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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수업을 듣게 된 건 내 전공이 문학이고 오랜만에 문학 수업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은 사실 너무 평범한 것이지만, 아직 더 배울 게 있고(많고) 다시 배울 필요가 있다는 건 소중한 기회였다. 언젠가 어떤 책에서 배움에는 'unlearning'의 방식이 필요하다고 읽은 적이 있다. 이제껏 알고 있던 것을 잊어버림으로써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능력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진경샘의 강의는 문학과 예술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내게 더없이 새로웠고 특이했다.

  나는 이진경 선생님이 쓰신 몇몇 책의 독자이긴 했지만 강의로 뵙는 건 처음이다. 내가 읽은 책에서 선생님은 사회학자이거나 철학자로 소개되었고 나와 다른 분야라는 그 거리가 언제나 좋았던 것 같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일수록, 나와 거리가 멀수록 더 매혹적이고 흥미로웠는지도 모른다. 그런 선생님이 문학과 예술에 대한 강의를 여셨고 첫수업을 듣자마자 이건 좀 반칙(?)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강의는 깊이와 밀도가 있었고 선생님은 너무나 조리있게, 때로는 멋지게 시와 소설들을 읽어내고 계셨던 것이다. 도대체 이 분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특이한 독자 앞에서 전공자를 내세우는 건 무안해지는 일이었다. 전공 수업을 들을 때처럼 매주 읽어야 하는 책들을 (다 읽지 못해도) 챙겨 다녔고, 수업에 참고된 책들까지 보면서 나는 이 특이점 같은 강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2.

  지난 시간의 키워드는 '존재자의 존재'였다. 존재자는 존재와 대상이 만나고 교차하거나 충돌하는 '장소'이다. 때문에 배치나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규정가능성으로 정의될 수 있다. '존재자의 존재'는 규정성 바깥의 미규정성을 지니며 사진에 슬쩍 들어와 잘못 찍힌 타인의 존재처럼 대상화하는 시선의 바깥(짜투리)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대상이라 부를 수 없는 소음이나 잡음, 혹은 없다고 간주되는, 일정한 범주에서 벗어난 것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존재자의 존재'에서 '존재자'마저 지워지고 나면 '존재 자체'가 남는다. 지난 주 수업 자료에서 '존재 자체'는  "그저 '있다'는 사실 자체"로 설명되어 있다. 예를 들어, 바다의 파도라면 개개의 파도를 넘어서면서도 그것들을 포괄하는 '물(바다)', 바람의 개체성이 사라진 대기 자체가 존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진경 선생님은 수많은 물결들의 개체성을 넘어서 바다가 하나이듯 존재의 일의성(단성성)을 설명하셨다. 실체는 오직 하나이며 실체들이 여러가지로 양태화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열과 좋고 나쁨이 없다. 밀려오는 파도가 거세든 약하든 그것이 하나의 바다로 수렴되듯 모든 것은 존재자로서 동등성을 지니며 실체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존재론적 평등성"이란 말은 무척 크게 다가왔다. 그동안 수없이 들어온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든가 '생명은 소중하다'든가 하는 말과 차원이 달랐다. 먼지와 인간은 동등한 위치에 있으며 박테리아나 개미의 관점과 인간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물 복지가 낯설지 않은 세상이 되었지만 박테리아와 개미의 관점이라니. "존재론적 평등성"이 가르쳐주는 것은 우리가 이미 '있는' 것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자신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없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박쥐가 듣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3.

  서사문학은 이 존재자의 존재를 경유하는 사유들을 보여준다. 문학은 우리에게 다른 세계와 삶을 보여주는 것으로, 혹은 '존재 자체'를 더 밀고 나가는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학은 그것이 그려내는 세계의 특이성과 특이점으로 존재의 의미를 보여준다. 그래서 문학은 사건의 발생 이전과 이후가 같을 수 없는, 특이점이 끼어듦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킨다. 마치 아기가 태어나면 그 이전의 삶은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특이적인 인물의 등장은 세계의 특이성을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특이성이 반드시 주인공이나 인물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블룸펠트>(카프카)의 탁구공, <도둑맞은 편지>(포)의 편지, <노트르담 드 파리>(위고)의 성당도 이런 특이점을 만들어낸다. 심지어 중심 서사에 기여하지 않고, 없다 해도 서사가 달라지지 않지만 중요하게 부각되어 등장하는 특이점들도 있다.  

  예를 들어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는 등장부터 심상치 않은 인물 중 하나일 것이다. 히스클리프가 끼어들면서 만들어지는 관계의 갈등과 사랑이란 감정의 복잡성은 이 소설의 묘미일 것이다.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소설의 주제를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으로 말하는 건 너무나 불충분하다. 수업 시간에 또 다른 예로 언급된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오히려 특이점이 약화된 소설로 읽혔다. 이 소설은 소심하고 '아무 것도 아닌 자'의 양심과 용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지만 그 감동이 익숙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었다. 수업에서는 영웅적인 인물의 희생은 오히려 쉬운 일이기 때문에 내향적 인물의 참여는 특이해보일 수 있지만 작품 자체가 지나치게 고전적 비극을 닮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광주사태'가 영화나 문학에서 소비되는 방식의 한 패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악의 평범함에 분노하지만 너무나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선'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그래서 감동한다. 이런 평범하고 내성적인 인물의 희생은 특히 역사적 사건을 다룬 서사에서는 익숙해졌고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해진 것도 사실이다. 문학에서 특이점과 특이성을 말하는 것도 우리가 그만큼 이전에 보지 못한 세계의 출현을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4.

  이 수업에서 이진경 선생님이 철학자 이전에 정말 좋은 독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게다가 그는 운까지 좋아서 화장실에서 읽은 시집에서 존재론을 설명할 수 있는 시를 발견해낸다. 정말 특이한 독자가 아닐 수 없다. 이 수업 덕분에 전과 다르게 작품들을 읽게 되었다. 사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 이후는 새롭게 변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특이점이라고 한다면 나 역시 이전과 조금은 다른 눈으로 읽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시 한편을 같이 올린다. 아마 이진경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신 분들이라면 이 시가 낯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호우

 

                                                                       안희연

 

방 안으로 새가 날아들었다

문이 열려 있지 않은데

여긴 어떻게 들어왔을까

창문을 열고 새를 날려 보낸다

 

방 안에 새가 들어와 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문이 열려 있지 않은데

 

새의 눈을 들여다본다

사람 손을 많이 탄 것 같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

태양이 태양을 삼켜 자멸하고

멈추지 않는 비가 내리고

매일 조금씩 떠내려가는 방 안으로

 

새 한마리가 날아들고

날려 보내도 기어이 되돌아오고

더듬더듬 그 새를 살피고

이름이 필요해졌다는 이야기

 

이름이라니,

우리는 정말 멀리 와버린 것이다

 

닫힌 문 안으로 쉴 새 없이 비가 들이치고

목은 자꾸 휘어지려고만 하고

언젠가

이 새가 나를 포기하는 순간이 올까봐

 

가망이라는 말을 뒤돌아본다

비가 와도 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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