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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정치철학과 신학: 바울의 재발견

 

"오늘날 정치철학의 담론에서 신학이 끼어들 여지가 있을까?"

제가 손기태 선생님의 강좌를 듣고 싶었던 수천만 개의 이유들 중 하나입니다.

 

좋은 사람들과 (되도록이면 커다란)술잔을 기울이며 힘차게 일주일을 시작하는 에너지를 충전시키기에 딱 좋은 월요일 저녁.

술 대신 강좌를 선택한 저 말고도 많은 분들이 수유너머N의 대강당(이라고 하기에는 2%이상 부족한...)에 모였더랬습니다.

바울과 바오로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모르고 오셨다는 분.  그래도 이제껏 살아오시면서 딱히 커다란 불편함은 없었다고 하시네요... ㅎㅎㅎ

수유너머에서 활동 중인 친구와의 좋은 술자리에서 강좌에 대한 권유를 받으셨다는 분. (역시 술은 영혼과 영혼을 이어주는 전깃줄인가 봅니다.  찌리릭....)

바울과 관련된 바디우, 아감벤 등등 현대 정치철학 참고 서적들을 섭렵하고 오신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각양각색의 이유를 가지고 모여든 낯선 얼굴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바울과 만나고 싶어하는 현대인들의 '설레임' 이 느껴졌습니다.

 

사실 바울은 정치철학에서도 기독교에서도 쭈욱...'밉상'으로 간주되어 왔다고 합니다.

바울의 신학이 로마제국의 종교로 수용되면서 초기 기독교의 사회변혁적인 측면이 제거되어버리고

개인의 영혼과 내면의 구원만을 위한 현실도피적인 종교로 전락되었으며,

그에 따라 예수의 혁명성도 퇴색되었다는 것이 바울에 대한 각계각층의 두루두루 일반적인 부정적 평가입니다.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에서 예수가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싸우는 혁명가로 평가받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평가이지요... 

 

정치와 신학.  둘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까요?

1990년을 전후로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면서 마르크스 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근대적 사유와의 대결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하이데거와 발터 벤야민은 새로운 방식의 유물론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마르크스주의 정치철학과 신학이 만나 탄생할 수 있었던 기존의 해방신학과 민중신학도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지요.

 

시간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서구 근대 계몽주의 이후로 그 전에 종교가 맡던 영역을 과학이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한 마디에 인간의 정신은 '의심'을 통해서 신의 유무와 관계없이 철학의 제1원리가 될 수 있었구요~

'신은 인간의 모습이 투사된 것'이라며 대놓고 쓴소리를 했던 포이에르 바흐와 같은 근대 비판가들에게도 종교는 극복의 대상이었지만, 

마르크스는 종교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의 화살을 종교의 배후에 있는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돌려놓습니다.

그가 보기에 판받아 마땅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에밖에 의존할 수 없도록 만드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빚어낸 사회라는 것이지요.

 

니체는 기독교가 강자들에게 패배해 온 약자(=노예)들의 복수심리로 빚어진 '자신들만이 선하고 정의로운 존재'라는 공식'을 통해서

예수의 정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노예들의 종교가 되어버렸다는 비판과 함께 그 주범으로 바울을 딱 꼬집어 현상수배합니다. 

예수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정신'이라며 훈훈한 말을 건네면서도, 

니체는 유독 바울에게는 침 튀겨가며 @^&*#^&*$@#$%&^..... 라고 혹독한 비판의 봇물을 쏟아붓습니다. (『도덕의 계보』와『안티크리스트』참고하셔요~)

 

프로이트는 기독교가 인간의 무의식(죄책감)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며 종교란 이러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의례를 지속하는 일종의 신경증이라고 했지요.

요즘 이철교에서 사랑(?!)과 원망을 한몸에 듬뿍 받고 있는 하이데거는 서구의 형이상학을 존재-신론이라고 부르는데요...

서구 형이상학에서는 최고 존재/최고 근거로서 언제나 신(神) 개념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는 존재 자체를 사유할 수 없었던 존재자 중심의 서구 형이상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이것을 근저에서부터 해체하려고 했고,

이로써 신학으로부터 서구의 형이상학이 완전히 분리되어 새로운 존재론이 마련되었다고 하네요.

