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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반복] 3강 후기

김효영 2016.01.23 22:12 조회 수 : 1000

밀렸던 진도를 성공적으로 나가기 이해

숨가쁘게 달렸던 3, 후기로 남겨요.

 

반복과 차이의 서론을 시작으로, 차이, 반복 각각을 거쳐 차이와 반복으로 귀결되는

<차이와 반복>, 이번 시간에는 2장과 3장을 나갔습니다.

 

지난주에는 아르토의 <첸치 일가> 를 영상으로 함께 보고,

이번주에는 칠판에 대량의 이미지와 도식들이 등장하여

여러모로 어려운 들뢰즈의 사유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는데요.

먼저 2, 대자적 반복 정리합니다.

 

2장 대자적 반복

2장에서는 즉자적 차이를 논했던 1장에 이어 다시 반복으로 돌아와, 반복을 시간의 반복과 반복의 세가지 종합 그리고, 영원회귀의 이야기로 전개합니다.

 

2장에서 들뢰즈는 반복이 이뤄지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라고 말합니다. 가령 기호는 광고나 문자와 같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지나 인상과 유사한 것으로, 이것들은 정신을 형성합니다. 기호들의 영역은 (유기체적 형식 & 감성적인 형식) 이 모든 것에 의해 형성됩니다. 여기서 정신이라는 것은 흄에 따르면 상상력에 해당하는데, 이 상상력은 현재와 관련됩니다. 상상력은 구체적으로 인상들, 이미지들을 수축하는 역할을 하는데요. 이러한 수축이라는 개념은, 선생님께서 시간과 관련해 꼭 한번은 읽어보길 권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11권에 등장하는, 아주 오래된 테마라고 합니다. 들뢰즈는 흄의 상상력이란 개념을 수동성의 으로 이해하고, 이 책에서는 응시라는 개념으로 강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들뢰즈가 전제하는 것이 항상 수동적 종합이란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더니티의 산물인 주체성에서 벗어나 사유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들뢰즈는 이러한 주체성은 파생적인 것, 만들어낸 것, 가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의 주요 관점 중 하나가 항상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감이기 때문에, 주체라는 것은 응시라는 수동성이 해석과 설명이라는 능동성을 획득하며, 파생적으로 만들어집니다. 2장의 주요 내용 중 하나인 시간의 반복의 키워드는, 앞서 보았던 수동적 종합의 장이 되는 응시입니다. 응시하는 작은 자아(애벌레 자아)는 즉자의 층위와 반성적, 재현적인 층위에서 반복을 각각 발생시킨 결과로 수동적 종합에서 주체를 탄생시킵니다. 들뢰즈가 제시하는 시간의 세가지 종합을 현재-> 과거 -> 미래의 순으로 따라가보면요.


시간의 수동적 종합의 첫 번째는 살아있는 현재입니다. 시간의 선험성?을 전제하는 칸트와 달리 발생론적 존재론을 펼치는 들뢰즈에게 시간은 주관적이고, ‘현재 안에서 과거에서 미래로, 따라서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나아’(171)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종합은 현재입니다. 이를 통해 시간의 화살에 방향을 부여하면, 과거는 재현에 의한 반성적 과거가 되고 미래도 역시 예견에 의한 반성적 미래입니다. 가령, 시계가 4시를 알렸다고 할 때, ‘4시는 지나갔거나 뒤따라올 30분과 더불어, 심지어 지각 세계의 지평에서는 아침과 저녁의 뒤바뀐 4시들과 더불어 갈등 관계에 놓’(175)입니다. 따라서 시계 비유를 이용해 각각 요소들의 반복과 경우들의 반복을 보여주는 베르그손과 흄은 결국 현재라는 것에 갇혀있을 수 밖에 없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수동적 종합이 구성하는 것은 ‘‘이것이 계속되라라는 우리의 기대이며, 두 요소 중의 하나가 다른 요소 이후에 뒤따라올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178)입니다. 들뢰즈가 이를 통해 언급하는 것은 응시하는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반복의 융합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역으로 또한 반복이 또한 두 차이 사이에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면, 수평적 구도에서는 반복이지만, 수직적 구도에서는 차이라는 점에서 영원회귀의 반복임을 뜻하게 됩니다.


시간의 두 번째 종합은 순수 과거입니다. 현재로서의 첫 번째 종합이 그저 지나가는 현재의 정호라면, 그 정초가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갖게 되는 근거가 되는 것이 과거로서의 기억입니다. 즉 응시하는 자아가 갖고 있는 과거의 이미지와 인상들은 기억을 통해, 수동적에서 능동적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되고, 들뢰즈는 이러한 역할을 하는 수동적 종합인 대문자 기억(Memorie: 기억 자체)를 소문자 기억(memorie-기억)과 구분하여 말합니다. 이것은 베르그송의 유명한 원뿔 비유와도 연관을 갖습니다. 원뿔이 바닥과 맞닿아 있는 꼭지점은 순수 현재를, 그 위로 원뿔의 기둥을 펼쳐나가는 부분은 기억의 잠재태인 순수 과거와 순수 기억을 뜻합니다. 재미있게도, 이 베르그손의 원뿔 그림을 뒤집어 놓으면 actualvirtual로 나뉘는 도식이 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현재와 과거의 동시간성의 역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지요. 선생님이 감동을 금지 못했다는 우리의 순간순간은 우주 전체의 과거가 응축되어 있는 것이라는 문장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베르그손이 계속되는 단계들에 대해 말할 때, 모든 단계들은 서로 함께 공존하는 것이지요.


