구하는 그 "순간"이 전부이며 그때 그때의 완결로서의 인(仁)을 추구해야 하며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의 인(仁)이 아니라 가까운 내 삶의 주변부터 끊임없이 실천하는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서의 인(仁)의 이해가 중요하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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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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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본
네 선생님 공자든 소크라테스든 그들의 기획은 현실을 바꾸고자 한 것이지요.
서로 상이한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공자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개념, 인이란 무엇인가?, 효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는 중요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늘 인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고 답했지요.
그런데 이런식의 보편개념의 결여를 두고, 아직 형이상학적 사유로 나아가지 않았다든지, 철학적인 개념이 부족했다든지... 하는 식의 평가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자와 그 시대 사람들과 그리스시대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인식의 장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메논을 이야기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말씀드려야 했던 것 같습니다. ㅠㅠ
다음 강의시간에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수업시간에 질문하고 싶었으나.. 댓글로 대신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 도시공화국에서 출발했기에 보편으로 나아가고자 했고, 공자는 동북아의 거대 제국(?)에서 출발했기에 보편개념 불가능성의 관점에서 인을 말한게 아닐까요? 아직도 유럽의 사유는 개인에서 출발하고, 동북아의 사유는 공동체에서 출발한다는 이미지를 제가 가지고 있는 것도 이런 서로 다른 두 방향의 사유의 잔해가 남아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두 방향 다 사회 내에서 좀 더 바람직한(?) 실천방향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인지 소크라테스는 산파술이라는 대화를 통해 'OO은 OO이다'의 방식으로 말하지 않고, 'OO은 OO이 아니다'의 방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소크라테스의 경우 보편적 진리가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부정의 방식으로만 말하여질 수 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소크라테스와 공자가 다른 층위에서 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고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했을 뿐, 서로 다른 보편과 구체의 사유를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