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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인터뷰 글을 너무 늦게 보기도 했지만 영업성 광고글이라 신청 끝나고 강의 시작할 때까지 오래 참고 고민하다 적기 시작한 글입니다. 이제 강의도 중반을 향하는 데다 이제 이 인터뷰는 보실 분들은 웬만큼 다 보셨다고 판단해 일단 서두만 그냥 끄적거려 놓은 것이었는데 빨리도 읽고 반응해 주셨네요.
곧 체계적인 실명 비판을 다 게재하던가 일정 상 여건이 허락치 않으면 전체 삭제토록 하겠습니다.
다만 본 인터뷰는 몇가지 심각하고 치명적인 문제점들을 안고 있어 공론화의 필요성이 충분히 있고, 그러나 강사님의 대중공론장에서의 태도 등등 그간 참을 만큼 참아오기는 했음에도 우애가 훼손되는 강을 건너지 않고 접근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기에 고민이 깊습니다.




이후 삭제하더라도 이 글을 시작하게 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직접적 동기이자 반드시 전달되어야만 하는 최대 논점 한 가지만 간단히 언급드리면,
원래 모든 사상, 이론, 해석, 비판 등의 관념 생산은 자유이지만 그것이 진실로서 검증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절차들이 반드시 수반되어야만 하는데 그 중 가장 강력한 검증 수단의 하나는 바로 그 관념의 열매로서의 ’실천’입니다.
그런데 강사님의 자의적인 Marx 이해가 귀착하는 실천은 ’알량하고 비루한 혁명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말연시의 축제분위기와 혹한 속에서도 굳건히 광장을 지켜주고 계시는 여러 선생님들과 묵묵히 평생의 투쟁을 이어오신 견결한 Marx주의자들 등등 그 모든 분들 뵙기에 ’사이비좌파 궤변론자 학원’이 되어가는 것 같은 모습의 수유너머는 너무나도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현 시국과만 관련해서도 사태의 핵심은
   "이구동성으로 탄핵가결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또 차이는 그것을 '무엇의' 시작이라고 보는가에 있다. 당신은 이제 무엇을 시작하려고 하는가?"(조정환)인데 수유너머 사람들은 "야호! 이제 부담스런 투쟁은 모두 끝! 개인적인 일상의 시작!"이라 말하며, 현 정국을 그들의 공허한 혁명과는 거리가 먼 개량 국면으로 몰아가는 근원이 바로 이런 자기자신들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진정한 Marx주의자는 개량투쟁에서도 그 최선봉에 서서 가장 열렬히 투쟁함으로서 그 투쟁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혁명으로 이끌어가는 자이고, 심지어 대중들의 잘못된 투쟁에 대하여까지도 그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는 모든 비판을 가하다가도 일단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면 최선을 다해 같이 싸워줌으로써 희생을 최소화하는 자이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세계에 대해 그렇게나 흐물거리는 액체-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왜 중노년의 (법대)교수님들조차 최소한 새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이재용 구속영장을 기각한 법원 앞에서의 구속촉구집회 등 성실한 투쟁들을 이어 나가고 계시는 이 마당에
  "우리는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키는 것만으로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죠. 또 자본주의를 붕괴시킨다고 해서 그것이 곧 우리가 희망하는 세상을 열어주지는 않습니다." 같은 소리나 하면서 그래봤자 바뀌는 건 없다고 짐짓 혁명주의자를 가장하며 자신의 나태와 안일과 이기주의를 정당화하는 변명이나 늘어놓고 있는 겁니까?





[[    추  기    ]]
2.
(그리고 도대체 L’Anti-OEdipe는 읽은 건지, Deleuzian은 맞는지도 의심될 정도로 기계론과 기계주의도 구별 못하고, 기계혐오적이신 듯한데 한가지만 첨언하면 너무 죄송하게도 Deleuze-Guattari에 따르면 액체 또한 기계입니다.)



