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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얽힌 역사] 3강 후기

재연 2022.02.09 14:43 조회 수 : 23

 

 

 

난 어려서부터 생물을 좋아했다! 그러나 학문으로서 생물은 낯설다. 학창시절에도 사회보다는 과학이 더 재밌고 흥미로웠다. 전문성을 담보로 한 수많은 과학자들의 수고로 짜여진 체계를 엿보는 것은 큰 재미였다. 그러나 그 체계가 복잡해지며 갈수록 높은 이해도를 요구할 때마다 좌절했던 경험도 있다. 좌절경험이 쌓이자 과학 자체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 경험들 때문이었을까? 성인이 되고 나서는 과학은 잠시 곁에 두고 사회시스템이나 문화에 대해 더 파보았다. 이 분야도 마찬가지로 내용의 방대함과 역사성에 한껏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동안 공부한 것을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구나. 또 한 번 느낀다.

기세가 꺾인 나는 요즘 다시 과학에게 손 내밀고 싶어졌다. 회피일까? 학문의 연장일까? 어찌됐든 그동안 의심했던 것들에 대한 확인이 필요했던 것일테다. 그래서 전방욱 선생님의 강의가 더욱 반갑고 감사했다. 이번 강의는 그동안 과학권력이 생물체를 구성해 낸 정의들로 인해 놓치는 부분들을 조명했다. 인상 깊었던 지점 몇가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먼저 ‘통생명체’라는 개념을 언급하고 싶다. 통생명체란 전체를 의미하는 holo(whole)와 생물 혹은 생명을 의미하는 bio를 합성한 말한다. 이 ‘통’에서는 세 가지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하나는 나와 내 몸 미생물 전체를 ‘통’으로 보자는 것이고, 또 하나는 통생명체 안에서 나와 내 몸 속 미생물은 서로 소통한다는 의미이며, 마지막으로는 통생명체 전체가 늘 외부 환경과 통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생명체란 무엇인지, 유기체를 가르는 기준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유기체가 실체인지 아니면 과정인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더 나아가 실체라는 개념과 유기체라는 개념 모두가 수천 년에 걸쳐 누적된 복잡성과 모호성 아래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과학이란 검증된 것, 정해진 답이라는 것에 여전히 익숙한 나에게 이러한 질문들은 낯설면서도 흥분하게 한다. 

개체를 진화의 단위로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특정 집단 내에서 유전 가능한 적응도 변이가 분할되는 방식은 집단의 발달 프로그램, 돌연변이율 및 집단 구조에 따라 다르다(예: 콜로니성 볼복스 목 조류). 개체성의 정도는 특정한 생태적 및 집단적 상황에 달려 있다. 여기에 시간이라는 변수가 등장하면 각 수준에서 발견되는 유전 가능한 적응도 변이의 속도도 달라진다. 즉 진화론 관점을 이야기할 때, 흔히 장기적인 진화적 변화를 먼저 떠올리지만 단기적인 집단구조의 변화를 통해서도 변화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통생명체 개념이 내포하는 의미와 개체를 진화의 단위로 논의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모두 기준적이기 보다 과정적이며 연속적이다. 개체라고 할때 완성된 개체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 정도의 개체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중간(과정)을 이해한다는 것은 새롭고 더 높은 수준에서 개체성의 출현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득, 친구들과 역사를 왜 공부해야 하냐는 주제로 토론한 때가 떠오른다. 그 당시에 주어진 조건들로 일어난 일들의 나열이 도대체 현대 사회에 무슨 시사점을 주냐는 친구의 질문이 경악스러우면서도 이해가 갔다. 나 역시 역사를 기계적으로 공부했던 것 같았고 역사를 의심하는 친구에게서 과거의 내가 보였다. 과학 또는 전공하는 학문에 대해 비슷한 의구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학문의 복잡성과 방대함 때문은 아니였다.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과학이나 사회 분야에서 심도있는 담론들을 만날때마다 나는 답을 내리는 방식을 고수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곧 하나의 답을 선택하면 다른 조건을 갖춘 질문들에 대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던가, 다른 결의 답을 택하자니 그동안 답이라 여긴 이론이나 신념과 결별해야 하는 상황이 마음이 아픈 것을 경험해야 했다. 이도 저도 되지 않자 멘붕상태가 되었고 학문 그 자체에 대해 경계하게 됐다.

내가 가진 지식들은 아주 작은 것들이었고 그 마저도 흩날리고 있다. 게다가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판단이 모호해질 수 있다는 것을 마주하니 진이 빠진다.  ‘뭘 어찌 살라는 건지’하며 푸념이나 늘어난다. 그동안의 낡은 공부법을 버려야할 때가 온 것임을 인지하면서도 나의 작은 습관 하나도 바꾸기란 쉽지 않다. 얽혀있는 지식들을 풀어가는 작은 질문들을 만들어가야지. 마음 먹으면서도 덜컥 겁이 나는 것은 사실이다.

나와 내 친구의 학문에 대한 의구심이 떠오른 것은 아마 이와 같은 의구심이 현대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인 것 같다. 우리는 기후변화, 노후화된 원전 등이 우리의 삶과 직결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하나의 이야기로 소비하거나 개인 또는 집단의 이득을 위해 자본의 원리를 빌어 상품화한다.

최근 개봉한 영화 ‘돈룩업’에서 이러한 현상을 시원하게 풍자했다. 과학 또는 보편적 진실을 대하는 현대인들이 낯설지가 않다. 이러한 사회 현상을 탈진실현상이라고 한다. 보편적 진실을 중점에 두어 사회와 관계맺기 보다는 개인의 감정과 믿음을 우선시 하는 것을 일컫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소름끼친 기분이 든 것은 나 역시 상대주의적 과학관을 지지하기도 했던 것, 또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런 태도를 보이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디어를 통해 다양한 정보들이 쏟아지면서 어떤 것이 진실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시대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만큼 모든 사람이 다같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들이 줄어드는 것 또한 공포인 요즘이다. 분자적으로 들여다 보는 중요성과 마찬가지로 재구성하고 종합하는 사고력을 함께 길러야겠다. 과학적 사실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 혹은 이와 관련된 기술이 중요해지는 점, 또는 현대철학이나 종교가 다시금 과학요소들과 더욱 밀접하게 결합하는 것들이 우연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역시 생명 역사의 얽힘 중 하나겠지..

두서없이 써내려갔다. 끝으로 전방욱 선생님의 강의록 중 한 문단으로 마무리 하겠다.

 

 

 

“반면에 실체(substance)는 일반적으로 명확한 경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사물의 경계가 모호할 수 있다. 제조사 라벨은 코트의 일부일까? 욕실 설비는 집의 일부일까? 그러나 이것들은 물체에 대한 명확하고 사회적으로 동의된 정의의 부족을 반영한다. 과정이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지속적으로 의존하는 경우 경계는 필연적으로 흐려진다. 음식 한 조각이 언제 내 일부가 될까? 고체, 액체 및 기체의 물질이 내 몸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은 우연한 내 삶의 일부가 아니라 나와 환경 사의 경계가 모호하고 변하기 쉬운 특성을 명확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

- 전방욱 선생님 3강 강의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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