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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1일(화)

 
설 연휴를 앞둔 2월 첫날, 고향 나들이만큼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작년에 출판사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인 연희동으로 이사를 와서 기뻤던 수유너머N이 그 이상으로 반갑고 고마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 한다. 아니 그들의 새로운 시도를 흔해 빠진 ‘프로젝트’라는 말로 대신할 수는 없다. 최소한 ‘운동’이라 해야 맞다. 이 운동의 이름은 ‘불온한 인문학’이다. 거두절미하고 수유너머N이 최근 발표한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으로 설 인사를 대신한다. 부디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우리 삶의 현장에서 새롭게 만나 인문학의 부흥이 아닌, 인간적 삶의 부흥의 씨앗들이 싹트길 기대한다.

  이 선언을 읽고 나처럼 반가운 마음으로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은 수유너머N 홈페이지(http://www.nomadist.org)를 방문하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2011년 노마드적 대중지성 ‘불온한 인문학’ 1기생도 모집한다. 맑스의 <자본> 입문,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세미나와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도 열린다. 20011년 다시, 아니 새롭게, 불온한 학습과 토론 그리고 실천들을 시작해보자.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
 
바야흐로 ‘인문학의 부흥 시대’가 왔다! 고고한 상아탑에 파묻혔던 대학이 대중 계몽의 현장을 자처하는 한편으로 인문학 최고위 과정을 신설해 CEO들을 입학시키려 혈안이 되어 있다. 또한 은행과 백화점, 문화 센터와 각종 공공 기관이 앞다투어 고전 강좌를 개설하면서 지식과 교양에 목마른 대중에게 유혹의 손짓을 보낸다. 국가는 ‘인문 한국’이라는 거창한 부흥 프로젝트를 내세우며 연간 400억 원에 달하는 재정을 투입함으로써 위기를 외쳐대던 이들에게 자본의 ‘생명수’를 부어주고 있다. 박사 실업자를 면치 못하던 수많은 시간 강사들, 대학원생들은 열심히 연구 계획서와 보고서를 작성하고 실적을 증명해줄 논문들을 마구 찍어낸다. 여기 인문학이 부활했다! 고독하게 고사(枯死)하는 꼬장꼬장한 학자가 아니라 프로젝트의 수주에 목숨을 건 유능한 매니저가 오늘날 인문학 연구자의 이상이 되었다! 마이더스의 손을 가진 국가라는 막강한 파트너도 얻었다! 인문학이 새로운 국학, 21세기 국풍(國風)의 기치 아래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한때 인문학의 위기가 운위되고 그 사멸의 징조가 우려스럽게 진단되던 시절이 있었다. 취업 전문 학원으로 전락한 대학에서 인문학이 힘겹게 투병하며 죽어가던 때가 있었다. 아카데미의 수장들이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국가와 기업, 사회의 도움을 애타게 호소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언제 그랬느냐 싶게 인문학은 화려한 재탄생을 노래하고, 도처에서 부활의 종소리를 울려댄다. 상품 광고의 아이디어 속에서 인문학은 ‘돈이 된다’는 찬사를 얻고, 텔레비전에 출연한 신(新)지식인들은 인문학이 이제 지식 시장에서 유통되는 최신의 상품임을 자랑한다.

  하지만 바로 이때, 우리는 ‘인문학의 부흥’이라는 시대 현상이야말로 역으로 인문학이 빠져든 위기와 몰락의 징후임을 냉정히 직시한다. 국가와 자본의 넘치는 관심과 후원은 인문학 재생의 밑거름이 아니라, 인문학의 좀비화를 부추기는 바닥없는 진창에 다름 아니다. 국가와 자본의 월급쟁이가 되자마자 인문학은 권력과 돈에 눈멀고 귀막고 입을 봉한 산송장이 되어 버렸다. 오늘날 인문학의 부흥이란 무엇인가? 이윤 창출을 위한 자본 축적 전략과 지배의 효율화를 위한 국가 통치 전략의 소프트 버전, 바로 그것이 아닌가?

  인문학을 논하기 전에 먼저 지금-여기의 삶을 돌아보라. 대학생들이 졸업과 동시에 신용 불량자가 되고, 청소 노동자들이 화장실에서 밥을 먹어야 하며, 개발 이익에 눈먼 국가와 자본의 폭력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공권력"이라는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소시민의 일상은 "글로벌 리더십"과 "글로벌 스탠다드"를 이룩하기 위해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렇게 파괴된 삶의 터전에서 태연하게 ‘인간’과 "문화"를 떠드는 인문학이 도대체 어떤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상황은 명확히 문제적이다. 작금의 지배 질서와 가치 체계에 대한 비판과 문제 제기를 그만 둔 인문학은 기껏해야 교양 있는 시민의 육성을 필생의 소명인 듯 껴안고 있다. 정보 산업 사회의 유능한 인재들을 키우기 위해 인문학적 창의성이 투입되고, 각박한 경쟁 사회에서 인간적 여유를 찾아주기 위해 인문학적 교양을 제공하며, 부랑인과 노숙자 같은 사회 부적응자들을 정상적인 시민으로 되돌리기 위해 인문학적 지식이 동원되고 있다. 사회적 유용성과 적응성의 배양, 혹은 순응하는 시민의 양성이야말로 진정 인문학의 사명인가? 인문학이 감옥이나 병원에서 수인과 환자들을 "정상인"으로 교육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어느 철학자의 통찰이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오히려 인문학은 그 탄생의 목적과 소명을 지금 충실히 이행하는 중이라고 말해야 옳을 성싶다.

