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대듯이 ^^
남은 페이지를 ‘자주’ 계산해요, 읽고 있는 쪽수를 ‘읽어야만 하는’ 쪽수에서 빼면서.
혹시 쉬어야만 하는 시간일까, 하면서 ‘읽은’ 시간을 계산해 보기도 하고.
‘가능성’이라는 단어 옆에 괜히 실제성, 현실성 같은 대비되는 용어를 적어보기도 하고.
그리고, 또한, 그러나, 따라서, 요컨대...등의 접속사에 ○ 치면서 논의 흐름을 타려고도 하고.
괜히 mémoire, souvenir 같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기도 하고.
손가락을 같이 움직이면 좀 나을까, 키보드을 잡아땡겨 내용 정리하면서 읽기도 하고.
다른 이미지와의 관계 여부를 기준으로 논의되고 있는건가, ‘무리하게’ 구조화시키기도 하고.
...이런 행동들,
잘 안읽히는 책을 읽을 때 제가 이렇게 행동하더라구요.
며칠 전 일요일 『물질과 기억』 1장을 읽고 있을 때 제가 그랬고요.
지렁이도 꿈틀한다고,
제 ‘현재의’ 사유를 훨씬 뛰어넘는 책, 쉽게 말해 ‘잘 안읽히는’ 책이 저를 밟을 때
저 역시 그렇게 본능적으로 ‘꿈틀’해요 ^^
일요일 아침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진도의 반 ‘밖’에 못 읽고,
월요일 아침부터 다시 읽기 시작해 다행히 오후 2시 정도에 겨우 다 읽긴했지만요.
꿈틀대고, 꿈틀대고, 꿈틀대고,
그래도 쉬지 않고 꿈틀 댄 덕인 것 같아요.
세미나에서 모르는 것을 정치화하고
질문에 거칠게나마 답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요.
서 있는 차에게는 ‘결코’ 양보해 주지 않는다고,
그래도 결코 멈추지 않고, 이틀동안 지렁이처럼 꿈틀댔더니
세미나에서 오고가는 말들,
앞서 나가시는 분들의 설명과 예시,
특히 튜터샘이 준비해 온 머시기 부룩스...인가 하는 사람의
지능이 아니라 신체로서의 로롯논의 등이
제게 『물질과 기억』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네요 ^^
2) 가능적 행동
이해가 지나치면 오해할 수도 있다고,
‘이해’했다고 생각을 하니
베르그손이 달았던 1장 첫 번째 꼭지 제목이 맘에 안드는거예요.
베르그손은 ‘실제적 행동과 가능적 행동’이라고 달았는데,
차라리 ‘가능적 행동’ 혹은 ‘신체 이미지의 능력: 가능적 행동’...이게 어떨까요? ^^
나의 신체는 나의 신체를 둘러싸고 있는 대상들에 대해
실제적이고 새로운 작용을 행사할 수 있고,
이것을 베르그손은 나의 신체의 ‘가능적 행동’이라고 말한 것 같아요.
세상의 모든 것이 이미지인데,
유독 나의 신체 이미지만 ‘가능적 행동’ 능력이 있으니,
나의 신체가 대상들, 즉 다른 이미지에 대해 특권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고요.
그렇다면 실제적 행동은?
나의 신체가 어떤 대상을 만나게 된다면 행사할 수 있는 ‘가능적 행동’을
그 어떤 대상을 실제로 만나게 되어 나의 신체가 ‘가능적 행동’을 실제 행하면 그게 실제적 행동인 것 같아요.
가능한 상태의 것이 실제 상태로 되었다...는 정도의 의미로
베르그손은 실제적 행동이란 말을 한 것 같다는 거죠.
세미나에서 이렇게 논의하고 정리한 것 같은데,
제가 논의를 맞게 이해한 건지 모르겠네요^^
3) 정념이 새로운 어떤 것을 덧붙인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
세미나가 끝나갈 무렵에 제기된 질문이었죠.
베르그손은 ‘정념이 새로운 것을 덧붙인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가 이해가 안된다고...
중요한 문제이기에 뒤에서 다시 자세하게 나오니까,
그때 논의하자고 했었는데요.