3. 
이 뿐 아니라 강사님은 "경제의 위기는 자본과 노동 사이에 그어지지 않고 이주민과 소수자들을 향해 더 많은 분할과 차별의 선을 긋고 있습니다."라 말하고 있는데 정확히 바로 이 때문에 Marxism의 종차적 특이성이 (특히 현 시기에) 더욱더 강조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체계는 근본적 모순을 은폐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선을 분절시키고 전치시켜 나가면서 모든 차이를 적대적 관계로 전화시키는데, 이런 상황에선 이주민의 적은 선주민 내국인일 뿐이고, 소수자의 적은 다수자일 뿐이며, 여성의 적은 남성이고, 나의 적은 언제나 너와 너희들일 뿐입니다. 
이들은 각각 자신이 처한 이 분절된 전선들 속에서 그 부분적 정체성들에 기반한 국지적 해방이론들을 발달시키게 되는데 이렇게 도달한 주체화의 결과는 역사 상 한번도 실재한 적 없었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의 현실화일 뿐이기 때문에 적대적 근본 모순의 해결 없는 Heterotopia란 한낱 환상에 불과하며 이 때 실제로 도래하는 것은 언제까지나 Heterodystopia와 Heterohell 뿐입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국지이론들의 대부분은 그 궁극적 목표조차 단지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바로잡는 평등’만을 추구하게 되기 쉬우므로, 이 평평한 운동장에서 만인간 투쟁은 그야말로 본격화, 일상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 근본적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지이론들의 지평을 초월한 접합의 일반이론이 필요하게 되고, 이 접합 이론은 적대의 근원에 대한 해법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



4. 세계사상사의 최근 경향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한 ’낡음’과 ’새로움’의 식민지적 감각이상과 시대착오

세계사적 시대전환과 현대철학 전체의 반성 국면에서 제기되는 ’유물론적 전회/전향(;Materialist Turns)’*의 의미와 ’누빔점’의 중요성


이러한 혼란 속에서 지금 여기 우리의 당면 문제와 근본 문제에 대한 집중력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며, 사건과 진리에 대한 충실성 또한 ’새로움’만큼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흐물거리는 액체-근대에 왜 그 유명한 "신세대, X세대들의 88만원세대로의 회귀"와 같은 현상들이 계속 일어날 수 밖에 없는지 도저히 알 수 없게 될 것이며, 이와 유사한 ’새로운’ 현상들에 매번 과잉흥분해서 부화뇌동하던 전철을 계속 다시 밟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실재계의 폭력/난입’이란 기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특별한 ’순간’의 Trauma적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드넓은 우주를 향해 자유롭게 직선으로 날아가고자 하는 이런 무수한 탈주의 노력들을 끊임없이 강제소환해 영원회귀시키는 만성적이고 항상적인 Sisyphos 중력(장)으로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중력에 대하여 액체는 가장 순응적이고 굴종적입니다. 그러니 초등학생처럼 고체는 나쁜 것이고 액체는 좋은 것이라 말하기도 생각만큼 간단한 건 전혀 아닙니다.)



(5. 또한 정치  경제에 대한 최근의 강조도 오해하시는 것처럼 그 요지가 (단순한 복고로서의) ’문화예술보다 중요한 정치 경제’, 또는 ’문화예술을 결정하는 정치 경제’라기보다 (또는 최대한 신중히 말해서, 적어도 그런 흐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무관하게 고립된 개별자들로 바라보면서 분리주의적으로 매몰돼 온 그간의 현대사조들에 대한 역시 처절한 반성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접합이론적) 전회/전향의 하나로서의 Jessop과 강내희선생님 등의 CPE;문화정치경제학 같은 흐름들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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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전회/전향은 사상 및 철학사에 획을 긋는 거대한 물결로서 비단 Marx주의적 유물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어서 소위 ’speculative (materialist) turn’이라 불리는 철학운동을 포함하는 ’new materialisms’를 또다른 축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크게 보면 신체화된(embodied) 유물/실재론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연장으로서의 affective turn도 이 물결에 포함되는 하위 운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유물론들은 본질적으로 (사변적 개인/개체주의 분리이론의 ) Feuerbach적 유물론에 해당하기 때문에 발달과 논쟁들이 진행될수록 (실천적 사회(역사) 유물론의 접합이론을 포함/기반하는) Marx주의(적/계열) 유물론이 주도권을 확립해나가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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