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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의 철학, 연기성의 존재론] 1강 후기

유택 2022.07.14 16:48 조회 수 : 247

2020년 여름 『중론』 강의 이후 2년만의 정화스님 강의라 망설임 없이 신청하였습니다. 오랜만에 뵙는데 건강해 보이셔서 무척 기뻤습니다. 게다가 강의 신청하신 분들이 많아서 역시 정화스님의 강의는 인기 강좌임을 실감하였습니다. 스님 강의 도중 내용 따라가기가 벅차 잠시 집중도가 떨어지면 그대로 길을 잃어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얼굴은 스님을 빤히 주시하며 눈을 부릅뜬채 집중하려고 무척 노력하였으나, 제 마음은 어느새 딴데 가 있어서 스스로 화들짝 놀라기도 여러 번, 졸지 않아 그나마 다행, 몰래 안도하기도 했습니다. 스님의 책들은 전부 다 사 놓았지만 저걸 어느 세월에 다 읽고 음미할 수나 있을런지요. 하... 흰색은 바탕이요 검은색은 글자로다. 고로 불가능!  ^^ 그래서 그냥 조금씩 조금씩 읽어보려고 합니다. 부담없이! 그러나 진지하게! 내일 있을 두번째 강의를 따라가려면 뭐라도 읽어 스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몸’을 만들어 놔야 하기에. 아래는 그 몸부림의 흔적, 마음에 와 닿았던 스님의 글귀를 발췌했습니다. 스님의 새 책 『마음챙김』 발췌문으로 제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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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_2013.jpg

2013년 (인터넷에서 찾음)

마음챙김1.jpeg

마음챙김』 발췌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그냥 좋아하는 연습을 해보는 건 어떠세요. 그러다가 스스로를 탓하지 않을 수 있는 생각길이 만들어지고, 어제가 만든 오늘을 온전히 껴안을 수 있게 되면, 만들어진 자기 밖으로 나가 안쓰러운 자기와도 아픔 없이 만날 수 있지 않겠어요. (4)

 

사진2_2005.jpg

2005년 (인터넷에서 찾음)

 

결핍이란 무엇인가

 

사실 ‘크다’라는 단어의 의미가 ‘작다’라는 것을 상대할 때만 성립된다는 것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알 수 있지만 (18)

 

어차피 변치 않는 실제의 자기는 없습니다. 매일 변하는 자기이며 해석되는 자기입니다. 하여 자기에 대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의 해석조차 실제의 자기가 아닌데, 다른 사람의 판단으로 자기를 평가하는 것은 자신과 멀어지는 지름길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24)

 

과거조차 지금 이 순간에 재구성된 현재의 과거이며 상상하는 미래 또한 현재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26)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의 양상이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펼쳐내고 있는 사건이 되므로, 생각의 양상을 바꾼다는 것은 자신과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사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28)

 

분별된 자기는 발명된 자기이며 상상된 자기 (40)

 

자기극복이란 무엇인가

 

외부의 정보를 수용하는 감각기관을 보더라도 수용할 수 있는 정보의 폭이 가시광선, 가청주파수 등으로 정해져 있고(상향판단), 그렇게 수용된 정보를 해석하는 데 동원되는 기억정보의 개입과정(하향판단)도 이미 갖추어진 생각길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49)

 

본다는 것이 외부를 보는 것이면서 동시에 내부인 자기 마음을 보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세계만이 자신이 만날 수 있는 세계입니다. 해석되지 않은 정보는 없는 것과 같으며 해석되지 않으면 만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의식 발생의 양상이 이렇기 때문에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52)

 

참선으로 지혜를 닦는다는 것은 내재된 판단의 근거, 곧 하향판단의 근거를 바꾸거나 재조정하는 일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불교 용어를 쓰면 업을 바꾸는 일입니다. (69)

 

무아는 ‘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인연 따라 수많은 자아가 탄생되고 해체되면서 삶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70)

 