 

흠....

난다긴다 하는 서구의 철학자들이 펼쳐낸 뜨거운 김이 폴폴 나는 설렁탕같은 사유세계에서도 

기독교와 신학은 철학의 느끼함을 가시게 해주는 깍두기처럼 줄곧 딸려 등장하는군요. 

그렇다면 오늘날의 정치철학이 신학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근대 이후 서구 철학은 유물론과 관념론을 나누고 존재와 의식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몸부림들로 가득합니다.

스피노자, 라이프니치, 헤겔, 하이데거 등등이 그 몸부림의 주역들이겠지요.

 

강좌 시작과 함께 이런저런 철학자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바람에 수강생들의 머리에서 스팀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할 무렵...

손기태 선생님께서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태연한 얼굴로 우리들에게 황당하고 생뚱맞은 질문을 하셨더랬어요. 

"만약 기독교 신학이 스스로를 무신론이라고 부른다면 어떨까요오오오오?"

아 놔....어으 이게 뭔소리?

이 질문은 중세의 대표적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저서『신국론』(Die Civitate Dei)에서

"오직 무신론자만이 올바른 기독교인일 수 있다. 오로지 기독교인만이 올바른 무신론자일 수 있다"고 언급했던 사실과 연관이 있다는데...

이런 사유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로마제국으로 고고씽 추체험을 하러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지요.

 

로마제국 통치기에 신은 일정한 '형상'을 가진 존재였고 로마 황제는 신의 대리자로서 세상을 통치하는 '신의 아들'이었다고 하네요.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당시의 통념을 거부했는데, 신은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지들 맘대로 고안해놓은 존재일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 였어요.

인간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은 그저 우상에 불과하다는 얘기겠지요? (그럼 지금의 대한민국은 우상숭배가 만연한 것이네요??? ㅎㅎ)

신은 어떠한 형태도 지니고 있지 않아야 한다는 기독교인들의 생각은 당시 로마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당혹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형태도 없는 존재를 어떻게 숭배해???  쟤네들 진짜 또*이 아냐?"

대부분의 로마인들이 이런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죠. ^ ^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이러한 배경에서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무신론자가 되어야한다고 말한 것이고요.  

 

강의 중반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무신론'을 계승한 20세기 철학자로 칼 바르트가 언급되었는데요...(이제 겨우 중반...@ @ 이 후기는 언제 다 쓰려나...ㅠ ㅠ )

칼 바르트는 파시즘과의 결별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적인 시도의 무상함을 강조하려했던 배경이 있어요. 노동운동에서 노동자들의 배신, 사회주의에 대한 실망 등등...

그는 당시의 신학이 근대적 세계관에 맞추어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내용으로 채워져있었고, 인간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신이 행동해주기를 바랐으며,

자신들의 욕구를 신의 의지로 둔갑시키면서 이를 정당화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인간중심적인 발상이야말로 신학을 변질시킨 주범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고요.

신의 존재는 절대 타자다. 신은 그 어떤 인간적인 상상과도 무관하다. 절대 타자인 신과의 만남은 모든 인간중심적 시도가 붕괴되는 사건으로 경험된다는 것이지요!!! 

인간적 욕구를 투사시켜 만들어낸 신으로부터 벗어난 종교. 

그러한 종교가 가능한 것인지 물어야 할 때가 왔다고 손기태 선생님은 힘주어 말씀하셨고, 

이런 물음을 통해서 정치와 신학이 새로운 국면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하셨지요.

 

뭔가 이해가 될 듯 말 듯한 이 시점에서 또다시 등장해버린  머릿속 복잡한 사나이 하이데거. (저에게 하이데거는 정이 안가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예요...)

어지간하면 진짜 화아악 빼버리고 싶지만... 바울을 언급할 때 하이데거는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ㅠ ㅠ

서구 형이상학적 틀에서 존재자의 존재를 규정하는 시도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경험되는 삶 자체를 사유하고자 했던 하이데거의 시도는 바울에게로 이어집니다.

바울에게는 종교라는 것이 교리도 형이상학도 아닌, 삶의 경험 그 자체라는 것이지요.

신약성서에서 바울의 텍스트는 현사실성의 삶을 드러내는 자료로 활용됩니다.