시간의 세 번째 종합은 영원회귀의 미래입니다. 들뢰즈는 이것을 빗장이 풀린 시간’, ‘미친 시간’, ‘텅 빈 순수한 형식으로서의 시간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시간은 미래의 어떤 행위와 관계하는 반복의 시간이며, 미래에 도달한 평민들 또는 초인들을 위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 때에 우리는 영원회귀를 하나의 완결된 원환으로 보지 말아야 하는데요. 선생님이 그림을 통해 설명해주셨듯, 영원회귀는 일그러진 원을 만들며 원 안에 있지 않고, 탈중심성을 갖는 운동을 해나갑니다. 수업시간에 예로 들으셨던, 박재규의 박정희 암살과 프랑스 민중들의 루이 16세 참수와 같이 시간차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두 사건은 일그러진 원 또는 탈중심적인 원안에서 만나게 되고, 주어와 목적어만 바뀌었을 뿐 커다랗게 반복의 형태를 띄게 되는 것이지요.


2장은 위와 같은 시간의 세가지 종합을 언급한 후, 반복의 세가지 종합을 이어 논합니다; 현재의 시간을 구성하며, 총괄적 주체화를 이루는 하비투스, 순수과거를 구성하며 현행적 대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잠재적 대상, 도래하는 영원회귀의 시간을 구성하는 무-바탕.

이러한 일련의 논의구조를 이미지로 그려보면 이렇습니다.


 

그리고 위 그림의 윗부분에는, 또 다시 t,t, t가 가지치기를 반복하며 뻗어나갑니다. 어떤 순환주기 안의 반복이나 순환적 반복이 아닌, 그것들을 훨씬 상회하는 우월적 반복이자, 최상의 반복으로서의 영원회귀입니다.

 

2장의 마지막 부분, 문학 체계라는 소제목으로 들뢰즈는 문학을 예로 들어 자신의 존재론을 설명하는데요. 가령, 프루스트의 소설에 등장하는 마들렌, 그것이 과거와 현재에 각각 전달하는 이미지와 인상은 같을 수 없습니다. 마들렌 맛을 통해 콩브레의 이미지에 담지만, 현재의 마들렌의 맛은 과거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떠올리는 과거의 어떤 이미지와 인상은 과거의 것과 같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본래의 과거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들뢰즈는 이런 측면에서의 원본은 없다고 말합니다. 잠재된 것이 현행화될 때는 반드시 왜곡되어 원본 그대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사라진 현재와 현행적 현재라는 두 계열의 환원 불가능성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순수과거는 또한 허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계열은 서로 공명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앞선 박재규 암살과 루이 16세 참수가 잠재적이고 강도적인 층위에서 서로 공명하고 반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공명에서 우리는 주름의 삼위일체를 대입할 수 있습니다.


라이프니츠의 개념들에서 기원하는 들뢰즈의 주름 개념은 3가지(밖주름-explication, 안주름-implication, 안주름-complication)fh 주름 운동의 삼위일체를 이룹니다. 각 계열은 설명(-주름)되는 동시에 함축(-주름)되면서 복잡화(-주름)의 길로 들어선다는 들뢰즈의 일의성의 존재론입니다. 이는 카오스와 같은 강도적 층위의 안주름과 코스모스와 같은 현행적 층위의 밖주름의 동시성, 공존성이며, 이러한 계열들이 서로 앞서거나 뒤서면서 매 순간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주름운동, 봉투운동은 모든 것을 복잡한 온-주름으로 만드는 카오스 안에서 이루어진다. 발산하는 계열들, 그 본연의 계열들은 단일한 통일성을 이루고그것이 곧 일체를 이루는 체계의 총체성이다’(277).