‘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나의 실상을 이해하려는 질문처럼 보여도, 자칫하면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그것으로 자기를 한계 짓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말도 그렇게 생겨났겠지요. 존재가 있고 그에 따라 언어가 생성됐다기보다는 언어로 표현하려는 의지에 의해 존재가 탄생되기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84)

 

증여란 무엇인가

 

개체로서의 생이지만 개체만으로의 생이 없으니, 나의 막으로 나를 가두는 순간 나도 잃고 세계도 잃고 맙니다. (108)

 

좋은 증여란 자아의 영역을 공감과 공생의 생명활동만큼 확장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 수행을 사유수라고 이름하기도 하는데 이는 연기법이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생각의 지도를 바꾸는 일, 곧 자아를 확장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수행이 된다는 뜻입니다. 지도가 바뀌어야 체화된 사유가 무위로 발현됩니다. (123)

 

정신과 물질은 하나의 두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로서는, 이야기를 할 때 이야기하는 사람의 정신작용이 공기 떨림이라는 물질작용으로 변주되고, 듣는 사람에겐 변주된 물질작용이 다시 정신으로 변주되면서 상호이해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126)

 

재물과 지식을 나누고 함께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삶터를 만들어 가는 것이야 말로 생명의 실상과 상응하는 삶이라는 것이지요. (135)

 

삼법인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제 스스로 그렇게 존재할 수 없다는 무아 이론과 모든 것들은 인연 따라 변해 가는 사건들이라는 무상 이론 그리고 무아의 무상을 통찰함으로써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난 열반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140)

 

머리를 깎는 까닭은 부처님 시대에는 머리카락의 길이와 옷차림이 외형적으로 신분의 높낮이를 구분하는 틀이 됐기 때문입니다. (141)

 

공이라는 말은 자신이 자신일 수 있는 실체가 본질로서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관계망에 따라 자신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154)

 

주관의 세계상이지만 그 세계상 속에는 이웃이 들어와 있고(상입), 들어와 있는 그 이웃이 주관의 세계상 속에서는 온전히 주관의 세계가 된다는 뜻입니다(상즉). (155)

 

왜 생각길을 바꿔야 하는가

 

존재란 무엇인가라고 묻다 보면 인연으로 만들어지고 해체되어 가는 사건은 사라지고 사유된(불교 용어로는 법화된) 존재만이 인지의 대상이 되면서 인연의 흐름과 유리된 이미지의 세계가 펼쳐지게 됩니다. 이는 공인 실상과 이미지인 허상이 자리바꿈을 한 것과 같습니다. (160)

 

몸에서 단백질이라는 분자가 하는 일을 보면 감탄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생물 물질 분자이면서 온전히 지성체가 되어 제 역할을 알면서 하고 있기에 물질이면서 지성이고 지성이면서 물질입니다. (172)

 

‘물질’과 ‘살아 있는 물질’과 ‘정신 물질’ 그리고 ‘정신’이 하나인 듯 하나가 아닌 조건에서 온갖 사건들이 인연에 따라 발생하고 있거든요. (173)

 

용수스님은 ‘공’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더 나아가 공이란 존재의 상태가 아니라 현상하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175)

 

한 일의 결과가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는 일 그 자체가 자신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며, 그것밖에 다른 세계도 없습니다. (179)

 

지혜를 온전히 쓸 수 있는 사람은 원하지 않고서도 자신과 타인에게 이로운 일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181)

 

수행이 깊어졌다는 것은, 이런 뜻에서, 이타적이며 이기적인 마음을 쓰는 기술명장이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183)

 

만남이 번뇌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기대의 항목을 줄이는 일이 먼저여야 합니다. 서로가 상대의 기대에 충족되는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강도가 적으면 적을수록 해탈의 삶을 살 확률이 높아집니다. 원하는 수만큼 번뇌의 숫자도 증가합니다. (187)

 

‘지각된 모든 것들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라는 말이 언어 이미지를 빌려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넘어 지각된 현상 자체를 마음이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196)

 

공부와 글쓰기란 무엇인가

 