그런데, 뒤에서 다시 자세히 검토하고 논의하겠지만요,
오늘 진도 부분에서도 나름대로 어떤 맥락과 내용 설명 속에서
그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만큼
뒷 부분 넘어가기 전에라도
오늘 범위에서 베르그손의 논의를 따라가 보는 것도
텍스트 이해를 위해 필요한 것 같아요.
오늘 범위만(38~39쪽)을 근거로 정념에 관한 베르그손 논의를 정리해 보면요.
①신체는 지각에 의해서 밖으로부터 알뿐만 아니라 정념에 의해서 내부로부터도 안다.
②정념들은 밖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진동들과 행사할 운동들 사이에 삽입된다.
③정념들은 행동에의 권유를 포함하고 선택가능성을 열어둔다.
④정념들이 나타나는 순간은 위험을 알리고 위험에 대비할 것을 일임할 때이다.
⑤정념 속에서 의식은 상반된 역할을 하는데, 감정의 모든 과정을 목격하는 역할과 활동이 자동화되면 스스로 사라지는 역할이다.
⑥따라서 정념은 진정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덧붙인다.
⑦그리하여 우주의 물질 속에서 그 어떤 유형도 신체에 의해 제공되는 어떤 이미지를 매개로하지 않고서 새로운 것을 산출할 수 없다.
⑥의 “따라서”는
앞의 ①~⑤가 ‘정념이 새로운 것을 덧붙인다’고 보는 근거가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텐데요,
다시 봐도 앞의 것들이 어떻게 ⑥의 결론과 연결되는지 명확하게 이해되지가 않네요.
음...혹시,
정념이 나타나는 순간과 관련시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베르그손은 정념이 위험한 순간에 나타난다고 했잖아요.
‘위험’이란 익숙하지 않은 것이고,
그렇다면 그 위험에 대비하고 그 위험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이전에 없었던 것의 창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일테니까,
정념의 작용은 우주와 우주의 역사에 진정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덧붙이는 것이죠.
그런데 만일 이렇게 설명하게 되면,
이 설명과 위의 ①과 ⑦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가 좀 ...
①의 ‘신체가 내부로부터 아는 것은 정념을 통해서’라는 말은 또 뭐고,
⑦의 ‘신체가 새로운 것을 산출하는 유일한 매개’라는 말을,
신체가 정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건지...
아~~꿈틀대는 것도 힘드네요 ㅠㅠ
암튼 다음 시간에 정념 부분 정리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①신체는 지각에 의해서 밖으로부터 알뿐만 아니라 정념에 의해서 내부로부터도 안다.
우주(세상)는 이미지들의 체계, 내지 총체인데, 그것들은 서로 작용, 반작용하며 지속(흐른)하고 있으므로, 그 자체로 안과 밖을 구분할 도리가 없잖아요. 근데 신체 이미지는 이 우주에서 특권적 위치에 있다고 하네요. 지각이란 신체가 외부 대상과 맞닿음으로서 작용함으로 나의 신체를 바깥(밖)으로부터 알 수 있고, 기본적으로 쾌나 불쾌, 또는 고통의 느낌이란 정념은 내 신체 내부에서 느끼므로, 정념에 의해 나의 신체를 안(내부)로부터 알 수 있다는 얘기인 것 같아요. 따라서 안과 밖이라는 구분도 신체 이미지를 통해서 규정된다고 말하는 것으로 읽었습니다.
⑥따라서 정념의 작용은 ‘우주와 우주의 역사에 진정으로 새로운 것을 덧붙이는 것’이다.
저는 이 문장을 접하는 순간 감전된 듯 찡한 전율을 느꼈어요. 왠지 나라는 존재가 약간 우쭐해지는 것 같았는데요. 다시 생각하자니 이 기분은 우주에서 생명체 일반에 대한 경외로운 감정이었어요, 우주는 인과법칙에 의한 자연법칙을 따르잖아요. 근데 우리의 신체는 물질(물체)일 뿐 아니라 생명체이기도 하잖아요. 나의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정념은 수학적(또는 기계적으로) 으로 환원할 수 없는 그 무엇(생명체)이잖아요. 나의 ‘짜증’도 이 우주에 뭔가 새로운 것을 덧붙인다는 것!!!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삶(존재)의 긍정이란 말로 들렸어요.
미라 샘의 후기 정말 재미나게 읽었어요. 꿈틀꿈틀. 저도 미라 샘 옆에서 꿈틀꿈틀하고 있어요.