 

3장 사유의 이미지

<차이와 반복>의 분기점이 되는 3장은, 전통철학 체계를 공준이라고 칭하고, 이를 조목조목 8개의 공준별로 비판하는 장입니다. 여기서 공준은 <천의 고원>에 등장하는 공리계와 같은 의미라고 하는데요. 전통적인 철학적 사유, 특히 재현을 뛰어넘는다는 3장의 내용은, 그의 이론의 가장 중요한 점이 탈주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들뢰즈가 표상(재현)은 철학을 독살한다고 언급했듯, 이미지없는 사유 생식성의 사유를 주장하는 들뢰즈에게 재현은 탈주해야 할 것입니다. 주체중심성을 기반으로 하는 재현은 유비와 유사성, 특히 동일성을 전제로 합니다. 선생님이 하이데거가 기가막히게 비유했다고 말씀하셨듯, 그가 앞에 세워 닥달하다고 말했던 표상은, 실재하는 것들을 변형시키고 왜곡해 (반복을)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는 전제 있는 사유인 선-철학적 이미지(첫번 째 공준)이고, 코기토라는 사유의 일반적인 이미지(두번째 공준), 이미 확립된 길만을 걷는 재인으로서의 사유(세번째 공준) 등은 모두 들뢰즈가 생각하는 사유를 가능케 하는 지점(돌발적인 충격, 사유의 폭력)등과 반대됩니다.


플라톤의 <국가>편의 한 대목에서 이러한 사유의 두 가지 사태를 구별하는 준거점이 나오는데요. 하나는 사유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사태, 또 다른 하나는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사태입니다. 후자가 철학적 사유의 전통적인 사태이고, 이를 philia라고 칭합니다. philia사유 주체의 선한 의지와 사유의 선한 본성을 전제하고 참에 대해 주장하는 친근성’(310)을 전제로 합니다. 들뢰즈가 주장하는 전자의 사유는 이와는 달리, 불법 침입, 폭력, 적을 통해, 혹은 지혜의 증오에서 출발합니다. 진정한 사유는 자기 자신을 전제하는 사유의 이미지의 파괴, 사유 자체 속에서 일어나야 할 사유이므로, 이러한 들뢰즈의 사유는 창조성(생식성)이 존재하는 사유가 되지요. 이러한 들뢰즈가 생각하는 사유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우리가 지난 시간에 함께 보았던 아르토의 경우입니다. 연극 자체의 연출보다 연극배우의 우발성 등이 더 중요한 아르토의 연극은 즉흥적으로 전개되며 언어 자체가 신체성을 가짐으로써, 관객으로하여금 그것이 사건을 만들어내도록 합니다. 이는 정확하게 들뢰즈가 추구하는 사유 속에 사유를 나는 창조이고, 생식성이고요.


부정적인 것으로서의 오류를 다루는 다섯 번째 공준에는 들뢰즈가 생각하는 진리론이 담겨있습니다. 들뢰즈에게 참 거짓은 중요치 않습니다. 오직 의미가 중요할 뿐입니다. 오답에도 충분한 의미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들뢰즈는 오히려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오류, 특히 어리석음에 주목합니다. 사유하고 있지 않음이라는 상태의 어리석음은 들뢰즈가 보기에 의미가 생성되는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자세히 보면, 들뢰즈가 보기에 어리석음은 사유와 개체화를 묶어주는 연계성을 갖습니다. 개체화가 어떤 보편적 사유의 본성(앞서 들뢰즈가 계속 비판했던)과는 다른 어리석음을 담지하기 때문에 정당화됩니다. , 개체화의 과정에서 어리석음은 바탕을 끌고 올라오며, 자아의 정합성을 방해하며, 균열된 채로 방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들뢰즈는 오류는 중요치 않다, 연구할 것은 오직 어리석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섯 번째 정합 지칭의 특권은 대상과 사유의 일치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유 자체를 매우 조화로운 것으로 보았던 칸트 등과 달리, 들뢰즈가 보기에 사유는 매우 폭력적인 것입니다. 아르토의 <잔혹극>과 같이 일치하지 않고 정합되지 않는 기호들이 부딪히고, 폭력이 일어나며, 긴장관계를 헝성하는 폭력의 연쇄반응 속에서 사유는 발생합니다.


 답을 의미하는 해의 양상들을 다루는 일곱 번째 공준에서 역시 들뢰즈는, 어떤 근원적 진리가 자리한다는 시각을 비판합니다. 이러한 시각은 문데들을 환영으로 치부하고, 대답이 마련되면 사라지는 것으로 상정합니다. 그러나 들뢰즈가 보기에 오히려 해가 아닌, -의미, 거짓-의미, -의미 등을 문제들 자체와 관련지어 이해해야 합니다. 이는 문제의 내생적 발생 능력에 주목하고, 미분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 문제들을 어떤 특수한 유형의 명제들, 정리들 자체에 종속시키는 기하학적이거나 대수학적인 방식이 아니라, 본연의 문제가 지니고 있는 내적인 성격을 통해 문제의 진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의 문제라는 것은 사유 안의 미분적 요소이고 참된 것 안의 발생적 요소가 됩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 공준에는 들뢰즈의 배움론이 잘 드러납니다. 들뢰즈에게 인식한다는 것은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앞서 살펴본 들뢰즈의 사유 방식, 기호들의 폭력을 받아들이고, 놀고 도모하고 투쟁하면서 집합적인 개체성을 형성해나가는 것, 이럴 때의 반복이란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고, 이럴 때의 배움은 결국 되는 것, 실천하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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