불교에서 공부와 글쓰기는 자신과 타인을 온전히 존중하는 마음의 역량을 기르고, 그런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7)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공부는 사유의 유연성을 체화하여 특정 이미지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는 마음을 뜻대로 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210)

 

그러므로 ‘나는 누구(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불변의 주체로서의 ‘나’를 상정하고 그것을 찾는다는 일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하나의 행위양상이 그 순간의 자신을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부처님께서도 “업이 자신이다”라고 말씀하셨겠지요. 업이란 활동하고 있는 동사적 상황으로, 숙련된 동사적 반응양상에 따라 자신의 현재를 규정하는 자기인식의 알고리즘이라고 말할 수 있거든요. (215)

 

지성체가 물질과는 다른 실체로 존재하면서 지성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 물질의 작용 그 자체가 무의식이며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219)

 

선정의식 상태가 됐다는 것은 이전과 다른 세계 해석 체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223)

 

다른 생명체들의 세계상을 공감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감할 수 없는 사건일지라도 그것을 존중하는 생각길을 만드는 일이 생명공동체를 살아가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224)

 

무상하기에 허망한 것이 아니라 집착이 허망을 불러온다는 뜻입니다. (229)

 

늘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사는 것처럼 사는 허망한 오늘,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오늘일까요? (231)

 

생명체로 보면 누구나 성공한 생명체인데, 인정의 폭이 좁다 보니 성공한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인생으로 사는 사람도 많고, 성공의 척도가 쟁취한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의 크기로 정해지다 보니, 불평등이 심화된 사회가 사회적 의지를 그쪽으로 몰고 가는 것과 같아, 결과적으로 번뇌는 커지고 해탈의지는 약해지는 쪽으로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35)

 

마음챙김이 익어진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공능이 신체화된다는 것이니, 마음 다스리기는 몸 다스리기가 되고 환경 다스리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40)

 

그러므로 인식의 주체가 없다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깨달았다는 것은 인식되는 세계상을 만드는 연기적 패턴망이 ‘인식의 주체’도 ‘인식의 대상’도 ‘인식’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아는 지혜가 온전히 체화 됐다는 것을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240)

 

일상이 인연 따라 흐르고 있으니, 평상심은 도가 되고 연기적 삶 그 자체는 물맛과 같습니다. 행복한 맛도 슬픈 맛도 아닙니다. ‘행복을 찾아서 앞으로’라는 구호가 살아가게 하는 동력인 것처럼 보여도 삶은 그늘에서 고요히 쉬면서 공기의 흐름과 함께할 수 있는 담담한 마음으로 ‘색없음’ 입니다. 행복한 마음도 평상심이고 슬픈 마음도 평삼심이니 마음 빛 자체가 도입니다. 특정한 색이 도가 아니라는 뜻에서 ‘색없음’이 도를 관통하는 색이 됩니다. (246)

 

육조 혜능 스님께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지 깃발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이야기도 아는 마음이 사건의 주체인 듯하지만, 아는 마음 또한 수많은 인연에 의해 그렇게 작용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248)

 

세포끼리 주고받는 정보활동이 마음의 활동이면서 그 결과로 해석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의식현상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248)

 

사건은 연기적인데 지각은 이데아적이라는 뜻입니다. (254)

 

삶의 실상이 이러하므로 선에서 말하는 공부는 인연을 해석하되 해석된 이미지에 머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순간순간 나이면서 동시에 다른 나가 되어 가는 춤을 추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265)

 

차이를 긍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그 자체로 아는 것이 아니고 저것과의 차이가 이것으로 알려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267)

 

기대는 불안과 번뇌의 앞모습일 확률이 높습니다. 어떤 사건도 두 찰나를 이어 동일한 모습일 수 없으므로 기대하는 일이 많을수록 번뇌 또한 많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271)

 

생명계의 일원인 이것과 저것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이것이 이것일 수 있는 것은 저것과 맺고 있는 의존관계가 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이것과 저것의 차이는 본질로서의 차이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273)