 ('현사실성'에 대해서는 이철교에 참여하시는ㅈㅎㄱ님께서『존재와 시간』의 해당 페이지를 뒤져 설명해 주셨는데 듣고 있던 저는 거의 뇌수가 흘러나왔다는...ㅠ ㅠ)

바울이 살아내려고 했던 현사실적인 삶에서 그가 이해했던 '시간'은 근대의 직선적 시간관과는 달리 일정한 방향이 없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에 등장하는 '도적같이' 찾아오는 미래는 항구적인 안정성을 보장받는 것이 아니어서, 

각자는 매 순간마다 '자기중심적인 자기'  를 내려놓도록 결단을 촉구받습니다.

하이데거는 바울의 사유를 통해 근대를 넘어서려했고 근대에 갇히지 않은 목소리를 찾아내려고 했던 것이지요.

 

여기에서 또 한사람.  수유너머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발터 벤야민이 신학강좌에 놀러옵니다.

그는 성서에 담긴 메시야적 전통에 대해 강조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신학을 적극 끌어들일 것을 요구했는데요...

벤야민 씨는 왜 신학을 끌어들였을까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역사철학테제)』에서 벤야민이 장기를 두는 자동기계의 사례를 드는 내용은 홈페이지 강좌 소개에도 자세히 나와 있었지요?

그 부분 참고하시고...

어쨌든 그 장기판에서는 '역사적 유물론'으로 불리는 인형이 늘 이기도록 되어있는데요...

벤야민 왈, 이 인형이 오늘날 왜소하고 흉측해졌으며 어차피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되는 꼽추 난쟁이 신학을 자기편으로 고용한다면 어떤 상대와도 겨뤄볼 만 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발화(發話)의 시대적 배경은 노동계급이 나치에게 열광한  '파시즘의 시대' , 배신당한 시대 속에서

역사유물론의 나아갈 길을 고민했던 벤야민의 모습을 떠올리시면 될 듯 합니다.

 

벤야민은 종교안에 내포된 메시아적인 힘에 대해서 강조했는데요...

메시아론? 아~~~~진부해라.... 하실지도 모르지만

기존의 1960년대 남미의 해방신학이나 1970년대 한국의 민중신학에서도 메시아에 관한 논의를 쭈욱 해왔었잖아요?

그들은 예수의 혁명적 실천에서  메시아와 관련한 논의를 이끌어내었지만

벤야민은 바울의 텍스트로부터 메시아주의에 대한 매우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독해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가 언급하는 메시아적인 힘과 메시아적인 시간은 기존의 유물론이  지닌 근대적 사유를 뛰어넘을 때 이해되고 수용되는 것이며

이에 대해 적절하게 논의될 수 있는 철학적 흐름이 '부정신학'이라고 합니다.

( '부정신학' 이 궁금하신 분들은 올해 상반기 인사원에서 손기태 선생님과 함께 공부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  ^  대놓고 하는 광고입니다.ㅎㅎ  )

 

기존의 유물론이 듣지 못했던 혹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목소리를 듣고자 할 때,

종교도 마찬가지로 그동안 간과해 왔던 바울의 메시아주의라는 자신의 새로운 전통과 만나려 할 때,

벤야민이 말했던 그 어떤 적수와도 상대할 수 있는 기계, 새로운 정치철학이 탄생할 지도 모를 일이지요.

이 시점에서 손기태 선생님께서는 코뮨주의에서 귀기울여야하는 요소들, 즉 더 나은 삶을 향한 꿈에 대해서도 부가적으로 언급하셨는데요...

이 내용과 관련해서는 『희망의 원리』,『저항과 반역의 기독교』등등 에른스트 블로흐의 책들을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마지막으로.... 왜 디아스포라의 신학인가?

궁금하시겠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강좌에 이어서 후기를 올리려고 합니다.  핑계를 대자면 쓰다보니 식은 땀이 나서요. (후들후들...)

길고긴 강좌 후기는 여기까지고요...  못다한 이야기는 다음 강좌때 계속됩니다.

바울과의 만남이 우리에게 던져줄 고민들이 몹시 기대되는 밤입니다. (앗! 다 쓰고 나니 아침이라는... )

그럼 다음 강좌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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