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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면 도형의 이데아와 규칙을 추상하는 유클리드 기하학만 있는 게 아니라  공간을 가로지르는 선분들의 다기한 변형들로부터 추상된  변형의 기하학이 있습니다. 전자에서는 많은 형상들에 공통된 형식의 완전성이나 초월성이 관심사가 되지만, 후자에서는 변형의 추상을 통해 산출되는 다양성이 관심사가 되겠지요.이는  비단 공간 예술에서만 그러하지는 않을 겁니다.

  • 형상들의 표면에서 일관성을 갖고 그어지는 변형의 선들을 추상해 낼 수 있다면, 시에서도 그런 추상의 선이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 이를테면 표상들을 가로지르며 그어지는 변형의 선들이 있고, 그 변형의 선들은 작품과 작품을 가로지르고, 한 시인의 전 시기를 가로지르며 시인마다의 특이성을 갖는 시적 건축을 주조해 냅니다. 말 그대로 시인들의 수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시인마다 각기 다르게 변형되는 시의 건축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그러한 변형의 기하학을 미학의 한 범주로 다루고자 한다면 시의 회화, 시의 음악, 또는 시의 조각도 가능할 것이며, 그 역으로 건축의 시학, 회화의 시학, 그리고 음악의 시학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 윤동주의 시는 아래 위로 마주 보는 두 수평선 사이에서 요동치다가,  검은 구멍, 또는 점으로 수렴되는  선의 기하학이 있습니다.  그의 시적 음각화는 언제나 거울, 우물 같은 일종의 물성을 동반합니다.  또 이상에게는 평면에   뚫린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거나 질주하는 선들의 기하학이 있죠.  그의 시적 건축물에는 언제나 벌레 먹은 기둥에 나 있는 구멍같이, 복수의 선들이 꿰둟고 지나가는 구멍들이 흩어져 있고,  그것은 어떨 때는 통로이고, 어떨 때는 막다른 골목입니다. 이상도 윤동주 시인처럼 거울을 다루지만, 그럴 때조차 그의 거울에는 어디든 구멍을 내려는 분열의 선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두 기하학의  가장 큰 변별성은 아마도  그 구멍이 다른 하나의 선분을 되비쳐주는 구멍에 머무는지, 아니면 그 선분에 알듯 모를듯한 균열을 내기 시작하는  구멍인지도 모를 것같습니다 .... 이외에도 김광균에게는 시야의 바깥을 향해 던져지는 포물선의 기하학이 있고.... 아 그리고  백석이야 말로  사영 기하학의 고수라고 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서정은 언제나 초라하고 애틋한 삶의 이편을 감싸는데, 그것은  두보나 어머니 또는 여우난 곬족이나 세상 더 없이 맑고 깨끗한 친구의 그림자들이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저 너머의 어딘가로  사라져가는 산개한 선분들의 끝에서, 점근선이 둥글게 그어지는 고정희 시인의 기하학적 구도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런 특성은 초기 작품에서 말기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나타나는데, 유고시집에 실린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에서 특히 명료하게 보입니다.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 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 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 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 상 있는 것들의 자취가 사라져 가는 소멸의 선분들이 제각각 산개해 있고, 그  소멸로 이어지는 선분의 끝을 따라 점근선이 둥글게 이어지면서 비로서 상 없는 상이 드러납니다.  둥근 여백이란, 상이 소멸하고 사라지는 것에서 드러나는 상 없음의 상이라고 해야겠지요. 여기서 둥글다는 것은 어떤 형태적 실체성을 갖지 않는, 다기한 변형의 선들이 생성해내는 형상이라는 점에서 유클리드적인 기하학의 도형들이 가진  초월적인 상징성을 갖는다고 할 수 없겠지요.  다만 읽는 이들의 마음 속에서 각기 다르면서도 일관성을 갖는 감응의  선을 그려낼 뿐이죠..  물론,  그렇더라도 억지로 의미를 끼워 맞추려 한다면 무엇인들 맞추어지지 않겠습니까마는....

  • 제가 본 고정희 시의 작품들에 대한 연구들은  대부분 기독교적 표상들이나 광주 항쟁 등 역사적 사건을 지시하리라 여겨지는 표상들, 그리고 여성의 신체와 삶을 규정하는 표상들의  집합을 엮어 내어서 그녀의 신앙과 신념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더군요.. 그도 아니면 착란적인 시어들의 흐름을 잡아 채서 그녀의 균열된 욕망의 회로를 그려내 보여주든지 말입니다. 어쨌거나 그런 관점에서라면 둥근 여백에서는 신의 충만한 구원도 보이고, 모성도 보이며, 용서와 화해, 그리고 결코 소멸되지 않는 생명력도 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모두가 아니라고 말은 못하겠지요.

  • 그러나. 표상들은 오히려 그 둥근 여백 안에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표상들의 이미지를 추상한 것들로부터 정서와 의미가 생성된다기보다는  각기 상이한 운동과 사건의 궤적들을 잇는  둥근 여백이 있고,  표상들은 오히려 그 속에서 상징적 의미로 추상화되지 않는  감응의 상이한 강도들을 표시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만들어내는 여백과, '시냇물'이 '쟁쟁쟁' 흐러며 만들어내는 여백, 그리고 어머니의 무덤 뒤로 사라지는 노을의 여백과 '막막궁산의 오솔길'로 , 또는 '바다'로,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곳으로 무수하게 사라져가는 것들의 여백은 각기 다른 크기와 강도로 감응의 촉발선을 그려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들은 다시 시를 읽는 독자들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누군가의 '사라짐' 혹은 '부재'와 만나  상이한 감응의 파문을 또한 둥글게  만들어내겠지요......

  • 그러므로 신비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그리고 때로는 따뜻하고 슬펐던 '그'의 이야기들이 갑작스럽게 중단된 자리 마다 무시로 떠오르는 무성한 여백들에는, 웃음기와 습기를 엷게 머금은 '쓸쓸함' 들이, 가난한 이들의 온갖 세간을 휩쓴 채 범람하던 그 제기동 쎄느강물의 낮고 스산한 소리 뒤에서, 종로 5가 깡통집의 그 왁자한 소음을 단번에 제압하는 단 하나의 목소리 뒤에서, 노래방 마이크의 진하디 진한 반향음과 하울링을 뒤에서, 각각 다른 색과 소리와 냄새로...스며오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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