 

정체성이란 수용된 정보에 대한 패턴의 동일성을 담보할 수 있는 기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인지시스템은 생존에 절대적으로 유리했기에 대를 이어 유전됐다고 할 수 있겠지요. (279)

 

배워야 하지만 배움을 넘어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하면 선의 본령을 잃은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의지조차 잃은 것과 같거든요. (283)

 

빈 마음인 다보여래로 보면 사건 사물마다 다를 것이 없지만 인연 따라 현상하는 모습은 그 모습 그대로 다보여래를 대표하고 있으니 빈 마음조차 실체일 수 없거든요. 빈 마음으로만 보면 무상하다는 말도 성립하기 어렵지만 빈 마음이 빈 마음 상태에만 머물지 않기에 그 또한 무상한 마음이며 인연 따라 채워지는 마음이기에 빔과 채워짐 또한 한 사건의 두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87)

 

“부자 되세요” 이 말은 “부자 되는 것만 생각하세요”라는 말과 같거든요. 부자 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라는 말 같지만 실제로는 ‘부자’라는 허구 말고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게 하는 장치입니다. 더 나아가 존중받아야 마땅한 다양한 차이들이 오직 부자인가 아닌가라는 차이에 의한 차별적 서열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생각길만을 강화하는 일이 되니, 덕담처럼 들리는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갖고 있는 함의는 대다수 사람을 가난으로 내몰 뿐만 아니라 서열에 따른 차별을 개인의 능력차로 받아들이게 만들어 생명활동을 하찮게 여기게 합니다. (290)

 

기억이 만든 집착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 지지 않아도 될 짐을 지고 있으면서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294)

 

학습의 경우는 권위가 있다고 인정될수록 학습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일 확률이 크다고 할 수 있으므로 잘못된 내용일지라도 한 번 자리 잡고 나면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를 집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99)

 

더구나 권위라는 것은 권위가 있다고 하는 사람의 말을 곧바로 이행하는 사람이 있을 때 권위가 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299)

 

몸과 마음이 하나처럼 융섭되어 있어 몸과 마음으로 나눌 수 있는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몸의 힘을 빼고 앉아 움직이지 않는 시간만큼 마음현상이 고요해지기도 합니다. 하여 마음챙김이 잘 안 되는 경우에는 이 방법을 쓰는 것도 괜찮습니다. (306)

 

확률과 우연으로 벌어지고 있는 삶의 흐름에서, 기대한 내일이 오늘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서도 오늘을 평온하게 사는 공능을 체화하는 일이 수행이며 그 결과가 깨달음으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체화된 깨달음이란 생각의 배선도에 공성의 지혜를 쓸 수 있는 배선망이 자리 잡히면서 애써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번뇌와 불만족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하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상태를 이룬 수행자를 법신보살 또는 법신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307)

 

차이들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나’도 하나의 차이로서 관계망에 들어가지만, 실제로는, 들어가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망에서만이 ‘나’가 성립됩니다. 문장의 주어로서 나를 쓰고는 있지만 ‘실제로서의 나’는 서술어에 의해서만 의미가 드러나거든요.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문이 제대로 그 의미를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서술어 없이 존재하는 나를 찾는다는 것은 허공에 그리는 그림만도 못합니다. “나는 아버지다”라는 말이 성립되기 위해서 자녀가 있어야 하듯 문장의 실상은 서술어조차 독립항일 수 없습니다. (322)

 

이것은 저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이것’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322)

 

‘있다’라는 말조차 이것이라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것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이것이 언제 어디서나 이것으로 존재하고 있다가 인연 따라 이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존재의 실상이 이러하므로 유식경(론)에서는 ‘사건 사물에는 스스로 그렇게 존재할 수 있는 본성이 없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23)

 

‘먹는 것이 곧 나다’라는 말이 있듯이 ‘행동이 곧 나다’라는 말도 쓸 수 있는데 (323)

 

사진3_2021.png

2021년 (인터넷에서 찾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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