  다른 한편에는 인문학의 ‘실용주의적 유행’에 반대하며 인문학적 본질이 현실을 넘어선 것, 지고한 정신적 가치에 있노라고 강조하는 인문주의자들도 있다. 그들은 인문학이 실용적 효용이나 실리적 이득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세계의 원리를 궁구하여 인격을 완성하는 지고한 삶의 안내자라고 주장한다. 오래된 안내자로서 ‘고전’이 강조된 이유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오랜 지혜가 담긴 책, 고전을 지키고 재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존재 이유라는 게 이상주의적 인문주의자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모든 견고했던 것들도 대기 중에 녹아 없어지는 이 세계에서 어떤 고전이 감히 영원을 구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의고주의적 인문학이 보여주는 몰역사성과 탈사회성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격조있는 생활의 품격을 누리기 위해 고전을 읽는다는 CEO들의 진심도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그들이 사원들에게 고전을 ‘읽으라’고 내미는 순간, 고전은 그것이 등장했던 역사와 사회의 맥락을 벗어나 지금-여기서 강제와 폭력, 순응과 체념의 도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 공부를 순수한 인성의 도야란 차원에서 기대하지 않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고전에 대한 맹목적 숭앙은 국가와 자본에 대한 물신주의적 숭배와 멀리 있지 않다. 고전을 불멸의 정전으로 만들고 현재적 삶의 척도로 삼을 때, 지식과 권력, 자본의 삼자연대가 승리하는 날을 보게 될 것이다.

  자본과 국가의 이해에 편승한 덕분에 호의호식하는 순응주의자의 인문학. 대중적 삶의 지평에서 유리되어 고전에만 칩거하는 나르시시스트의 인문학. 양자는 하나같이 현실 직시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환상에 몰두한 채 인문학이라는 영토에 자기 깃발을 꽂는 데 열중하는 불모의 인문학에 다름 아니다. 인간과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꾼다는 미명 뒤로 펼쳐진 삶의 적나라한 모순과 질곡을 질타할 줄 모르는 인문학은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니고, 삶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런 명분으로 세상을 속이고 자신을 기만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만드는 인문학은 차라리 해체시키는 게 낫다. 새로운 인문학을 위한 제언은 국가와 사회를 부강하게 만들거나 보편적 휴머니즘을 구현하는데 있지 않으며, 인문학의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시키는 데서 성립하지도 않는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다시 갈라놓는 것도 물론 아니다. 차라리 지금-여기의 현실을 작파하고 다른 현실을, 우리의 감각과 지식, 상식의 기반을 뒤흔들어 우리를 낯선 변경으로 던져넣는 것만이 우리들의 탐구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탐구의 여정에 붙일 만한 적절한 이름을 아직 모른다. 우리는 인문학에서 출발했지만 그 도착지는 인문학이 아닐 것이다. 불온성, 그것은 현재 알고 있는 삶의 형태를 공고하게 다지고 정상화시키는 데 있지 않고, 익숙하고 안온한 삶에 낯설고 날선 감각, 우리 자신을 베이고 다치게 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와 강제로 맞부딪히게 만드는 과정에 붙이는 이름이다. 잠정적으로나마 우리의 탐구에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면, 그것은 "진정한" 인문학을 가르친다거나, 인문학의 또다른 "재생"이나 "반복"을 위함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 여정의 출발점이 어디이며 그 과정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낯선 지도 위에 그려보기 위해 선택한 푯말일 뿐이다. 불온한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인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종(種)이며, 어디선가 항상-이미 시작된 낯선 출발점을 가리키는 지표이다.

  ‘부흥 시대’의 인문학은 세상을 바꾸는 전복의 힘도, 익숙한 것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불온성도 거세당한 박제에 불과하다. 시대의 지배적 통념을 논쟁의 대상으로 점화시키는 급진적 비판, 안일하게 수용하고 반복하면 그만인 습속의 도덕에 등 돌리고 당당히 떠날 수 있는 사유의 용기, 배제되고 학대받는 자들을 괄호쳐버린 교양의 기름진 바다에 불쏘시개를 던져넣는 과감한 행동력, 이것이야말로 ‘이미 와버린’ 인문학이 아니라 ‘도-래할’ 인문학, 혹은 아직은 이름붙일 수 없는 새로운 사유와 활동의 단초가 된다.

  지금-여기서 우리에게 새로운 앎과 감수성, 사유와 활동이 의미를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문학 부흥의 깃발을 높이 쳐드는 게 아니다. 지금은 차라리 그 깃발을 꺾어버리고, 현행의 인문학에 대한 반대를 선언해야 할 때다. 국가와 자본, 휴머니즘이라는 기치를 내건 인문학에 대결을 선포할 때다. "위기"를 떠들며 자금과 보호를 구걸할 게 아니라, 오히려 위기를 더 멀리 밀고나가 마침내 폭파시켜버리는 것. 그때야 비로소 인문학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던 지식은 지배적 가치와 통념에서 이탈해 새로운 삶을 향한 길을 만들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길들여진 영토를 떠나려 한다. 그 첫걸음은 현행의 ‘인문학의 배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균열을 내는 데서 시작한다. 이로써 우리는 국가와 자본의 통제를 받고, 휴머니즘을 명목으로 영유되던 죽은 지식을 지금-여기의 해방적 실천을 위한 앎으로 재전유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삶과 앎의 방식을 창안하는 활동은 문제의식을 공명하는 또다른 고민들과의 만남 속에서 더욱 첨예해지고 증식되리라 믿는다. 우리는 이 만남을 기다린다. 이 만남을 통해서 우리의 문제의식이, 우리의 사유가, 우리의 활동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또다시 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에 우리는 혼돈과 불안을 낳고 마침내 전복의 위험한 함성을 불러올 ‘불온한 사유’를 기다린다. ‘불온한 인문학’이란 정녕 그 날을 위한 찰나의 섬광에 불과하리라.

 

 

 

글 / 휴머니스트 대표 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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